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모임의 토론에 이어
작성자
박 용국
작성일
2025-04-11 20:39
조회
39
안녕하세요. 어제 모임에서 김종미 선생님, 임경애 선생님이 중요한 질문을 제기해주셔서 깊은 토론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모임시간이 부족해서 더 자세한 의견 교환은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제 제기해주신 질문에 대한 제 견해를 보충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김종미 선생님께서 말씀주신대로, 생명의 이미지는 다양한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채식주의자』에서 언급된 피묻은 고깃덩어리의 생명 이미지, 폭력적이고 잔혹한 생명의 이미지도 당연히 포함될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식물 포함)을 죽여야만 하는, 인간이 놓인 이러한 조건에 괴로워하며 죽음만이 구원의 길인지 물었던 한강은, 이후의 소설에서 어떻게 삶을 외쳤을까 생각해봅니다.『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한강은, 그럼에도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명으로서 진실을 증거해야 한다고, 삶 쪽으로 바람이 부니 기어서라도 가라고 외치고 있습니다.『소년이 온다』에서 한강은 인간의 존엄성을 향해 나아가고,『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더 나아가 사랑과 생명의 따뜻함을 말합니다. 한강의 입장에서는 삶의 많은 시간 동안 이 질문들을 껴안으며 나아가는 과정이 있었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 과정이 갑작스런 비약처럼 느껴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생명들 사이에는 연결이 존재하지만, 즉 생명은 단절적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해 있지만, 그 연결에는 차갑고 냉혹한 연결이 있기도 하고 따뜻한 연결이 있기도 한 것 같습니다. 정글의 약육강식 이미지로 대표되는 먹이사슬로서의 연결도 분명히 존재하고, 서로가 서로를 돕고 보살피는 따뜻한 연대망으로서의 연결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어제 장회익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러한 연결의 속성은 선과 악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적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명들 사이의 이러한 연결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라 생각합니다. 차가운 연결만을 취하면, 다른 생명체는 나의 생존을 위해 희생시켜야 하는 대상이 되면서, 사실상 연결이 단절된 분절적, 파편적 개체들로 구성된 세계만이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똑같은 상황을, 다른 생명체들 덕분에 내가 생존할 수 있다고 여기면, 더 나아가 이러한 연결망 자체를 자기자신으로 여기면 -이것이 곧 온생명의 주체적 의식이라 여겨지는데- 따뜻한 연결이 남게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생존을 위해 다른 생명을 먹어야 하는 먹이사슬로서의 연결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따뜻한 연결이라는 기반 위에 이것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장회익 교수님이 미국이 계실 때 받았던 생명에 대한 이미지 역시 이러한 따뜻한 연결에 기반한 이미지라 여겨집니다.
그러던 가운데 연구라는 구실로 일 년 간의 말미를 얻어 미국 어느 곳에서 지내던 1977년 어느 날, 내 머릿속에는 마치 어떤 영감과 같은 하나의 환상이 떠올랐다. 광막한 대지 위에 태양이 내려 쪼이자 서서히 지표면으로부터 마치도 아지랑이와 같이 꿈틀꿈틀 피어오르는 그 무엇이 보였다. 그러다가 이것이 서서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형되면서 살아 있는 생태계 전체의 모습이 그 안에 펼쳐지고 있었다...화분에 물을 주니 화초가 피어나듯이, 지구라는 물질적 바탕 위에 태양의 에너지가 내려 쏘이니 생명이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장회익,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추수밭, 2019, 382-383P>
이는 곧 ‘너’와 ‘나’의 관계가 소중하다고 인정될 경우 자신의 주체성을 확장해 ‘너’를 나’와 구분되는 존재로만이 아니라 더 큰 ‘나’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우리의 주체 곧 ‘나’라는 것은 하나의 고정된 ‘작은 나’에 국한되지 않고 주변과의 관계를 인식함에 따라 ‘더 큰 나’로 그리고 ‘더욱 더 큰 나’로 내 주체성을 계속 확대해나가게 된다... 우리의 삶은 개체로서의 ‘나’ 그리고 그 밖에 공동체로서의 ‘나’ 그리고 더 크게 온생명으로서의 ‘나’가 동심원적으로 배열된 가운데, 어느 ‘나’에 어떠한 색깔을 입히고 사느냐에 따라 각자의 특성이 발휘된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책, 421-427P>
한강의 노벨상 강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소설을 쓰는 동안 사용했던 몇 권의 공책들에 나는 이런 메모를 했다.
