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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아카데미

더 나은 앎으로 푸른 미래를 가꾸는 사람들의 공부모임

녹색문명공부모임

온생명 이론의 의의에 대한 한 생각 (말미 미완)

질문 및 토론
녹색문명공부모임
작성자
시인처럼
작성일
2025-05-09 00:19
조회
44

온생명 이론의 의의에 대한 한 생각: 
낱생명의 존재론적 이중성과 행위 지침으로 중용 고려하기

– 박용국 선생의 글에 대한 논평을 겸하여


최근 박용국 선생님의 “한강의 생명과 장회익의 생명”, “민주주의와 온생명” 두 글을 아주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박용국 선생님 못지 않게 저도 온생명론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박용국 선생님은 이 이론이 말하는 바를 삶 속에서 현실과 연관하여 깊이 사색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박용국 선생님의 치열함에 감동받았고, 저의 안이함을 반성했습니다.

글을 읽다 보니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감하는 부분도 있고, 일부 아쉽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있다보니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더군요. 그러다가 이런 것이 견해를 내어놓고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가며 더 정련하게 되는 ‘추측과 논박’의 과정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생각을 내어놓고 갑론을박 토론을 하게 되면 뭐가 되었건 더 좋은 게 나올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저라도 생각을 얹어가면서 박용국 선생님이 만들어 준 좋은 기회를 ‘추측과 논박’의 장으로 이어가보고 싶습니다.


1. ‘낱생명적 의식’ 대 ‘온생명적 의식’의 이항 대립은 적절한가?

박용국 선생님은 한국 사회를 비롯해 전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현재의 문제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자연적으로 낱생명적 태도가 강화되고 있는 것”이라 보았습니다. 신자유주의의 부작용을 ‘낱생명적 개인들의 확대’라고 본다면, 이에 대해 ‘낱생명적 집단의 형성’이라는 왜곡된 대응을 함으로써 극우의 재발호와 긴장의 확대 현상을 낳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박용국 선생님은 ‘낱생명적 인간관’에 기초한 ‘낱생명적 자유주의’로부터 ‘온생명적 인간관’에 기초한 ‘온생명적 자유주의’로 우리의 제도가 심화되어야 하며, 이의 바탕으로서 ‘낱생명적 의식’으로부터 ‘온생명적 의식’으로 우리 문명의 기본 정신이 혁신할 수 있게 노력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피력합니다.

저는 박용국 선생님이 가지고 있는 현 시대 상황에 대한 우려와 진단, 그리고 노력의 방향성 모두에 깊이 공감합니다. 하지만 상황 진단 및 대안 제시에 쓰이는 개념 설정에는 적절치 못한 점이 있다 생각합니다. 이 점을 제가 이해하고 있는 온생명 이론에 대해 설명하면서 정리해보겠습니다.


2. 온생명론은 이론

온생명에 대한 논의를 가리킬 때 사람에 따라서 ‘온생명론’이라 말하기도 하고, ‘온생명 사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어떤 점에 감명을 받았는가에 따라 나뉘는 것일 겁니다. ‘사상’이 무엇인지 잘 몰라 온생명론이 사상인지는 답하기 어렵지만 온생명론이 (과학)이론이라는 점만큼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론의 기능을 설명과 예측, 특정 기대에 대한 지침 제공 등이라고 온생명 이론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설명하고 예측하여 지침을 제공합니다.

1) 온생명 이론이 설명하는 바

  • 온생명 이론은 물질 세계 가운데에서 어떻게 생명이라고 하는 새로운 종류의 질서가 자연적으로 생겨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 온생명 이론은 생명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질서는 어떠한 내적 구조와 존재 양상을 가지는지를 설명합니다.

2) 온생명 이론이 예측하는 바

  • 생명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질서의 존재 양상이 어떤 경우에 위협받게 되고, 어떤 경우에 별 문제없이 유지 보존되는지 존속가능성을 예측합니다.
  • 생명의 존재 양상의 상태들을 구분하고 상태별 존속가능성을 예측합니다.

