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홉스의 대생지식
어제(9월 14일) 녹색문명공부모임 새로운 시즌이 시작했습니다. 장회익 선생님의 주요 저작들을 차분히 읽어가면서 장회익 사상을 살펴보는 엄청난 프로젝트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삶과 온생명] 1장에서 논의된 "대인지식, 대물지식, 대생지식"과 관련하여 유럽의 사유 전통에서도 오히려 대생지식이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는 의견을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장회익 선생님의 말씀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인문학의 인식론적 구조"를 밝히는 프로젝트에서 장회익 선생님의 새로운 접근은 자연스럽게 동아시아와 유럽의 인문학적 사유를 대비시킬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장회익 선생님이 개념화하시는 '대생지식'은 "삶의 장과 삶의 양상에 대해 아는 지식"(16쪽)으로서, "우리가 인식한 사물이 우리 삶에 대해 어떠한 연관을 가지느냐, 그것이 우리의 사람다운 삶을 이루어 나가는 데에 어떻게 기여하느냐"(19쪽)에 관심을 두는 지식입니다.
대생적 지식의 가장 중요한 점은 세계와 자연에 대한 탐구가 자연스럽게 삶의 양식과 태도와 윤리적 규준 등의 문제로 연결된다는 데 있습니다.
"동양의 학문에서도 자연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며 이를 위해서는 관념적 사고를 넘어서 자연의 현상 하나하나를 분명히 살피고 거기서 이치를 따라 사물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중시하고 있다. ... 이와 같은 논의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삶인가 하는 논의로 매우 자연스럽게 넘어간다."(28쪽)
제가 더 주목하면 좋겠다 싶어 말씀드린 것은 대생지식이야말로 유럽의 인문학적 사유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었다는 저의 믿음입니다. 또 가령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어던의 기반으로 쓴 삼부작이 바로 "물체론(De Corpore)" "인간론(De Homine)" "시민론(De Cive)"이라는 사실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홉스는 뉴턴의 이름과 연결된 자연철학(물리학)을 '물체론'으로 발전시키고 여기에 기반을 두어 인간론을 구성한 뒤, 다시 이를 확장하여 시민론을 구성하고 사회윤리를 만들려 했습니다.
- Adams, Marcus P., 2016, “Hobbes on Natural Philosophy as ‘True Physics’ and Mixed Mathematics”, Studies in History and Philosophy of Science Part A, 56(April): 43–51. doi: https://doi.org/10.1016/j.shpsa.2015.10.010
- Adams, Marcus P., "Hobbes’ Philosophy of Science",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ummer 2023 Edition), Edward N. Zalta & Uri Nodelman (eds.), URL =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sum2023/entries/hobbes-science/>.
- "De Corpore". Hobbes Studies Volume 30 (2017): Issue 1 (2017) https://brill.com/view/journals/hobs/30/1/hobs.30.issue-1.xml
저는 홉스가 특이한 경우라고 보지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이미 그러한 원대한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있습니다. 존재론적 사유로부터 자연스럽게 윤리적 기준과 삶의 목표와 의미를 도출하는 것입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다름 아니라 형이상학과 존재론으로부터 윤리학의 함축을 찾고, 반대로 윤리학의 기반을 형이상학과 존재론에 두는 작업을 중심에 둔 철학자입니다.
