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꼽문] 책새벽-화/금. 『세계철학사 2』 4장. '도'를 찾아서 (p.189-299)
녹색아카데미 온라인 책읽기 모임 '책새벽-화/금' 시즌3에서는 현재 『세계철학사 2 - 아시아세계의 철학』(이정우. 2017. 길)을 읽고 있습니다.
제4장 ‘도’를 찾아서: 난세의 철학자들 (189)
1부 잃어버린 길을 찾아서
4장. '도'를 찾아서 : 난세의 철학자들 (189)
§1. 헤게모니의 시대 (191)
- 주례와 패권 사이에서 (194)
- 노골적인 패권의 등장 (201)
- 패권 시대의 쇠퇴 (206)
§2. 공자 : 만세의 사표 (209)
- 공자와 그의 시대 (210)
- 14년 주유의 드라마 (220)
- 공자와 제자들 (228)
- 소크라테스와 공자 (241)
§3. 자연과 작위 (249)
- 『노자』의 사유 (250)
- 공자와 노자 (266)
§4. 예치와 법치 (270)
- 역사를 보는 눈 (271)
- 예치와 법치 (274)
§5. 인과 겸애 (280)
§1. 헤게모니의 시대
p.190.
삶이 복잡하고 고통스럽고 모순으로 가득 찬 시대일수록 윤리와 정치의 사유는 활짝 피어난다. 지중해세계에서도 갖가지 계급투쟁이 이어지던 시대에 정치적 사유가 움텄으며, 고통과 회환의 아테네 황혼기에 이르러 가장 절박하고 심오한, 삶의 근저를 깊이깊이 들여다보는 윤리적-정치적 사유가 피어났다.
다른 한편, 거대 권력이 지배하는 곳에서 정치적 사유는 숨을 죽이게 된다. 그리스보다 훨씬 거대하고 강력했던 제국들에서 정치적 사유가 조산해버린 사실은 정치적 사유란 개인들의 일정 수준의 자유가 존재하는 곳에서 성립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시사해준다. 거대 권력이 만물을 제압하는 상황에서 '다른 생각'이란 피어날 수 없다.
특수성과 일반성의 위계적 체제를 깨는 것은 단독자들(singularities)의 혁명적 사유가 보편성을 향해 퍼져나갈 때만 가능하다. 윤리학과 정치철학은 삶이 극히 고통스러우면서도 그 고통에 맞서 사유할 수 있는 일정 수준의 자유가 존재할 때 발달한다. 고통스러운 자유, 자유로운 고뇌가 사유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 주례와 패권 사이에서
p.194.
공자의 『춘추』는 기원전 722~479년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보통 ‘춘추시대’는 시간대를 앞뒤로 확장해 기원전 770년에서 기원전 453년까지를 가리킨다. 기원전 770~721년을 따로 ‘동천기’라 부르기도 한다.
춘추시대의 시점은 유왕 살해 후 그 아닐은 평왕이 낙양으로 천도한 시점이고, 그 종점은 중원의 진나라가 그 귀족 집단들이었던 한, 위, 조로 쪼개진 시점이다. 동주 왕조 자체는 256년에 멸망하지만, 낙양 천도 이후 이미 왕조로서의 힘을 상실한 채 제후들에게 끌려다녔다.
[그림 1] 춘추시대 후기(기원전 5세기) 중국 [출처 : wikipedia/Spring and Autumn period]
p.196-197.
… 제는 … 환공 때에 마침내 패자의 자리에 오른다. 환공의 패권은 그가 사실상 자신과는 원수 사이였던 관중을 포용함으로써 가능했다. … (관중은) 법치를 반석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법가사상의 비조가 되었다.
그의 정치는 훗날 제갈량이 그를 흠모했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 ‘지식인-관료’와 ‘귀족-영주’의 투쟁은 동북아 여갓를 관류하는 핵심 테마 중 하나이거니와, 관중이야말로 지식인-관료의 최초의 뚜렷한 모습을 보여준다.