3) 온생명 이론이 특정 기대를 가정할 때 제공하는 행위 지침

  • 생명의 유지, 보존이나 더 나아가 번성, 심화를 기대할 때의 행위 지침을 제공합니다.
  • 생명의 절멸을 기대할 때의 행위 지침을 제공합니다.

이론 본연의 기능이 설명과 예측이고, 특정 기대에 대한 행위 지침 제공은 이로부터 파생되어 얻을 수 있는 것이라 본다면 온생명 이론에 기초하여 바람직한 방향과 그릇된 방향의 지침을 얻어내는 것은 이론의 이차적 기능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3. 온생명 이론이 알려주는 생명 이해

1) 생명 출현의 최소 조건과 생명의 구조 및 존재 양상

온생명 단위

온생명 이론에 따르면 생명이라고 하는 질서는 우주 가운데 형성된 자유에너지의 흐름을 이용하여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그 존속비 1을 넘길 때 자유에너지의 원천과 자체촉매적 국소질서 및 바탕질서가 이루는 근사적 고립계를 최소 단위로 하여 출현하고 존속합니다. 이 생명의 최소 단위를 온생명이라고 하면 생명은 온생명을 단위로 해서만 생겨나고 유지되는 것입니다.

낱생명과 보생명 구조

온생명은 자유에너지 흐름을 이용해 자체촉매 기능을 발휘하는 자체촉매적 국소질서와 이 자촉질서의 기능을 가능케 하는 바탕질서로 이루어지는데 이를 낱생명과 해당 낱생명의 보생명이라고 개념화합니다. 온생명은 낱생명들과 각각 낱생명에 대한 여집합에 해당하는 나머지 온생명, 즉 보생명이 구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낱생명과 보생명의 협력 - 낱생명의 보생명 의존 및 상호 변형 관계

낱생명은 그 형성 및 존속 여부를 전적으로 보생명에 의존하는 존재 양상을 갖습니다. 하나의 개체로서도 낱생명은 그 형성과 존속을 보생명에 의존하지만, 자체촉매 계열로서 연속성을 이루는 낱생명 계열 또한 보생명에 대한 의존적 존재 양상을 갖습니다. 그러나 낱생명은 보생명에 의존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생명을 변형하기도 함으로써 낱생명의 계열과 해당 낱생명의 보생명은 상호 변형의 관계를 이룹니다. 낱생명의 보생명 의존 존재 양상과 변형 존재 양상은 긴 시계열을 통해서 상호 변형을 낳게 되고 이러한 관계가 이른바 진행형 복합질서로서의 온생명의 존재 양상을 이룹니다.

낱생명 간 경쟁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는 그 존속비 1을 넘기게 되면 그 계열이 지속적으로 존재하면서 바탕질서가 허용하는 한도까지 기하급수적으로 자체촉매 기능을 발휘하게 되지만 한도에 이른 뒤부터는 바탕질서를 둘러싼 개체들 사이의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또한 낱생명의 계열이 다양하게 분화되면 바탕질서 이용 방식에도 계열이 생겨 한 낱생명이 다른 낱생명의 바탕질서로 쓰일 수 있는 다른 종류의 경쟁 관계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전자를 1종 경쟁 관계라 하고, 후자를 2종 경쟁 관계라 칭한다면 1종 경쟁 관계는 순수한 경쟁 관계라 할 수 있겠고, 후자는 개별 낱생명 간의 관계로 보면 경쟁 관계이지만 낱생명 계열 간의 관계로 보면 협력 관계로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낱생명 간 협력

낱생명과 낱생명은 경쟁 관계만 갖는 것이 아니라 협력 관계를 맺을 수도 있습니다. 우연히 형성된 비경쟁 관계 또는 협력 관계가 존속가능성을 낮추지 않거나 높이게 되면 관계가 더 길게 이어질 수 있는데 여기에는 일시적 협력 관계 뿐만 아니라 영속적 협력 관계까지 있을 수 있습니다.