유럽의 인문학 전통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 자연철학 즉 지금의 자연과학과 같은 기반의 사유를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자주 인용되고 논의되는 "자연주의적 오류"란 부르는 것은 실상 1903년에 출간된 조지 에드워드 무어의 저작 [윤리의 원리 Principia Ethica]에서 처음 제안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지 무어는 그 책에서 그냥 단순히 윤리적 가치와 미추의 판단을 수반하는 지식과 사실에 대한 지식을 혼동하는 것이 자연주의의 오류라고 말했습니다. 벌써 100여년이 지난 낡은 저서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자연주의의 오류'라는 말이 여러 곳에서 나오며, 이 말에 대해 심각한 도전은 오히려 적은 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무어의 책이 보편적으로 가치판단과 사실판단이 섞일 수 없다는 주장을 담은 것이 아닙니다. 무어의 주된 관심은 이른바 자연주의 윤리학을 비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비자연주의 윤리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주의 윤리학이 지닐 수 있는 맹점을 공격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연주의 윤리학은 윤리의 근거를 자연에 대한 탐구에서 도출할 수 있다는 믿음이므로, 윤리학 전체에 대한 공격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자연주의 윤리학은 사실과 가치의 문제를 너무 좁게 해석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논의되는 사실/가치의 얽힘은 자연주의 윤리학이 아니더라도 여러 상황에서 나타납니다. (참고: "사실과 가치의 얽힘" https://bit.ly/44SBqFP )
무어가 말하는 '자연주의 윤리학'이 과연 잘못된 것이고 무어의 '비자연주의 윤리학'이 옳은 것인가 하는 문제는 더 깊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무어가 이 주제에서 어떤 식으로든 논의를 선점하고 있는 셈이지만, 저로서는 무어의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지금의 생태환경의 문제와 거대한 우경화의 문제와 집단주의의 문제 등에 대해 윤리와 도덕을 세우기 위해 다름 아니라 자연과학과 자연철학의 함의를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지난 7월에 이와 관련된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 이중원, 홍성욱 엮음 (2023). 과학과 가치: 테크노사이언스에서 코스모테크닉스로. 이음. http://aladin.kr/p/D4TYX
저는 장회익 선생님의 대생지식 개념이 최근 크게 관심을 모으고 있는 비인간 전환, 신유물론, 행위자연결망이론(ANT)의 정신과 잘 맞아 떨어진다고 보고 있습니다.
시간이 나는 대로 저의 생각을 더 정리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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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Cosmos』 읽으면서 초반에 알아두면 도움되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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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당위의 얽힘은 매우 중요하고 또 어려운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꼭 읽어볼만한 책이 작년에 한국어판으로 나왔습니다.
* 로레인 대스턴, 이지혜, 홍성욱 (2022) 도덕을 왜 자연에서 찾는가? - 사실과 당위에 관한 철학적 인간학. 김영사. http://aladin.kr/p/MzUN6" target="_blank" rel="noopener">http://aladin.kr/p/MzUN6
저자는 저도 잠시 거친 적이 있는 독일 막스플랑크 과학사연구소(MPIWG)의 명예소장인 로레인 대스턴입니다. 오랫동안 과학과 가치, 사실과 당위의 문제를 깊이 탐구해 왔습니다. 피터 갤리슨이라는 미국의 과학사학자와 함께 <대상성/객관성(Objectivity)>이라는 멋진 책을 2007년에 내기도 했습니다.
대스턴이 2018년에 Gegen die Natur라는 제목으로 그리고 다시 2019년에 Againt Nature라는 제목으로 사실과 당위의 문제를 조명하는 아주 얇은 책을 냈습니다.
* Lorraine Daston, Peter Galison (2007) https://press.princeton.edu/books/paperback/9781890951795/objectivity" target="_blank" rel="noopener">Objectivity. Princeton University Press.
대스턴은 조지 무어가 말한 자연주의의 오류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다른 맥락에서 도덕과 윤리의 기반을 자연에서 찾으려 하는 노력이 부적절하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로레인 대스턴의 책 빌려왔습니다. (감사하게도) 말씀대로 정말 얇네요! 내용은 어렵겠지만서도... ^^
아닙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생각할 거리는 많이 던져주지만 글이 매끄럽고 논리가 정연해서 읽기가 힘들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사실과 가치의 문제가 얽혀 있다는 것은 이해가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만 어느정도 오해가 있을 수 밖에 없는 논제로 생각됩니다. 과학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포지셔닝 하느냐에 따라 모순이나 순환논리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무기의 발전이야말로 과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총이나 폭탄, 미사일 핵무기 등은 과학적 발명일텐데 이것은 가치와 관련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나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이 과학적 발견이 과학의 목표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혼돈스러운 지점이 될 것 같습니다. 