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문명공부모임- 숙제
한 장 써서 오라 해서 써 봅니다. 언제나 엉망이지만 잘 받아주실 줄 압니다. ㅎㅎ
읽은 자료들 -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한강의 소설 3권 –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박용국의 글 두 편 - <한강의 생명과 장회익의 생명>, <민주주의와 온생명>
작년 후반기부터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이하 <장자철>)세미나에 참여하고 있는데 ‘20년에 이어서 어찌하다보니 두 번째다. 첫 번째의 불성실을 만회하리라 작심을 했는데 이번 두 번째도 신통치 않긴 마찬가지다. 변명하자면 너무 바빠서였다. 혹시 세 번째의 기회가 온다면 시간적 여유가 있는 때 이길 바래본다.
얼마전에 장자철 세미나에서 발제자이시자 호스트인 최우석 선생님께서 ‘장자철의 백미는 ’온생명’과 ’온전한 앎’章 이다’는 이같은 말씀을 하신 적 있는 데, 그 말에 문득 ‘아, 나는 장자철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읽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자철의 목차를 내 방식대로 앞 뒤로 나누면, 앞 장은 물리세계에 대한 물리학 지식의 발전사, 역사적 접근이고 뒷 장의 구성은 장회익교수님의 지적 탐구 여정의 결실로써 우주-세계, 인간-생명을 아우르는 독창적 논지가 담긴 철학과 사상인 온생명론과 온전한 앎이 실려있다. 최우석 선생님의 말씀, 이 부분이 이 책의 백미라는 의미에 매우 동의하며 그렇다, 장자철의 하이라이트는 온생명과 온전한 앎이다.
그런데 나는 왜 생각을 놓치고 있었을까. 무슨 생각을 하며 책을 쫓아온 건지 뒤돌아볼 필요가 느껴졌다. 우선 나는 장자철을 통해 근현대 물리학이 밝혀내는 우주, 물질, 생명의 기전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을 해소하고픈 열망이 컸다. 장회익교수님의 주 사상이자 축적해 온 지식의 정수라고도 할 수 있는 온생명, 온전한 앎의 깊이를 음미하기 보단 그 사상과 지식이 생산되어져 나오는 ‘과학적 과정‘에 오히려 더 관심이 쏠렸다. ‘자기촉매적 국소질서‘라는 생명현상의 기전을 설명한 부분에서 가장 경탄했고 ‘주체와 객체‘의 신비...부분에선, 과학이 뒤로 물러서고 믿음이 잠깐 끼어든 게 아닌가 의구심은 지금도 여전히다.
장회익교수님의 온생명사상은 가치관을 넘어 의심할 여지 없이 옳다고 생각한다. 온생명론의 바탕이론, 과학적 합리성에 안심이 더 되어 이젠 내 안의 확고한 신념이 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온생명론이 날벼락 같은 놀라움이 없었던 것은 내가 살아오며 나름대로(어설픈) 쓴 답안지와 ’과학자이자 철학자 장회익교수님‘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온생명 사상에 담긴 내용의 격차는 크다!!
그날 세미나 중간 어떤분이 또 이런 질문을 했다. 온생명 사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면 그 다음 우리의 행동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요지? 였을 것이다. 그 질문은 흥미로웠다. 나 스스로 자주 묻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수님의 답변은 좀 실망스러웠는데 기억하기로 온생명관을 토대로 각자의 삶을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거 외에 무슨 뭐가 있겠는가 하는 말씀인데 ‘정답’같기도 하지만 어찌보면 ‘노답’처럼 들려서다. 온생명의 기전을 온전하게 ‘알았다’면 온생명적 관점과 태도는 온생명적 행동을 낳게 될 텐데 필연적으로 대중적이거나 사회적, 세계적 ‘무브먼트’가 그 귀결로써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하는게 내 생각이다.
온생명을 온전하게 알게 될 때 즉, 온생명을 온전한 앎으로 전환할 때, 우리는 삶을, 사회를, 세계를 다르게 살고 다르게 조직하고 다르게 할 것이다. 모든 것이 바탕부터 지금과는 다를 것이다.
저번 달 3월인가? 박용국 선생님이 마침 한강작가의 소설들에서 생명을 둘러싼 문제들과 장회익교수님의 온생명론을 사상을 함께 이어서 현재의 어지러운 시국과 세태에 대한 단상? 써 올리셔서 점심시간을 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엊그제도 새 글이 올리셨다기에 다 제치고 찾아 보았다. (매우 긴 글 ;;;) 그 긴 글이 술술 읽히는 것이 신기하다. 암튼, (내 식으로) 요지는 한강의 소설에서 겉으로 드러난 소재는 공권력에 의한 폭력(소년이 온다) 내지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폭력(작별하지 않는다), 생명이 생명에 대한 폭력(채식주의자)이지만 진짜 작가가 잡고있는 주제는 생명 자체에 대한 근원적 물음인 듯 하다. 생명은 다른 생명의 희생으로부터 나오고 유지되므로. 이때의 희생은 폭력이라 할 수 없다. 작가는 사랑 또는 양심이라고 표현한다. 폭력이 되는 지점은 어디일까? 한강작가의 숙제로 가늠된다.