- 노골적인 패권의 등장
P.202.
제와 연합군이 북의 이민족과 남의 이민족을 막아냄으로써 제 패권하에서의 춘추의 질서는 이어졌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환공과 관중 이후 약화되어가던 제를 대신해 중원의 패자를 꿈꾸었던 송과 동북방으로 진출을 꾀하던 초는 홍하에서 격돌했다.(기원전 638년)
초가 홍하를 건널 때 송의 신하가 지금이 초군을 칠 기회라고 권하자 송 양공은 준비되지 않은 적을 칠 수 없다면서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송은 초에 대패한다. 이 사건을 가리켜 “송양의 인”이라 부르며, 이제 힘을 동반하지 않은 인은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에 이른다.
- 패권 시대의 쇠퇴
p.208-209.
… 6세기 중엽에 이르면 각 국가들은 모두 일정한 한계에 달하게 된다. …
…
이와 같은 교착 상황은 마침내 평화 협상을 도래시키게 된다. 송의 재상 상술의 노력과 진의 지도자 조무, 초의 지도자 굴건의 동의로 546년 진과 초 그리고 제, 서방 진은 평화조약을 맺기에 이른 것 … 이른바 ‘미병’이다. … 그러나 이 회맹에서 서방 진과 제를 제외한 소국들은 공식적으로 진이나 초에 조공을 바치는 의무를 지게 된다.
… 이렇게 소국들이 대국들에 보다 명시적으로 종속되기 시작함으로써 ‘전국칠웅’으로 가는 씨앗이 뿌려지게 된다. … 이제 ‘패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쇠락하고, 노골적인 약육강식의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 … 동북아 철학사에 불후의 업적을 남기게 될 공자가 6세 되던 때의 일이다.
§2. 공자 : 만세의 사표
- 공자와 그의 시대
p.209-210.
공자는 "내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말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발언이다. 열다섯 나이에 학문에 뜻을 두는 일은 당시로서는 극히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명시적으로 남아 있는 문헌들로 본다면 우리는 이러한 경우를 공자에게서 처음 발견하게 된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우선 인간은 동물이므로 태어나 성장하고, 남녀가 교합해서 아이를 낳고, 늙어간 후 죽는다. 또,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일정한 국가와 법의 테두리, 일정한 사회적-문화적 장에서 태어나 특정한 직업을 가지고서 일정한 제도를 따라 살아간다.
인간의 삶은 동사들을 통해서 나타난다. '먹다', '달리다', '싸우다', '사랑을 나누다', 직업을 얻다' 등등. 춘추시대로 말한다면, '농사를 짓다', '추수를 하다', '먹다', '전쟁을 하다', '어떤 자리에 오르다' 등등. 공자는 인간에게 이런 동사들 외에 다른 동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가르친 사람이다. 바로 (이전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공부하다'라는 동사를. 정신을 성숙시키다, 앎을 확장하다, 새로운 사유를 하다 등의 다른 동사들이 모두 이 공부하다, 학문을 하다라는 동사에 기반을 둔다.
공자는 열다섯 나이에 당대의 사람들이 꿈꾸던 동사가 아니라 '학문을 하다'라는 동사에 뜻을 둔 인물이다. 공자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그 존재와는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표명함으로써 동북아 철학사의 새로운 문턱을 넘어선다.
p.211.
공자가 볼 때 역사는 몰락의 과정이었다. 공자는 예전의 나라들 중 서주야말로, 특히 주공 단이 세운 주례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였다고 판단했다. 공자의 이런 판단은 서주의 쇠락과 동주의 도래, 그리고 춘추시대의 전개 과정 전체를 보고서 내린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자의 이상은 '좋았던 옛 시절'을 복구하는 데에 있었다. 날이 갈수록 기관으로 치닫는 춘추 말(주석 28 참고)을 살아야 했던 공자의 꿈은 주례를 다시 일으켜 예전의 태평성대를 복원하는 것이었다. (주석 29 참고)
p.212.