개체로서의 낱생명과 낱생명은 공통의 바탕질서를 필요로 하고 바탕질서가 제한되어 있을 경우 경쟁 관계에 놓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경쟁하지 않는 공존 관계에 있을 수 있습니다. 협력에 따라 존속가능성에 잇점이 생기는 경우에는 상생 관계나 나아가 공생 관계까지도 맺을 수 있고, 잇점이 지속되면 일시적 공생 관계가 장기적, 또는 영속적 공생 관계로 확대될 수도 있을 겁니다. 이 때 낱생명과 낱생명이 결합하여 결합 공생 관계를 맺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아 낱생명들 세계에 층위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낱생명-온생명의 부분-전체 관계, 위계 관계가 1수준 낱생명-2수준 낱생명-…-온생명이라는 다층적 부분-전체 관계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2) 낱생명 존재의 양상 - 이중성

위의 온생명의 존재 양상을 우리 자신을 포함한 낱생명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정리해 보면 낱생명은 구조적으로 이중적인 존재 양상을 갖는 동시에 기능적으로도 이중적인 존재 양상을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낱생명의 구조적인 이중성 : 개체이자 부분

낱생명은 구조적으로 근사적인 독립성을 갖는 개체인 동시에 온생명 내지 층위가 다른 낱생명의 부분이기도 한 이중성을 갖습니다. 낱생명, 즉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는 자체촉매 기능의 원인이자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주변의 다른 존재물들과 구분되는 독립적인 개체성을 갖습니다. 하지만 온생명 안의 한 부분이라는 원초적인 차원에서부터 결합 공생 관계를 통해 형성된 다층적 낱생명 층위 구조 안에서 특정 층위 낱생명의 부분이 될 수 있다는 실질적인 차원에 이르기까지 부분의 성격도 갖게 됩니다. 이러한 이중성을 신화의 야누스에 비견하자면 개체의 얼굴과 부분의 얼굴을 모두 가진 두 얼굴의 존재가 바로 낱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낱생명의 기능적인 이중성 : 경쟁하며 협력

낱생명은 기능적으로는 다른 낱생명과 경쟁하는 동시에 보생명 및 여타 낱생명들과 협력하는 이중성도 갖습니다. 본원적으로 낱생명은 보생명에 그 존속을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점에서 협력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또한 구체적인 면에서도 낱생명은 다양한 수준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다른 낱생명들과 협력할 수 있고, 실상 협력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낱생명은 제한된 바탕질서를 두고 동종의 낱생명들과 경쟁하는 관계에 놓이며, 바탕질서 이용의 계열 안에서 타종의 낱생명들과도 먹고 먹히는 경쟁 관계에 있게 됩니다. 앞에서 2종 경쟁 관계라 칭했던 이 후자의 경쟁 관계는 미시적으로 보면 경쟁 관계이고 거시적으로 보면 협력 관계이기도 한 기묘한 관계입니다.

낱생명의 시계열적인 이중성 : 한 생이자 한 국면

낱생명은 그 낱낱으로 보건대 그 하나가 생멸을 겪는 한 생이지만 앞 세대에서 뒷 세대로 이어지는 낱생명의 계열, 자체촉매적 국소질서의 연속면에서 보자면 계열 가운데 한 국면이기도 합니다.

흔히 양자역학에서 존재가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하며 ‘이중성’을 말하곤 하지만 이는 양자역학적 상태 개념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새 술을 낡은 부대에 담은 오류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낱생명의 존재론적 이중성은 그야말로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실재하고 동시적인 이중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4. 온생명 이론에 비춘 우리 삶의 이해