사실과 가치의 문제가 얽혀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중첩되는 장은 결국 인간학적 지점이 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선생님께서는 철학의 근간을 자연철학으로 규정하고, 과학을 자연철학의 하위개념으로 전제해 두시고서 글을 쓰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를 명확히 해야 선생님의 윗 글의 의미가 좀 더 명료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자연과학(natural science)이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의 하위개념이라고 보고 있지는 않습니다. 과학사를 공부하면서 19세기 이전에 '과학(science)'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중 핵심이 되는 것이 바로 자연철학임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자연철학은 지나칠 만큼 외연이 큰 개념이어서 일종의 '우산 개념'으로서 많은 것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연금술도 자연철학에 속하고 18세기말 독일 낭만주의 철학에서의 자연에 대한 탐구도 자연철학에 속합니다. 19세기 동안 이러한 기존의 자연철학과 대비하여 더 엄격하고 더 실증적이고 더 '객관적인' 자연탐구가 발전했고, 그것이 바로 지금 볼 수 있는 '자연과학'의 뿌리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장회익 선생님께서 대물지식, 대인지식, 대생지식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 깊은 혜안이라고 믿습니다. 19세기 이후의 유럽 기반의 자연과학은 여러 면에서 철저하게 '대물지식'을 추구했습니다. 1950년대에 가령 찰스 스노우가 1959년의 강연 "두 문화와 과학혁명"에서 자연과학 전문지식인과 문예 지식인('literary intellectuals') 사이의 문화적 차이를 말했을 때, 그 문예 지식인은 여러 면에서 '대인지식'을 추구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C. P. Snow (1959) The Two Cultures and the Scientific Revolu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장회익 선생님께서 "서구의 종교와 인문학, 그리고 자연과학과 그 산물인 과학 기술이 곧바로 대인 지식과 대물 지식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며, 또 애인 지식과 대물 지식이라는 소박한 원초적 지식의 틀이 이 모든 복잡한 지적 전개를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아님은 확실하나, 여전히 그 커다란 흐름에서 본다면 이러한 연원적 특징들이 서구 지성사의 전개 과정을 통해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라고 서술하신 것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제가 장회익 선생님과 다른 의견을 가진 부분은 19세기 이전 특히 17세기 유럽에서의 상황입니다. 13세기 중세 유럽에서 만들어진 대학에서 '인문학(후마니타스)'으로 불리는 것이 연구와 교육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 핵심에서 대인지식의 흐름은 분명합니다. 동시에 중세유럽 대학의 교과과정에서 강조되어 온 4과(quadrivium) 즉 천문학, 정수론, 기하학, 화성학이 모두 수학 영역에 속하며, 그 기본적인 탐구방법과 주제가 자연철학이라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17세기 무렵 자연철학이 새로운 양상으로 확장되어가면서, 기존의 후마니타스(파이데이아)가 대생 지식으로 발전해 간 측면이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오.~ 어떠한 질문에도 늘 생각할 거리를 풍부하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추정컨데 대인지식과 대물지식, 대생지식은 그 방향에서 다른 것이므로 그 얼개의 재구성이 언제나 새로운 문제로 등장할 수 밖에 없다는 것으로 이해되네요.~
어떠한 저의 우문에도 거리낌없이 늘 현답을 해 주시는 선생님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저야말로 늘 좋은 질문을 던져 주시는 것이 고맙습니다.
총, 폭탄, 핵무기의 문제는 실상 꽤 복잡한 것 같습니다. 총이나 폭탄은 굳이 따지면 '과학(science)'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좁은 의미의 '기술(technic)'의 산물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현대적 의미의 자연과학과는 다르지만 18세기까지 자연에 대한 탐구는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과 자연학(natural history)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자연철학이든 자연학(자연사)이든 18세기 이전에는 총이나 폭탄 같은 것과 직접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총이나 폭탄을 만들고 개량한 사람들은 대개 '장인(craftmen)'에 속했습니다. 가령 아이작 뉴턴이나 현미경을 만들어 미생물을 발견한 안토니 판 레이우엔훅은 총이나 폭탄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18세기 프랑스어권에서 전개된 계몽사조의 백과전서운동에서 이와 관련된 서술들이 발견되긴 하지만, 사람들이 만들어낸 발명품을 망라하려던 것이었고, 또 방대한 지식의 일부로 다루어졌을 뿐입니다.
19세기에 전개된 테크노사이언스(technoscience)는 실상 과학과 기술이 분리불가능한 하나가 된 것을 가리키며, 현대의 '과학'은 실상 대체로 이 테크노사이언스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19세기 동안의 테크노사이언스가 전쟁무기와 직접 연결된 것은 아니라 해도 자본가의 이념과 가치에 철저하게 봉사하는 모습이 두드러집니다.
전쟁무기와 과학이 직접 만난 것은 아무래도 일차세계대전 무렵부터라 하는 게 적절해 보입니다. 프리츠 하버는 자신의 유기화학 및 합성화학의 전문적 과학지식을 확장하여 대규모 살상무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이차세계대전은 더더욱 과학기술과 전쟁이 긴밀하게 연결된 무대였습니다.
과학자의 자의식에 관한 문제가 되겠군요. 위와 같은 간략한 정리 만으로도 저같은 문외한에게는 도움이 됩니다만 깊이 생각하자면 이 역시 쉽지 않은 주제일 듯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