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질문] '국소질서' 개념에 관한 질문들
시인처럼님이 중요한 질문을 올려주셨습니다.
온라인 세미나에서 장회익 선생님께서 주된 대답을 하셨지만, 부족하나마 제 의견을 조금 더 보충하면 어떨까 싶어서 글을 적습니다.
우선 '국소질서'라는 용어와 개념이 가령 물리학계에 널리 사용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한, 이 용어와 개념은 장회익 선생님께서 고유하게 사용하시는 용어와 개념입니다. 제 짧은 공부 안에서는 물리학이나 철학에서 이 용어가 직접 사용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대신 '질서(order)'와 '무질서(disorder)' 그리고 '혼돈(chaos)' 등의 개념이 가장 중요한 기초개념이 되는 분야가 있습니다. 이른바 복잡계 과학입니다. 하지만 '복잡계'가 무엇인지도 아직 제대로 통일된 주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온도란 무엇인가?" 못지 않게 "복잡계란 무엇인가?" 또는 "질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매우 심오한 철학적 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그냥 국소질서의 문제를 즉답해 보려 합니다. 우선 국소질서라는 용어에서 '국소(local)'라는 수식어는 시간과 공간의 테두리를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시작과 끝이 있고, 일정한 공간적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질서입니다. '질서(order)'는 사회 질서일 수도 있고, 어떤 조직체일 수도 있고, 추상적 서열과 위계일 수도 있는데, 자연과학 내지 자연철학에서는 일정한 내부구성을 유지하고 있어서 어느 정도의 정체성이 있는 대상을 가리키는 우산용어라 하겠습니다.
Q1. 원자, 원자핵, 중입자, 중간자, 쿼크 등은 일종의 질서 나아가 국소질서일까요? 물질에 대해 우리는 직관적으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가장 난해하고 어려운 개념이 바로 '물질'입니다.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에서도 세상이 근본적으로 네 가지 뿌리(흙, 물, 숨, 불)로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근원적 요소인 '아토모스'로 이루어진 것인지 사변적인 논의가 있었습니다. 과학혁명기의 다양한 자연철학적 논의에서도 가장 중심이 된 것이 바로 이 물질의 정체였습니다. 데카르트, 가상디, 뉴턴, 맥스웰 등으로 이어지는 자연철학의 흐름에서 가장 심각한 논쟁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현대 입자물리학은 세상 만물이 모두 기본입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기본입자는 여섯 종류의 쿼크(quark)와 여섯 종류의 렙톤(lepton) 그리고 네 종류의 매개입자를 가리킵니다. 문제는 "이루어져 있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모든 종류의 '이루어짐'은 이합집산이며 일정한 수명 동안만 일부 공간영역에 존재합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물질은 근본적으로 국소질서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공인된 입자들의 기본성질을 Particle Data Group (https://pdg.lbl.gov/2024/tables/contents_tables.html)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입자물리학 또는 그 기본 서술언어인 양자장이론에 따르면, 사실 세상 모든 만물이 수명을 갖습니다. 다만 전자의 수명은 현재 알려진 실험결과에서 계산하면 $6.6 \times 10^{28}$년보다 큽니다. 우주의 나이가 138억년 즉 $1.38 \times 10^{10}$년과 비교하면 사실상 전자의 수명은 영원한 것이나 진배 없습니다. 또 양성자의 수명도 현재 알려진 실험결과에서 계산하면 $1.67 \times 10^{34}$년보다 큽니다. 전자보다도 더 길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의 실험 결과와 충돌하지 않는 최소수명입니다.
사실상 영원히 존재할 것 같은 전자나 양성자와 달리, 중성자의 수명은 885.7초 즉 약 15분입니다. 베타붕괴라는 것을 통해 중성자는 양성자와 전자와 중성미자로 붕괴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대다수 입자들은 길게는 $10^{-6}$초, 즉 1백만분의 1초 가량 살거나 짧게는 $10^{-25}$초라는 말 그대로 찰나를 살다 사라집니다. 이런 것은 말 그대로 국소질서라 해도 무방할 겁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Particle_decay
Q1-1. ‘질서’란 ‘통계역학적 개념’, 즉 구성물이 많은 상황에서 통계역학적인 상태에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인가? 아니면 상식적인 ‘질서’ 개념과 통계역학에서의 ‘질서’ 개념, 동역학에서의 ‘질서’ 개념이 모두 다 다른 것인가?
질서를 크게 보아 구성요소들이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서로 얽혀서 전체적으로 정체성을 유지하는 단위로 일정 시간 동안 일정한 공간 영역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보면, 우리가 만나는 거의 대부분의 것이 일종의 질서라 할 수 있습니다. 가령 태풍이나 산불도 국소질서이고 지구나 태양도 국소질서이며 은하조차 국소질서라 부를 수 있습니다. 사회적 질서와도 일맥상통합니다.
Q2. 그러므로 화합물, 즉 화학 결합으로 만들어지는 다양한 물질들은 당연히 일종의 국소질서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합니다. 모든 것이 흐릅니다. 그렇게 변화하는 것을 1500년 전 유럽에서는 alchemy (the change)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여기에서 al-을 뺀 것이 바로 chemistry이며, 이것이 동아시아에서 '화학(化學)'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습니다.