공자는 단순히 주례를 복권시키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새롭게 정초하고자 한 것이다. "사람이 어질지 않다면 '예'가 다 무엇이란 말이냐? 어질지 않다면 '악'이 다 무엇이란 말이냐?"(인의불인 여예하, 인이불인 여악하 ; 사람이 어질지 못하면, 그가 행하는 예가 어떻겠으며, 사람이 어질지 않다면, 그가 행하는 악이 어떻겠는가 라는 의미)
공자는 법은 예에 의해 정초되어야 하고, 예는 인에 의해 장초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현대 식으로 말해, 법이라는 사회과학은 예라는 윤리학에 의해 정초되어야 하고, 예라는 윤리학은 인이라는 존재론에 의해 정초되어야 한다. 반대 방향으로 말해, 인은 예를 통해 구현되어야 하며, 예는 법을 통해 구체화되어야 한다.
또 하나, 공자는 동북아 문명에 인문세계라는 새로운 삶의 차원을 도래시켰다. 공자는 인간에게 먹고사는 것, 싸우는 것, 권력을 잡는 것 등등 외에도 어떤 다른 세계, 인문학적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가 교육했던 시, 예, 악 등은 예전과는 다른 차원의 뉘앙스르르 띤 것이었다. 그는 "시로 일으키고, 예로 세우고, 악으로 갈무리한다"(흥어시 립어례 성어락)고 했고, 이렇게 이루어지는 세계는 인간이 오직 인간이기 때문에 도달할 수 있는 삶의 또 다른 차원이었다.
p.215-216.
… 공자는 ‘학문’이라는 개념을 단순한 한 영역/분야나 출세를 위한 도구로서가 아닌,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개념으로 변환할 수 있었다. … 공자는 학문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 ‘개념’을 창조한 것이다.
…
공자에 이르러서 동북아의 학문은 비로소 철학적 수준에 이를 수 있었다. 공자는 ‘인’을 비롯한 많은 철학적 개념들/원리들을 재사유함으로써, 인간-됨의 수준을 끌어올리고자 했다. 지중해세계에서의 “paideia”/“studia humanitatis”에 해당한다. 나아가 ‘학’은 ‘습’과 혼연일체를 이루어야 한다.
p.216-217.
“내 나이 삼십에 두 발로 섰다.” “두 발로 섰다”는 것은 무엇을 듯할까? 15세 이후 학문을 갈고닦은 그가 삶의 의미와 자신의 앞날에 대한 어떤 확고한 비전을 획득했음을 뜻할 것이다.
공자는 창고지기, 가축 관리자 등의 직을 성실히 수행해서 귀감이 되었으나, 물론 이러한 일들은 그의 꿈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젊은 공자는 이미 학문적으로 세상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공자의 신분적 제약은 그가 뜻을 펼칠 기회를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다.
- 14년 주유의 드라마
p.223.
세상천지를 다 둘러봐도 도는 없고, 지배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싸움에만 몰두하고 있으며, 백성들은 고통에 허덕이며 근근이 연명하고 있다. 문왕의 도는 땅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 ‘문’…은 아직 남아 있지 않은가?
내가 아니라면 그 문을 누가 이어갈 것인가? 내가 아니라면, 그 문을 누가 널리 펼 것인가? 하늘은 그 문을 이어가고 또 널리 펴기 위해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공자 이전에 누구도 이런 길로 발걸음을 내디딘 바 없었고, 공자는 자신이 파천황의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50세의 나이에 깨달은 ‘천명’이었다.
(여기서부터 2024년 4월 11일 업데이트한 부분입니다.)
- 소크라테스와 공자
p.242-243.