온생명 이론은 장회익 자연철학 중 한 부분입니다. 즉, 자연철학 이론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우리 삶을 자연에 대한 이해에 입각해서 이해하려는 경향을 소위 ‘자연주의’라 부릅니다. 이는 ‘사실’로서 ‘당위’를 합리화하는 경향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나아가 물리세계와 생명세계에서 찾을 수 있는 존재 양상을 가지고 문명적 존재인 우리 인간의 삶 문제를 정당화하려는 경향을 아우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연주의는 복잡한 문제를 가장 원초적인 데로 끌고 내려와 합리화하려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만 한편으로 우리의 오늘의 삶 가운데 중요한 한 일단을 자연을 이해한 데로부터 연원을 찾으려는 합리성도 내포하고 있으므로 무조건 배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온생명 이론으로 우리 삶의 중요한 측면을 다 도해하려는 것은 무리한 시도이겠지만 위에서 정리한 낱생명 존재 양상의 이중성에 입각해서 우리 삶의 문제 중 중요한 측면의 일단을 해명해보려 시도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의 문제를 새 생명이론과 진화론적인 설명 방식에 입각해서 접근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1) 낱생명 내적 만족 기제의 이중성 : ‘나’의 만족에 관한 두 가지 내적 기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태양-지구 온생명 안의 낱생명들의 오늘날의 모습을 진화론에 입각해서 이해한다면 우리를 비롯한 낱생명들의 내면 또한 존속가능성에 보탬이 되는 것들이 보존되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대체로 소실되는 방향으로 형성되었다고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낱생명의 존속가능성에 유리한 바를 기능적으로 잘 수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그러한 바를 더 강하게 지향하게 되는 기제가 갖추어진 낱생명이 그렇지 못한 낱생명에 비해 더 잘 자체촉매 기능을 수행하여 우위를 점했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 - 개체 보존에 이바지 하는 개체 내적 만족 기제

이러한 것을 낱생명의 내적 만족 기제라고 칭한다면 배고픔과 갈증이 해소되고 안전하게 피로를 풀 수 있으며 짝을 만나 성공적으로 자체촉매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때 이를 행복하게 느끼게 되고 낱생명의 행복을 강력하게 희구하게 하는 내적 만족 기제가 발달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보람 - 보생명 보존에 이바지 하는 개체 내적 만족 기제

그런데 낱생명의 존재 양상이 이중적이기 때문에 내적 만족 기제 또한 여기에 조응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낱생명의 개체로서의 성격과 경쟁적인 성격에 조응하는 내적 만족 기제로 행복이라는 가치가 형성되었다면 부분으로서의 성격과 협력적인 성격에 조응하는 내적 만족 기제로 보람이라는 가치 또한 형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이라는 만족은 한 개체를 완성하고 존속시키는 데에 딱 맞는 가치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한 낱생명 개체가 소멸할 때에 행복의 추구도 종결됩니다. 하지만 온생명 안의 존재로서 낱생명의 본원적 협력과 실질적 협력을 추동하는 보람이라는 가치는 낱생명 개체 밖의 보생명과 보생명 안의 여타 낱생명에게 기여를 함으로써 만족되는 내적 만족 기제로서 한 낱생명 개체의 존속을 상실하면서도 추구될 수 있는 지향이 됩니다. 따라서 필멸의 존재인 한 낱생명이 개체 이상의 존속을 꿈꿀 때에는 필연적으로 보람을 추구할 수 밖에 없으며, 삶의 의미 또한 보람에서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2) 낱생명 사회적 보호 기제의 이중성 : ‘나’와 ‘너’ 사이의 두 가지 협약 기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사회를 낱생명과 낱생명 사이에 맺은 가상의 계약에 입각해서 이해한다면 무엇보다 현대 사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유’일 것입니다.

자유 - 개체 보존에 이바지하는 사회적 협약 기제

오늘 우리의 사회는 자연적 진화에 따라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특권적 지위를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민주공화정이나 유사한 제도를 채택한 나라들은 낱생명 인간의 존엄한 삶을 최고이자 최종적인 가치로 보고 인간 개개인의 ‘자유’가 합당한 이유없이는 침해되지 않도록 보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근대에 새로이 형성된 인간관과 사회관에 입각하여 사회를 재조직한 결과일 것입니다. 이 때 최고로 존엄한 낱생명 개체들 각각의 보존에 이바지하는 ‘나’와 ‘너’ 사이의 협약 기제로서 ‘자유’가 채택되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자유로운 존재로서 ‘나’의 자유를 보장하는 만큼 동등한 존재인 ‘너’의 자유도 보장한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근간이 되는 계약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역사적인 맥락에서보자면 막강한 국가로부터 개인들의 연대를 통해 개개인의 ‘자유’를 지켜내고 보장받는 것이 근대 인권 개념의 근간이라고 합니다만 이렇게 몰역사적으로도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자유의 제한 - 보생명 보존에 이바지하는 사회적 협약 기제