생명은 살고자 한다. 생명은 따뜻하다.
죽는다는 건 차가워지는 것. 얼굴에 쌓인 눈이 녹지 않는 것.
죽인다는 것은 차갑게 만드는 것.
역사 속에서의 인간과 우주 속에서의 인간.
바람과 해류. 전세계를 잇는 물과 바람의 순환.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다, 부디.
어제 말씀드렸지만, 위의 말에는 생명의 한 측면만이 담겨있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한강은 생명은 따뜻하며, 죽인다는 것은 차갑게 만드는 것이라 했는데, 사실은 다른 생명을 죽여 그 생명의 따뜻한 온기를 없애는 것 역시 생명입니다. 생명은 따뜻하지만, 그 따뜻함을 대량 학살의 폭력을 통해 없애는 차가움과 냉혹함 또한 생명이 가지고 있는 속성입니다. 한강은 생명의 참혹과 생명의 존엄 사이에서 사투를 벌였고, 제가 느끼기로 한강은 생명의 따뜻함 속에서 생명의 차가움을 껴안은 것 같습니다. 한강에 의하면, 마음 속 깊은 곳 서로 간의 금실이 있기에, 즉 사랑이 있기에, 세계의 고통과 인간의 참혹에 대해 괴로워하며, 동시에 세계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존엄에 대해 경탄하게 됩니다. 한강에 의하면 가장 깊은 곳(한강의 표현에 의하면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따뜻한 연결(서로를 이어주는 금실)이 있고, 한강은 이 안에서 세계의 고통과 인간의 참혹, 생명의 비정한 먹이사슬을 껴안는 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 위의 한강의 메모에서 한강은 분명 생명의 한 측면, 즉 따뜻함만을 말하였지만, 생명의 다른 측면을 무시하고 배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정면으로 그것을 직시하고 생명의 따뜻함 안에서 껴안으려 했다고 생각합니다. 한강은 바로 이러한 통합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학살이 벌어진 모든 장소에서, 압도적인 폭력이 쓸고 지나간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밝혀지는, 작별하지 않기를 맹세하는 사람들의 촛불은 어디까지 여행하게 될까? 심지에서 심지로, 심장에서 심장으로 이어지는 금(金)실을 타고? <한강의 노벨상 강연에서 발췌>
생명의 다양한 측면을 배제하지 않되, 따뜻한 연결이라는 관점에서 이 모든 것을 통합하려는 한강의 생명관은 장회익 교수님의 온생명관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한강에게 피묻은 고깃덩어리로서의 생명은 따뜻한 생명, 가장 깊은 곳에서 서로 간 금실로 연결되어 있는 생명 안에서 껴안아지고 통합되며, 장회익의 자연철학에서 냉혹한 먹이사슬로서 연결된 생명은 연결망 전체를 나로 인식하는 온생명 안에서 껴안아지며 통합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그 통합의 길은 계속 걸어나가야 하는 길인 것 같지만 말입니다. 한강의 생명과 장회익의 생명은 이렇게 대칭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한강의 생명과 장회익의 생명>을 썼습니다.
어제 김종미 선생님과 임경애 선생님께서 좋은 지적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좋은 논의의 장을 만들어주신 황승미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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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감사합니다. 저를 거명해주시다니용. 저야말로 박용국선생님의 훌륭한 생각을 글로써 나눠 주셔서 읽을 수 있어서 무척 감사하지요. 저도 생각을 글로 담는 능력이 좀 능숙해졌음 좋겠닷부럼도 들었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