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와 조선의 천문학
(* 책밤에서 함께 읽고 있는 책 이완 리스 모러스(Iwan Rhys Morus)의 책 <그림과 사진으로 보는 옥스퍼드 과학사>의 고대 지중해 세계의 과학 부분에 프톨레마이오스의 책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전에 제가 다른 곳에 썼던 글이 참고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가져옵니다. *)
프톨레마이오스가 세종 무렵에 조선에 알려져 있었을까?
"조선시대 세종 대에 있었던 1422년 일식을 딱 15분의 오차로 잘못 예측해서 서운관의 담당자가 징계를 받았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담겨있다고 한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발표된 시점이 1543년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당시 서운관에서 예측한 일식은 조선으로 전해진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이용했음에 분명하다." (https://bit.ly/2QJOKbL)
이 인용문은 세종 때 이미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체계가 '수입'되었고 이를 이용하여 "1각”(하루는 십이지를 사용하여 12시로 나누고 이를 다시 ‘초’와 ‘정’으로 나누었으므로 하루는 24시간이었고, 1시간을 4각으로 나누었으므로 1각은 대략 현대의 15분 정도)의 오차로 일식을 예측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서술의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
16세기말에 유럽의 예수회사들이 명나라로 가서 기독교(천주교)와 더불어 자연철학(자연과학)의 성과들을 전해 주었다. 대표적으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가 있겠다. 마테오 리치는 코페르니쿠스가 세상을 떠난 뒤 태어났으니, 예수회사들이 중국에 천문학을 전해주었다면,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체계를 전해 주었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중국에 간 예수회사들은 코페르니쿠스의 따끈따끈한 천문학 이론을 소화하고 있지 못했다.
1725년에 완간된 古今圖書集成은 6휘편 1만 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전집류이다. 그 목록만 40권에 이른다. 그 중 曆象彙篇에 실린 그림을 보면 명백하게 튀코 브라헤의 지구-태양중심체계이다. 우주의 중심은 지구이며, 지구 주위로 달의 천구와 해의 천구가 있고, 나머지 다섯 행성천구들과 항성천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놓여 있는 체계이다.
동아시아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여하간 세종 무렵 천문학으로 일식을 예측했다면 틀림없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체계를 이용했으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것은 이야기의 절반에 불과하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과학'은 늘 다른 나라 다른 문명에서 '수입'된 것이라는 믿음을 암묵적으로 가져왔다. 조선 초 세종 시기에 일식을 정확하게 예측했다는 기록을 보고, 우리 고유의 천문학이 놀라운 수준이었다고 생각하지 못하기 십상이다.
먼저 유럽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그 유명한 저서 <알마게스트>가 출간된 게 언제쯤인지 알게 되면 좀 이상해진다.
게오르크 폰 포어어바흐(Georg von Peuerbach 1423-1461)가 일종의 제자이자 동료인 요하네스 뮐러(Johannes Müller von Königsberg 1436-1476)와 함께 <알마게스트>의 번역을 시작한 것이 1460년이다. 요하네스 뮐러는 레기오몬타누스(Regiomontanus)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포이어바흐는 교황청의 명을 따라 레기오몬타누스와 함께 <알마게스트>의 번역을 시작했지만, 이듬해 전체 13권 중 6권까지만 번역 작업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레기오몬타누스가 나머지 번역을 마치고 Epytoma in almagesti Ptolemei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것이 1461년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Georg_von_Peuerbach
https://en.wikipedia.org/wiki/Regiomontanus
그런데 세종실록에 나오는 일식 예측 사건은 세종 4년 즉 1422년의 일이다. 포이어바흐-레기오몬타누스의 프톨레마이오스의 번역보다 40년이 앞서는 일인 것이다. 그러니 세종 무렵에 프톨레마이오스가 조선에 알려져 있었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름은 그 뒤로도 한참 나중에야 조선에 알려졌을 것이다.
물론 이 말도 어폐가 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그 유명한 저작을 처음 라틴어로 번역한 것은 크레모나의 게라르두스(Gerardus Cremonensis)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Gerard_of_Cremona
게라르두스는 다름 아니라 프톨레마이오스의 그 책을 읽기 위해 톨레도로 가서 아랍어를 배웠고,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1175년경에 Syntaxis Mathematica라는 제목으로 그 책의 라틴어 번역본을 출간했다. 중세 유럽의 대학에서 4과(quadrivium) 중 하나였던 천문학(astrologia)의 주된 교재는 바로 이 게라르두스의 번역이었다. 그렇다면 세종 시기에 게라르두스의 라틴어 번역이 조선에 소개되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게라르두스가 라틴어로 번역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책은 다름 아니라 아랍어로 된 al-majisṭī المجسطي였다. ‘알마지스티’ 또는 ‘알마게스트’는 “위대한 책”이란 뜻이다. 첫 아랍어 번역은 살 이븐 비쉬르 알 타바리(Sahl ibn Bischr al-Tabari سهل بن بشر c. 786–c. 845)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마와 비잔틴을 거치면서 유럽 대륙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작이 거의 잊혀지고 있는 동안 300년 넘도록 이슬람 자연철학에서는 정교한 지구중심체계를 발전시키면서 독자적인 이론체계를 구성해 가고 있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Almagest
Μαθηματικὴ Σύνταξις
al-majisṭī المجسطي
Syntaxis Mathematica
포어어바흐-레기오몬타누스의 완전한 번역은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바로 번역한 것이었고, 게라르두스가 저본으로 삼았던 아랍어 번역판은 그리스어에서 번역된 것이었다.