온생명 세계에서도 낱생명의 존재는 보생명의 도움 (희생, 사랑)이 반드시 필요한 데 낱생명과 보생명이 폭력적 관계라면 온생명은 건강하다 할 수 있을까? 혹시 .장회익교수님의 온생명론으로 생명과 사랑(희생)과 폭력을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또 행동의 잣대를 구할 수 있을까? 과학적 합리성을 담지한 논리와 방정식을 찾을 순 없을까? 엉뚱하게 이런 생각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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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자연철학이야기 대담 녹취록, 세미나 녹취록, 카툰 등 링크 모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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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생명과 장회익의 생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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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Cosmos』 읽으면서 초반에 알아두면 도움되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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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may33 | 2024.12.13 | 0 | 216 |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임경애님 글도 항상 술술 잘 읽힙니다. ^^
모두 바쁘신데 글까지 써오시라고 하기 무리인듯하여, 가장 인상적이거나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챙겨서 오시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뭐 써오셔도 괜찮지만...이라는 사족을 써오시라는 것으로 기억하신 듯합니다. 죄송합니다. ㅠㅠ ^^;;;
저도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의 핵심은 계속 다음 자리로 올라가면서 순환하는 앎의 뫼비우스 띠라고 생각합니다. 1장에서 앎의 바탕구조를 말씀해주시고, 2~9장까지 그 구조 속에 들어간다고나 할까요. 그것이 앎의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고, 다시 그 내용이 스스로에게 되먹임 되어서 다시 뫼비우스의 띠를 구성하는 그런 비유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해진 최종적인 답은 있을 수 없는 게 아닐까 싶어요. 위에 쓰신 글처럼 어제도 답, 방정식 말씀하셨지만 '이 길이다', '이게 답이다'하면 그건 더 이상 앎이기 아닌 게 되겠죠. 앎은 말하자면 외부 환경이랄까 변화되는 조건에 부응해야 하니까요. 거칠게 썼으니 적당히만 읽어주시고, 자세한 내용은 책을 확인해주세요. > . <
생각해보니 그런 측면에서 어제 모임이 의미있고 재밌는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다시금 듭니다.
한강작가의 소설을 생명/연결이라는 측면에서 장회익선생님의 자연철학적 생명이론과 연결지어서 보고, 장회익선생님의 이론을 사회/문화예술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면서 새로운 앎의 고리를 돌려본 거라고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강작가의 소설과 장회익선생님의 이론이 각각의 분야에서만 앎의 고리에서 돌아가다가 만났다(연결되었다)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 새로운 측면을 보게 해주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서로 어디가 연결 되냐, 서로 다른 얘기인 것 같다라고 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얘기이기는 하지만(제안하는 사람과 반론하는 사람이 서로 더 고민해야할 부분?!), 그렇다고 그런 접근 자체가 틀렸거나 그러면 안 된다고 해서는 우리가 얻을 게 없어질 것 같아요.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의 10장에서는 선생님이 태극도설을 가지고 와 ‘견강부회’의 소지가 있다고까지 하시면서 현대적인 관점으로 재해석하시는데요. 만일 우리가 혹은 선생님이 태극도설의 내용을 고정된 것으로 생각한다면 절대 이런 작업을 할 수 없을 거라고 봅니다. 고정된 것이라 보게 되면 태극도설은 언제나 천 년 전 모습 그대로이고, 현재 우리와는 무관한 채로 늘 그 자리에서 잠만 자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앎’이 고정된 것이라고 보면 우리는 재해석, 다른 해석, 연결짓기 이런 것이 불가능해지는 거지요. 박제된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인류 지성의 역사 수천 년을 보면 늘 그렇게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늘 revival, remake해왔는데 말이죠. (제가 너무 방어적인가요? ^^;)
그래서 자유롭게 이런 저런 생각 해보고, 뒤집어도 보고, 붙여도 보고, 자유롭게 가로지르는 공부를 앞으로도 해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용이 어렵기도 하고 시간이 부족해서 조목조목 따지지는 못해서 아쉬웠지만, 이렇게 어제 모임의 의미를 되새겨보았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어내는 데에는 모임 효과가 확실히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모임을 정해 놓으면 아무래도 책읽기를 덜 미루게 되네요. 🙂
저는 어제 모임 준비하면서는 박용국씨 글 다시 훑어보고 책 읽느라 바빠서 생각을 별로 못 해봤는데요. 오늘 댓글 쓰면서 조금 정리가 되는 듯도 합니다.
어제 모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선생님의 생명의 ‘모형’이론, 그리고 유전적 모형과 문화적 모형이 설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진 과거가 현재를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나, 죽은 자가 산 자를 산 자가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나 하는 말은 역사적으로 너무 가슴 아픈 말이기도 하지만, 늘 다른 자리로 올라서는 앎의 뫼비우스의 순환 고리가 떠오르네요.
『소년이 온다』 소설 중에도 나오지만, 인터뷰를 하고 녹취록을 만들고 절대 끈을 놓지 않고 일해온 사람들이 없었다면 한강작가가 이 소설을 쓸 수 없었을 겁니다. 늘 딛고 올라설 발판이 필요한 거죠. 그리고 한강작가의 소설이 뫼비우스의 띠 속으로 들어가 그 다음 또 누군가의 발판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잘린 손가락의 신경이 죽지 않고 연결되도록 하기 위해서 3분마다 바늘을 찔러 피를 나게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저는 이런 기록 작업, 소설을 쓰는 일, 그 소설을 읽는 일들이 모두 바늘을 찌르는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단콤보로 댓글이 쌓이다니 기부니가 넘 좋네요. 숙제 했다고 칭찬선물주신건가요? ㅎㅎ 모임에 출석만 해도 제슨
스로에게 마음이 얼마나 뿌듯한데 이렇게 또 칭찬선물까지 두둑하게! 너무 신나네요. 한강님이나 박용국쌤의 생명론과 장회익교수님의 온전한 앎의 모형인 뫼비우스의 띠로 이으시는거 재기발랄? 하시다 생각했어요. 생명은 서로간에 이어져야 살고 또 순환하면서 생명현상이 유지되는 게 뫼비우스 띠와 다름없네요. 만능안경같은. 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