그러나 사회적 협약 가운데에서도 우리들 각각이 온생명 안의 한 낱생명이라는 자연적 존재 양상을 도외시할 수는 없습니다. 사회적 존재라 해도 낱생명 이상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나’의 자유를 무제한하게 보장할 때 ‘너’를 포함한 ‘나의 보생명’의 보존이 보장되지 않을 수 있고, ‘너’의 자유를 무제한도로 보장할 때 ‘나’를 포함한 ‘너의 보생명’의 보존이 보장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와 ‘너’ 사이의 협약에는 보생명 보존에 이바지하는 협약 기제 또한 채택되어야 합니다.

3) 이중 기제 사이의 갈등

낱생명의 존재 양상이 이중적이고, 그에 조응하여 낱생명 내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이중적인 측면이 공존하므로 우리가 안팎으로 겪는 갈등은 대체로 이 이중성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행복과 보람 사이의 갈등

‘나’ 안에서 나는 때때로 행복의 추구와 보람의 추구 사이에서 갈등을 겪습니다. 나의 행복이 누군가의 불행을 야기하는 것이라면, 또는 보람의 추구가 나의 불행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이 갈등은 심각해질 수도 있습니다. 또 ‘나’의 내적 추구가 사회적인 불균형으로 이어지는 경우, 즉 ‘나’의 행복만 중시하는 부류들이 결과적으로 더 많은 자원을 획득하고, 보람을 중시하는 부류는 스스로는 내적 만족을 얻었을지라도 자원과 권한으로부터 배제된다면 이 갈등은 개인적인 갈등이자 사회적인 갈등으로까지 확대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개인이 가진 세계관과 가치관이 그릇되어 보람의 추구가 보생명에 대한 기여가 아니라 역기여로 귀결될 위험성도 있습니다. 고귀한 이상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사람 가운데 극우 테러리스트, 또는 광신적 테러리스트로 평가해야 할 사람도 있을 겁니다.

자유와 자유의 제한 사이의 갈등

사회적 협약에서도 개인의 ‘자유’의 보장과 ‘자유의 제한’ 사이에는 늘상 팽팽한 긴장이 있습니다. 여기에 불평등한 처분과 불평등을 합리화하고 조장하는 이념이 끼어들면 이 긴장은 갈등으로 촉발되고 다른 갈등 요소들이 추가로 결부되면 갈등이 극단화될 수도 있을 겁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문명의 인식 범위가 전지구적 범위로 넓어지면서 우리가 고려하게 된 보생명의 범위가 그야말로 온생명 전체에 가깝도록 확대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낱생명의 ‘자유’와 보생명을 고려하는 ‘자유의 제한’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일도 변화를 겪고 있거나 변화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고려하는 보생명의 범위가 확대될수록 낱생명의 ‘자유’ 보장 범위는 축소되기 십상이므로 인식의 확장과 보생명의 상황 변화는 새로운 갈등 요소가 될 것입니다. 21세기 극우 파시즘의 준동은 20세기적 자유와 기회의 보장이 변화를 겪어야 하는 시점에서 두려움이 폭력으로 터져나오는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5. ‘나’의 만족과 ‘너’와의 상생을 위한 온생명 이론의 지침

1) ‘나’의 내적 만족을 위한 지침과 ‘너와 나’의 협약을 위한 지침의 분리

이상과 같이 이해를 해본다면 먼저 생각할 것은 ‘나’의 내면을 향한 지침과 ‘너와 나’의 상생 협약을 위한 지침은 하나의 원리로부터 나와서는 안 되리라 생각합니다. 위에서 보듯이 ‘나’의 내적 만족 기제는 비교적 자연적 존재 양상에 조응하여 형성되었다 이해할 수 있지만 ‘너와 나’의 사회적 협약 기제는 근대 사회에 이르면서 전혀 다른 원리에 입각하여 계약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후자를 ‘자연화’하는 것은 어쩌면 복고적 기획이 될 수 있는 반동적인 것이며 거대한 폭력을 수반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생각합니다.