조선 초에 이순지나 김담과 같은 집현전 학자들이나 서운관의 여러 전문가들이 프톨레마이오스가 집대성한 체계를 배운 것은 바로 이 아랍어 판본이었다. 그래서 이를 회회력이라 불렀다. (이슬람=회교도) 이 내용은 <칠정산외편>에 담겨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칠정산내편>이 있었고, 이는 대통력을 기반으로 했는데, 대통력은 원나라 곽수경이 정리한 수시력을 수정한 것이다. 그러니 조선 세종 무렵의 천문학 계산은 대통력과 회회력을 둘 다 참조하는 이원적인 접근이었고, 세종 무렵에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회회력을 통해 그 태양중심체계와 특히 히파르코스가 도입한 대원-주전원(deferent-epicycle)과 프톨레마이오스가 도입한 이심(eccentric), 등각속중심(equant) 등의 계산 도구가 집현전 학자들과 서운관의 천문학자들에게 알려졌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전이 있다. 세종실록에 기록된 그 일식 이야기, 즉 서운관 관리 이천봉(李天奉)이 일식 예측을 1각 틀리는 바람에 곤장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일어난 것은 1422년이고,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이 출간된 것은 각각 1442년과 1444년이다. 그 일식 사건 이후 20년이 지나서야 이 놀라운 천문학 책 두 권(또는 두 질)이 출간된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종 4년에 전통적인 방법, 즉 수시력(대통력)을 기반으로 한 일식 예측이 1각이나 틀리자, 세종이 이순지, 김담 등에게 명령을 내려 천문역법을 정돈하게 했고, 20년이 지나서야 그것이 결실을 이룬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한자로 번역된 회회력을 열심히 연구했고, 전통적 역법을 다룬 <칠정산내편>과 더불어 회회력을 다룬 <칠정산외편>이 모두 세상에 나왔다.
https://bit.ly/3bmKsAQ
https://dl.dongascience.com/magazine/view/S200702N028
https://dl.dongascience.com/pdf/aView/S200702N028
그런 점에서 세종실록에 실린 그 일식 예측은 프톨레마이오스와는 아무 상관 없이 전통적인 역법으로 15분 정도의 정밀도의 예측을 한 것이다. <칠정산외편>의 방법을 사용하면 3분 이내의 오차로 일식을 예측할 수 있다.
19세기 중엽에 나온 최한기의 <지구전요>에는 多祿畝(프톨레마이오스), 的谷(튀코), 瑪爾象(메르센), 歌白尼(코페르니쿠스)의 체계가 모두 소개되고 있다.
“第一多祿畝, 論地爲六合之中心, 地周圍太陰水金太陽火木土及恒星, 各有本輪, 俱爲實體, 不相通而相切. 本輪之外, 又有均輪, 七政各行于均輪之界, 而均輪之心, 又行于本輪之界. 然此論不足以明七政運行之諸理, 今人無從之者.”
“第二的谷, 論地爲六合之中心, 地周圍太陰太陽及恒星, 各有本輪, 隨地旋轉. 水金火木土五曜之本輪, 則以太陽爲心, 而本輪之上, 俱有均輪.”
“第三瑪爾象, 論地爲六合之中心, 不距本所, 而每日旋轉一周于南北兩極. 地周圍太陰太陽及恒星旋轉, 太陽周圍水金火木土之輪轉.”
“第四歌白尼, 置太陽于宇宙中心. 太陽最近者水星, 次金星, 次地, 次火星, 次木星, 次土星. 太陰之本輪繞地球, 土星旁有五小星繞之, 木星旁有四小星繞之, 各有本輪繞本星而行距. 斯諸輪最遠者, 乃經星天常靜不動.”
최한기 地球典要 (1857) 蔣友仁 , 地球圖說 「七曜序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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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wikipedia.org/wiki/Deferent_and_epicycle" target="_blank" rel="noopener">https://en.wikipedia.org/wiki/Deferent_and_epicycle
https://en.wikipedia.org/wiki/Equant" target="_blank" rel="noopener">https://en.wikipedia.org/wiki/Equant
잘 읽었습니다. 반전이 너무 재밌습니다. 곤장 맞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이야기를 잘 짜면 재밌는 과학사 추리 영화 하나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서운관 이천봉이 일식 예측을 겨우 1각(15분) 틀렸다고 곤장을 맞았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1420년대이니까요.
그 시대 서운관 학자들은 엄청난 국제감각, 지식을 다 갖추어야했겠어요. 대단해요. 참, 장영실도 서운관 관리였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