… 이들의(소크라테스와 공자) 철학함의 양태는 현저하게 달랐다. 소코라테스는 “ti esti?”(what is x?)라는 물음을 통해 당대의 왜곡된 가치들을 논리적 사유를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 가장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방식으로 가장 현실적이고 가치론적인 문제들을 해결코자 한 것이 소크라테스 사유의 핵심이다.
반면, 공자의 사유는 역사적이다. 공자 역시 인, 효, 충서, 예악 등등에 새롭게 사유했으나, 그 양태는 논리적 정의가 아니라 ‘조술(祖述)’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주공 단에 의해 정립되고 이후 계속 변해온 역사를 반추하면서 ‘경(經)’들을 새롭게 정리하고, 그 과정에서 당대의 퇴락한 가치들을 새롭게 하려 한 것이다.
*조술 : 선인(先人)의 설(說)을 근본(根本)으로 하여 그 뜻을 펴 서술(敍述)함. (네이버 사전 참조)
p.244.
소크라테스도 공자도 자신들의 물음에 대한 본격적인 형이상학적 사유를 전개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의 허무주의, 회의주의, 상대주의를 넘어 본질주의적 탐구를 이어갔으나, 그 탐구를 철저히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지평에서 전개했다. 그의 사유를 형이상학화한 것은 제자 플라톤이었다.
공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탐구를 형이상학적 사변으로 이어가기를 거부했고, 항상 삶의 장 속에서 구체적으로 풀어가고자 했다. … 공자의 탐구에 형이상학적 색채를 가미한 사람은 훗날 맹자 그리고 일정 정도 장자였다.
§3. 자연과 작위
- 『노자』의 사유
p.253-254.
… 그것은 가공되지 않은 통나무 같은 것이다.
노자의 이와 같은 생각은 곧 공자가 그토록 존중했던 ‘주례’에 대한 거부를 뜻한다. 공자는 윤리학적 상상력이 풍부했던 반면 정치학적 상상력은 그만큼 풍부하지 못했다. 그는 ‘다른 세상’을 꿈꾸었으나, 그 ‘다른 세상’은 복구적 맥락에서의 다른 세상이었다.
반면 노자는 현존하는 질서만이 아니라 주례라는, 더 나아가 작위적으로 만들어지는 인간적 질서 자체를 급진적으로 비판했다. … 공자 사상은 국가라는 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는 사상이지만, 노자사상은 반(反)국가적 사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사상은 세상에 확립되어 있는 통념=‘독사’를 비판한다.
…
… 노자사상은 단순한 반국가철학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정치철학이…다. 노자사상은 ‘성인’과 ‘왕’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상이 아니다. 그것은 큰 지혜를 가진 성인 — 구체적으로는 왕을 보좌하는 영윤=재상을 가리킨다 — 이라는 존재와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라는 존재에게 던지는 정치철학적 메시지이다.
p.254.(각주 77)
보다 이론적으로, 노자는 통념이 이항대립적으로 이해하는 개념들이 사실은 상보적임을 말한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으며,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루어주며, 긺과 짧음은 서로를 모양 지어주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를 채워주며, 겹소리와 홑소리는 서로를 보듬고, 앞과 뒤는 서로를 따른다." (갑본 9장)
(여기서부터 2024년 4월 18일 업데이트)
p. 252.
" 부 역 장 지 지 / 지 지 소 이 불 태"
모름지기 멈출 줄을 알아야 / 위태롭지가 않으리라
<노자> 중에서
p.259-260.
… 왕과 성인이 그에 따라 정치해야 할 그 ‘도의 형이상학’이란 무엇일까? 『노자』가 가지는 철학사적 의의들 중 하나는 동북아 사상사에서 최초로 본격적인 ‘존재론적 사유’를 도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
공자의 경우 그가 인문세계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있기에, 그의 사유는 적극적인 존재론을 포함하지 않는다. … 반면 노자의 정치철학은 그 특유의 존재론(도의 형이상학)에 근간을 둔다.