온생명 이론은 낱생명의 자연적 존재 양상에 크게 조응하는 ‘나’의 내적 만족 기제에 지침을 주기 더 좋다 생각합니다. 개체로서의 독립된 면과 온생명의 부분으로서 종속된 면을 모두 가진 한 낱생명인 ‘나’는 스스로 ‘독존’을 추구하며 행복을 꾀할 수 있지만, 구조적으로나 시계열적으로나 ‘더 큰 나’에 이바지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반면 ‘너와 나’ 사이의 사회적 협약 기제에 대해서는 어쩌면 온생명 이론에 따른 낱생명 이해보다는 근대의 개체주의적 시각에 입각한 ‘자유주의’의 지침이 더 유효하지 않을까요? ‘너와 나’를 똑같이 존엄하게 대해야 할 완결된 최종 존재로 대함으로써 “죽이지 않고 경쟁하며, 흡수하지 않고 협력하기”라는 상생의 전제 조건에 다가갈 수 있지 않ㅇ르까요? 

2) 이항 대립보다는 중용(中庸)

박용국 선생님은 우리가 조심해야 할 배타적 경향을 ‘낱생명적 의식’으로, 보다 미래지향적인 협력적 경향을 ‘온생명적 의식’으로 표현했습니다만 우리가 보통 피하고자 하는 양 극단을 ‘개체독존주의’ 대 ‘전체지상주의’ 정도로 표현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줄여 말하면 ‘개체주의’ 대 ‘전체주의’가 되겠고요. 박용국 선생님의 뜻은 개체주의를 지양하고, 전체주의가 아닌 ‘따뜻한 연결’를 지향해야 할 것이라는 뜻일텐데 이를 ‘낱생명적’ 무엇에 대비되는 ‘온생명적’ 무엇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오해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용 - 야누스되기, 군자되기, 의타기성

저는 지양할 것으로서 ‘낱생명적’인 태도나 의식과 지향할 것으로서 ‘온생명적’인 태도나 의식을 대비해 말하기보다는 연속된 실수 직선 위에 0을 개체주의, 1을 무아(無我)주의로 놓고 그 사이에서 야누스적인 균형점을 찾는 중용적 지향이 온생명 이론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지침을 더 잘 표현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장회익 선생님은 온생명 가운데의 한 낱생명인 ‘나’가 어느 수준까지 나로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소인과 군자, 그리고 성인을 생각할 수 있다고 한 바 있는데 박용국 선생님이 소개한 불교 유식학 삼성설의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 그리고 원성실성(圓成實性)이 이 구분과 합치되는 게 아닌가 느꼈습니다.


불교의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삼성설을 말한다. 삼성설(三性說)이란 세 가지의 성질을 의미하는데,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을 가리킨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은 두루 분별하여 집착된 성질을 의미한다. 따뜻한 연결이 실종된, 각 개체들이 차갑고 견고한 경계를 그리는 것을 묘사한다. 의타기성(依他起性)은 다른 것에 의존하여 발생하는 성질을 의미하며, 상호의존해 있는 주변과의 따뜻한 연결감 속에서의 부드러운 경계를 가리킨다. 연결감이 점점 강렬해지면, 자신이 전체와 분리된 한 개체라는 관념이 느슨해지다가 경계선이 완전히 사라지는 영역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불교 유식학에서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 부른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변계소집성이 강할수록 자신이 그리는 경계선은 차갑고 견고하며 경직된다. 자신과 다른 무언가에 대해 배타적이 되며, 공존하려 하기보다는 억압하려 하고,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며, 사회 전체를 하나의 색깔로 획일화시키려 든다. 이와 달리, 개인이나 집단에서 의타기성(상호의존성)이 강할수록 주변과의 경계선은 부드러워지며, 자신과 다른 무언가에 대해 보다 포용적이 된다. 적대적 억압이 아닌 화합적 공존의 방향을 지향하게 된다. 