Q3. 모래, 수정, 다이아몬드, 흑연 등은 다른 물질(화합물) 내지 분자에 비해 꽤 오래 갑니다. 그렇게 수명이 상대적으로 긴 것도 있지만, 유리처럼 약간의 충격으로 바로 구조가 깨져 버리는 비정질도 있습니다. 화합물이라는 국소질서도 매우 다양한 셈입니다.
Q3-1. 우주 공간에서 먼지들이 뭉쳐서 항성과 행성을 이루고, 나아가 행성계, 은하 등등의 우주적 차원의 구조를 이루는 것은 당연히 국소질서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영원할 것 같은 은하도 몇 억 년의 세월이 지나면 사라질 것이고, 지금도 은하가 생겨나는 것처럼 보이는 곳이 우주관측에서 드러납니다. 별이나 행성이 만들어지고 사라지고 하는 것은 더더욱 당연한 일입니다.
Q3-2. 그렇다면 이렇게 국소질서가 모이거나 흩어지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당혹스럽게도 이런 이합집산을 설명하는 이론이 오랫동안 없었습니다. 엔트로피라는 개념으로는 이런 것을 거의 설명하지 못합니다. 대략 엔트로피와 에너지가 서로 어느 한 쪽이 더 강세를 보이는 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텐데, 이렇게 엔트로피 $S$와 에너지 $E$를 함께 고려하는 개념이 바로 헬름홀츠 자유 에너지 $F=E-TS$입니다. 화학에서는 압력과 부피까지 고려하여 기브스 자유 에너지 $G=E + PV - TS$를 도입하여 다양한 변화를 설명해 냅니다.
하지만 이런 개념들은 모두 평형 열역학에서 만들어진 개념입니다. 평형이란 것이 매우 이상한 개념입니다. 평형 상태(equilibrium state)는 "한번 그 상태로 들어가면 더 이상 변화하지 않는 상태"로 정의합니다. 과장해서 말하면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현실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극단적이고 이상적인 상황을 가정해야 비로소 에너지, 엔트로피, 자유 에너지 등의 개념을 정의하고 수학적으로 다룰 수 있습니다. 이름에서는 '열동역학(thermodynamics)'이라고 변화를 의미하는 '동역학(dynamics)'을 넣었지만, 실질적으로 이 이론은 변화를 말하지 않는 '열정역학(thermostatics)'입니다.
열역학을 확률통계이론으로 설명하는 통계역학에서도 이러한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현재 아주 세련되게 발전해 있는 이론은 평형통계역학입니다. 현실의 상황은 이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비평형 통계역학에 대한 논의가 100년 넘게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비평형 통계역학은 표준적인 이론이 없을 뿐 아니라 여러 접근이 서로 모순적이거나 충돌하기도 합니다.
국소질서를 설명하려는 시도 중에서 지난 50여년 동안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이 바로 "스스로 짜인 고비성(자기조직 임계성, SOC, Self-Organized Criticality)"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평형통계역학을 벗어난 비평형 통계역학의 한 형태입니다.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 159-160쪽, 210-212쪽, 273쪽 등에도 이 스스로 짜인 고비성 이론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비교적 알기 쉽게 설명하면서 깊은 통찰을 주는 것이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 제7부 "복잡계와 통합적 사고"입니다. 특히 24강 "복잡성과 고비성"에 더 상세한 이야기가 있고, 스스로 짜인 고비성 이론은 614-619쪽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짜인 고비성 이론과는 다른 맥락에서 쩔쩔맴(frustration)의 이론이 중요하게 부각되는데, 그것이 25강 "복잡계의 물리"에서 다루는 내용 중 하나입니다.
스스로 짜인 고비성이 어떻게 국소질서의 발생과 성장을 보여주는가 하는 문제는 지난 50여 년 동안 다양하게 연구되어 왔는데, 아래 도표가 그런 연구결과를 몇 가지 보여줍니다. 도표의 출처는 M. Achwanden (2011) Self-Organized Criticality in Astrophysics: The Statistics of Nonlinear Processes in the Universe. Springer.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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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자연철학이야기 대담 녹취록, 세미나 녹취록, 카툰 등 링크 모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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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꼽문] 책새벽-화/금. 『세계철학사 3』 6장. 기학의 표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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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Re:<슈뢰딩거의 자연철학 강의> 서평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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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꼽문] 책새벽-화/금. 『세계철학사 3』 3장.과학혁명의 전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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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사피엔스』 비평글 모음 / 순서가 바뀐 그림('우리 사촌들의 얼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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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자료] 『사피엔스』 비평글 모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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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꼽문] 책새벽-화/금. 『세계철학사 3』 2장.근대적 합리성의 탄생 (p.75-11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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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꼽문] 책새벽-화/금. 『세계철학사 3』 1장 - 2절. ‘외물’에의 지향 (p.4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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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회익 저작 읽기 - 소감과 앞으로 공부 계획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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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may33 | 2024.10.13 | 0 | 149 |
우와! 짤막한 질문에 엄청 상세한 답변 너무 감사합니다!! 역시 찾아보고 공부를 해야겠군요. 복잡계 과학이나 스스로 짜인 고비성 공부를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