…
… 노자의 사상은 변증법적이지 않다. 인간의 사유가 늘 그렇듯이, 노자에게서도 항상 대립항들이 문제가 된다. … 그것들은 상호 전환적이다. “성공하려는 자는 실패하고, 잡으려는 자는 잃는다.” … 이와 같은 상호 전환은 바로 대립항들이 사실은 상보적 존재들이기에 가능하다. …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으며, … 앞과 뒤는 서로를 따른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노자의 사유는 ‘파라-독사’의 성격을 띤다.
p.262~263.
인 법 야 / 지 법 천 / 천 법 도 / 도 법 자 연
"사람은 땅을 따르고 / 땅은 하늘을 따르고 / 하늘은 도를 따르지만 / 도는 그저 스스로-그러함을 따를 뿐 "
§4. 예치와 법치 (270)
공자와 노자
역사를 보는 눈
예치와 법치
p.274-275.
‘예치’와 ‘법치’는 어떻게 다른가? 주나라가 ‘예라는 것을 실시했을 때, 그것은 사실상 ‘법’의 성격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 흥미로운 물음은 이것이다: 예치와 법치는 언제 뚜렷이 구분되기 시작했는가? 예와 법은 모두 외형적 가치이다. 그러나 예가 형이상학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면 법은 행정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p.277-278.
관중은 법가 사상가인가? 후에 관중의 법가적 면모가 강조되기에 이르지만, 물론 이것은 사후적 전유이며 관중은 고대 동북아 사상이 유가, 법가, 묵가, 도가 등으로 뚜렷이 분화되기 이전의 인물이라 해야 할 것이다. …
…
법의 문제가 보다 뚜렷하고 예민하게 나타난 것은 정자산에게서이다. 진나라의 노골적인 패권과 더불어 열린 새로운 패권의 시대에 활동했던 정자산은 관중과 함께 춘추시대의 뛰어난 정치가 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지는 존재이다.
…
그러나 기원전 536년(노 소공 6년) 정자산이 정(鼎)에 형서를 새겨넣자 진의 숙향은 서신을 통해 그를 비난했다. … 결국 법이 예를 밀어내리라는 것이다. … 식량, 군비, 백성들의 믿음 중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하느냐는 자공의 물음에 공자는 백성들의 믿음을 가장 마지막에 든다. “백성들이 믿지 않으면 국가가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공자가 볼 때 법이란 강력한 것이긴 하나 어디까지나 하수일 뿐이다.
*정자산의 형정
https://h21.hani.co.kr/arti/COLUMN/43/873.html
§5. 인과 겸애 (280)
p.282.
무엇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움 바라심과 불의함 미워함을 알수 있는가? … 이로써 하느님께서 의로움 바라시고 불의함 물리치심을 알 수 있다.
p. 284.
이론적 정확성 및 깊이와 실천적 결단력 및 용기 사이에는 작지 않은 괴리가 있다. 어떤 일에 과감히 나아가고 망설임 없이 행동하려면 사고가 단순해져야 하며 '믿음'이 강해져야 한다. 사유의 정직함이나 이론적인 깊이를 추구할 경우 몸의 추진력은 약화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반대로 깊이 사유하고 이론적인 정확성을 꾀하려면 당장의 상황과 행동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이 필수적이다. 상황 속에서 움직일 때 사유를 깊이 전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유와 행동, 이론과 실제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딱히 어디에서 끊을 수야 없겠지만, 사색형 인간과 행동형 인간, 이론적 인간과 실천적 인간이 어느 정도는 나뉠 수밖에 없다. 묵자는 고대인이고 본래 하층민 출신인 것으로 추측되므로 자신의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믿었을 수도 있다. 사실 공자도 "하늘에 죄를 지으면 숨을 곳이 없습니다"라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묵자가 상당한 교양을 쌓은 인물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어쩌면 그의 이야기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굳센 의지와 단호한 용기를 갖추게 하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부터 2024년 4월 24일 업데이트한 부분입니다.)
p.290-291.