 <장회익의 자연철학>에서의 낱생명 및 온생명은 불교 유식학의 변계소집성 및 의타기성과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유식학에서의 의타기성은 온생명처럼 그 연결 범위를 태양계로 한정하지 않지만, 독립된 개체 단위가 아닌 연결된 더 큰 단위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온생명과 통한다. 변계소집적 태도를 자신을 낱생명에만 국한시키는 인식에 기반한 태도, 즉 낱생명적 태도라 지칭할 수 있을까? 의타기적 태도를 자신이 낱생명이면서 동시에 온생명이기도 하다는 인식에 기반한 태도, 즉 온생명적 태도라 지칭할 수 있을까?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 박용국(2025). “한강의 생명과 장회익의 생명”. <녹색아카데미 홈페이지 기고글> 가운데.


장회익 선생님은 온생명 가운데의 한 낱생명인 ‘나’가 어느 수준까지 나로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소인과 군자, 그리고 성인을 생각할 수 있다고 한 바 있는데 박용국 선생님이 소개한 불교 유식학 삼성설의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 그리고 원성실성(圓成實性)이 이 구분과 합치되는 게 아닌가 느꼈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가 추구해야 할 중용적 관점 및 태도는 개체독존적 관점 및 태도나 무아적 관점 및 태도가 아니라 이중적 측면을 모두 인정하고 그 가운데에서 균형점을 찾는 야누스적 관점 및 태도라 생각합니다. 성리학의 개념으로 보자면 ‘군자되기’가 중용에 해당하고, 유식학에서는 ‘의타기성’이 중용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달리 말해보자면 ‘작은 나 됨’과 ‘큰 나 됨’을 모두 의식하고 추구하는 바가 ‘군자되기’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성인되기나 원성실성의 경지는 ‘나’의 차원에서도 보편적으로 추구할만한 지향이 되기 어렵고, ‘너와 나’ 차원에서는 극단적 행위로 치달을 수 있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나’의 내적 만족 기제에서의 중용, 군자되기 - 행복을 희생하지 않으며 보람을 추구하기

‘나’의 ‘삶’을 의미있고 충만한 것으로 꾸려가고자 할 때 보편적으로 우리가 지향할 만한 중용의 길은 행복과 보람을 모두 추구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무게추를 조금 더 둔다면 기여를 통한 보람 추구에 조금 더 방점이 찍히는 게 합당할 것입니다. ‘삶의 의미’는 개체의 보존이 충실한 데에서는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보람의 추구가 어떤 이에게서는 자식에 대한 헌신처럼 행복의 추구와 거리가 매우 가까운 데에 머물 수도 있겠고, 어떤 이에게서는 더 먼 존재나 더 추상적인 데로 향할 수도 있겠지만 개체의 행복 이상을 추구하는 바 자체가 나의 삶을 더 충만하게 할 것입니다. 나아가 사회적 건강성으로도 확대될 수 있을 것입니다.

‘너와 나’의 사회적 협력 기제에서의 중용, 군자되기 - ‘작은 나’의 ‘자유’를 존중하는 ‘자유주의’ 이념에 기반을 두되 보생명을 더 넓게 인식하며 ‘자유의 제한’을 인정하기

‘너와 나’의 사회적 협력 기제에서 중용을 추구하는 것은 보다 까다로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근대에 우리가 개인의 독립성 및 개체성을 존중해야 할 중요한 가치로 상정하는 바탕 위에서 찾아낸 ‘자유주의’의 이념 및 자유주의적 사회 조직 원리의 소중함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미완성인 채로 우선 끄적였던 메모만 덧붙입니다.)

