Re: [질문] 낱생명, 개인, 개체, 자유주의의 문제
어제 녹색문명공부모임 발표를 감사한 마음으로 잘 들었습니다.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 주셔서 고맙습니다. 세미나에서 주저하다가 몇 가지를 말씀드렸는데, 제 질문을 여기에 짧게 적어보겠습니다.
(1) 우선 "근대에 우리가 개인의 독립성 및 개체성을 존중해야 할 중요한 가치로 상정하는 바탕 위에서 찾아낸 ‘자유주의’의 이념 및 자유주의적 사회 조직 원리의 소중함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라는 구절에 대한 반대의 의견을 말씀드립니다. 공부가 매우 짧은 소견이라 조심스럽긴 하지만, 저는 현재 인류에 가장 크게 해악을 끼친 이념 중 하나가 바로 자유주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유주의의 의미와 역사는 좀 복잡하지만, 자유주의 사상은 지극히 유럽중심적이고 실제로는 20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사이비 이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 계엄내란을 일으킨 세력이 내세우는 바로 그 자유주의 또는 자유민주주의 사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 생각의 바탕에는 가령 다음의 책이 있습니다.
* 피에르 마낭의 <자유주의 지성사> (한울) [ http://aladin.kr/p/YRbPp ]
* 헬레나 로젠블랫 <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 공동체의 도덕, 개인의 윤리가 되다> (니케북스) [ http://aladin.kr/p/qz2YT ]
저는 자유주의의 이념은 어떤 식으로든 폐기해야 하리라 생각하고 있어서 발표에서 이 구절을 들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의도나 내용은 짐작할 수 있지만, 더 토론해야 하리라 생각했습니다.
(2) 두 번째 질문은 이러한 논의의 성격에 대한 것입니다. 발표문에서 '윤리' 또는 '도덕'이라는 단어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이 논의를 학문분과에 굳이 끼워넣는다면, 어떤 것이 될까 생각했습니다. 철학? 윤리학? 문명론? 메타과학? 생명론? 생명철학?
저는 이러한 논의는 도덕철학이나 윤리학에 속하기보다는 생물철학 분야에서 폭넓게 이야기되어 온 주제와 연결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현대과학철학의 개별과학의 철학 중 하나로서 생물철학에서는 생명/생물이 무엇인지를 다루고 그 연장선에서 진화라는 우산 용어 아래 서술되는 양상을 둘러싼 논쟁을 담고 있으며, 그 연장선에서 생명에 대한 관념과 사유가 현실적 삶 특히 윤리와 도덕에 어떤 함의를 지니는지 논의하고 있습니다. 가령 최종덕 (2023) <생물철학> [ http://aladin.kr/p/e4cE0 ]이나 한스 요나스 생물학 (2001) <생명의 원리: 철학적 생물학을 위한 접근>이 그런 접근에 속합니다.
이전의 발표 "보람의 가치론"에 대해 제가 올린 "[질문] 보람의 가치론과 실재의 질서"( https://bit.ly/3ETimQT )에서 인용한 <센스 앤 넌센스>에서는 진화이론이 윤리와 도덕의 문제에 어떤 함의를 지니는지를 둘러싼 다섯 가지 접근의 차이를 보여주고 이와 관련된 논쟁을 소개합니다. 저는 온생명론의 중요성과 가치를 잘 알고 있고 믿고 있지만, 온생명론으로부터 윤리와 도덕으로 나아가는 길은 훨씬 복잡하고 힘든 여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온생명론의 핵심은 흔히 생각하는 '낱생명'이 실상 잘 정의되지 않는 일종의 디딤돌 개념이라는 점에 있다고 봅니다. 기존의 상식적인 '생명' 개념을 우리가 암묵적으로 다 알고 있다고 여기고 있고 또 거기에 바탕을 둔 '개인'이나 '공동체'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온생명'이란 개념과 더불어 '낱생명' 또는 '개체생명'을 말합니다. 하지만 제가 이해하기에 온생명론의 핵심은 그런 '낱생명' 개념이 매우 제한적이거나 종종 엉뚱한 방향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믿음입니다. 진정한 '생명' 개념은 '온생명'이어야 하는 것이고, 직관적 또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고 믿는 그 '낱생명'은 '보생명' 없이는 존속하기 어려운 열린 테두리라 할 것입니다.
이 점을 강조하지 않은 채 '낱생명'에 대해 논의하다 보면, 어느 새 '낱생명'은 그냥 흔히 오랫동안 이야기되어 온 바로 그 '개인' 또는 '개체'와 별 차이가 없는 전형적인 개념과 대치되기 쉽습니다.
(위의 첫 번째 질문과 연결되는데, '개인'이란 개념이 근원적이거나 보편적인 개념이 아니라 17세기 유럽에서 발명된 것이며 자유주의 사상의 전개와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점은 종종 지적되어 왔습니다.)
생명과학 또는 생명철학, 특히 진화이론과 관련된 맥락 안에서도 '경쟁'과 '협력'의 단위는 오랫동안 논쟁의 주제였습니다. 생존투쟁이든 생존경쟁이든 이타적 협력이든 그 주체는 개별적인 유기체(skin and skull)인가, 아니면 종(species)인가, 아니면 생태계 전체인가, 아니면 지구 표면의 생물권 전체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낱생명'이 이중성을 지니는데, "근사적인 독립성을 갖는 개체인 동시에 온생명 내지 층위가 다른 낱생명의 부분이기도" 하다고 말할 때의 '개체' 또는 '부분'의 의미는 다소 모호합니다.
동물행동학 또는 생태학의 관점에서 보면, 종 내의 개체들은 포식자와 대립하며 개체들끼리 협력합니다. 포식자와 피식자가 협력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먹고 먹히는 관계일 뿐입니다.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에 등장하는 "피로 물든 이빨과 발톱 Nature, red in tooth and claw"의 이미지입니다. 하지만 단위와 범위를 바꾸면 이런 이미지는 부적절하다는 점이 확연합니다.
문제는 구성되거나 발명된 개념이라 할 수 있는 '개체'를 강조하여 '이중성'이란 개념을 확장하는 것이 유용하거나 유익한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자유'와 '개체로서의 낱생명'과 독립성을 강조함으로써 온생명론에서 추려낼 수 있는 도덕적/윤리적 함의가 감소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이는 다시 이러한 논의의 성격과 분야의 규정과 이어집니다.
저의 질문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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