6. ‘온생명 이론이 알려주는 ‘나’ 이해

1) ‘나’의 출현으로 세계의 두 측면 드러남

  • ‘나’의 출현으로 물질의 내면이 그 존재성을 드러냄
  • ‘나’의 출현으로 ‘가치’의 세계 출현? 또는 생명의 출현으로 ‘가치’의 세계 출현?

2) ‘나됨’이 뚜렷해질수록 세계의 깊이가 깊어짐

  • ‘나’를 인식하는 낱생명이 출현한 뒤로 ‘나됨’의 정도가 심화되어 나가고 있음.
  • 생물학적으로 인류에 이르러서는, 그리고 문명이 형성되고 나서는 ‘나됨’의 깊이가 극한에 이르러 ‘나’를 자각하는 개체를 기준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조직하기에 이름.

3) ‘나됨’은 재앙인가, 기적인가?

  • 개체주의적 생명관이 극단에 이르면 개체와 온생명을 등가로 여기는 수준에까지 이를 수 있음.
  • 존재론적으로 온생명이 없으면 낱생명도 존속할 수 없으므로 개체주의적 생명관은 ‘나됨’의 심화에 따른 자연스런 시각일 수는 있으나 상당한 허상이 섞여 있음을 부정해서는 안 됨.
  • 그러나 ‘나됨’의 심화로 인해 우리의 존재 세계가 다원화되고 다층화되는 존재의 심화가 이어지고 있으므로 ‘나됨’을 허상으로만 치부해서는 곤란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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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09 10:48

    어제 녹색문명공부모임 발표를 감사한 마음으로 잘 들었습니다.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 주셔서 고맙습니다.
    세미나에서 주저하다가 몇 가지를 말씀드렸는데, 제 질문을 여기에 짧게 적어보겠습니다.

    (1) 우선 "근대에 우리가 개인의 독립성 및 개체성을 존중해야 할 중요한 가치로 상정하는 바탕 위에서 찾아낸 ‘자유주의’의 이념 및 자유주의적 사회 조직 원리의 소중함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라는 구절에 대한 반대의 의견을 말씀드립니다. 공부가 매우 짧은 소견이라 조심스럽긴 하지만, 저는 현재 인류에 가장 크게 해악을 끼친 이념 중 하나가 바로 자유주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 두 번째 질문은 이러한 논의의 성격에 대한 것입니다. 발표문에서 '윤리' 또는 '도덕'이라는 단어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이 논의를 학문분과에 굳이 끼워넣는다면, 어떤 것이 될까 생각했습니다.

    질문을 쓰다 보니 길어져서 답글로 따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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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5
불편을 드려서 죄송해요. 최근 정비에 들어가서 짬짬이 홈페이지에 불필요한 파일들을 덜어내고 있어요. 여유를 좀 확보해서 편하게 이용하시도록 해볼께요. 참, 당분간 게시판 글에 첨부되었던 파일과 사진이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용량 확보 작업을 하면서 일부 파일들을 옮겨두어서 그런 건데요, 소실된 것 아니고 잠시 옮겨두어서 그런 거니 당분간의 의도된 에러라는 점 양해해주세요~.
2025.05.13
^^;; 꼭 필요한 문서는 첨부하셔야지요. 책 원문 파일은 용량이 커서 그렇게 말씀드렸어요. 링크를 달면 좋은데 그게 안 되는 경우도 있고 그러네요. 양해 부탁드려요. ㅎㅎ;;;
2025.05.12
전화, 라디오, TV 등에 사용되는 전자기파는 매질이 없어도 존재하는 파동입니다. 파동이 항상 '무엇인가'의 파동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무엇인가'를 파동의 매질이라 부릅니다. 매질이 없어도 파동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입니다. 2015년에 처음 검출된 중력파도 매질 없이 존재하는 파동입니다. 빛의 파동도 매질 없이 존재합니다. 19세기에는 빛의 매질을 '에테르'라고 부르면서 당연한 것으로 여겼지만, 대략 1905년 아인슈타인의 논문 이후로는 빛의 매질로 여겨졌던 '에테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류의 이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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