묵자가 말하는 ‘애’는 우리의 어감으로는 ‘사랑’보다는 차라리 ‘존중’에, 어떤 맥락에서는 ‘공정함’에 가깝다. … 묵자의 최고의 가치는 ‘천하지리’ 즉 보편적 이익이다. 문제의 핵심은 모든 것을 똑같이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의 구조에서 보편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 보편적 이익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모든 이들에 대한 똑같은 존중, 공정함, ‘겸애’이다.
…
내가 남에게 해를 끼쳐서도 안 되지만, 내가 남에게 희생되어서도 안 된다. 나를 포함한 보편적 이익이 중요한 것이다.
p.294.
묵자에게는 강한 스토아적 면모가 있었다. 그가 병에 걸렸을 때 누군가 귀신들에 대한 그의 믿음이 잘못되지 않았는가 하고 의구심을 표현하자, 그는 귀신들이 사람에게 벌로써 병을 내리는 것을 병에 걸리는 이유들 중 하나일 뿐이라며 자신의 믿음을 피력했다.
또 누군가가 오직 당신만이 의를 실천할 뿐인데 그만두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고 묻자, 그는 열 사람 중 한 사람만 밭을 간다면 그 사람은 다른 이들까지 먹여 살려야 하므로 더욱 열심히 밭을 갈아야 한다고 답했다. 역사상 묵자만큼 강렬한 실천과 그 실천을 뒷받침한 형이상학 믿음을 보여주는 이도 드물다.
p.298.
반면 묵가사상은 강호의 철학으로 자리 잡기에는 너무나 비-낭만적이었고, 종교가 되기에는 너무나 합리적이고 실용적이었다. 또, 혁명의 종교가 되기에는 너무 봉건적이었고, 아르카디아(Arcadia)의 사상이 되기에는 ‘천하의 철학’의 성격이 너무 강했다.
또 묵가의 논리학, 언어철학 등의 작업은 이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는 했으나 명가와 마찬가지로 결국 동북아 사상의 굵직한 갈래로는 성립할 수 없었다.
…
오늘날에도 『묵자』에서 유가적 인문주의나 도가적 자연주의를 찾기는 어렵고, 법가적 통치술을 찾기도 어렵다. 오히려 현대인들의 흥미를 끄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묵자』의 ‘외편’이라 할 ’경학’ 부분과 ‘수비술’ 부분이다. 전자는 논리학적으로, 개념 분석적으로 흥미롭고, 후자는 고대 기술문명의 이해에 흥미롭기 때문이다.
p.299.
그러나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아니 남아 있어’야 할’ 묵자의 유산은 있다. 그것은 바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그가 보여준 불굴의 의지와 실천이다. 오늘날 우리는 묵자가 살던 세계와 매우 판이한 세계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 근저를 들여다볼 때 우리가 묵자의 시대보다 더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 덜 잔인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 우리가 이끌어내고 품에 안아야 할 것은 그의 이론이 아니라 그의 삶 자체, 그의 의지와 실천일 것이다.
(4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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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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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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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may33 | 2024.04.24 | 1 | 1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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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꼽문] 책새벽-월. 『역사의 역사』 "제2장.사마천이 그린 인간과 권력과 시대의 풍경화"
neomay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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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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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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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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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may33 | 2024.04.21 | 0 | 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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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자료 & 소감] 장회익 저작읽기 15회 -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 7장
neomay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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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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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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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may33 | 2024.04.12 | 0 | 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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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A와 자체촉매적 국소질서 (4)
자연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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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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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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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사랑 | 2024.04.11 | 1 | 2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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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꼽문] 책새벽-월. 『역사의 역사』 서문, 제1장 (p.5-53) (1)
neomay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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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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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may33 | 2024.04.07 | 0 | 237 |
320 |
[책꼽문] 책새벽-화/금. 『세계철학사 2』 4장. '도'를 찾아서 (p.189-299) (3)
neomay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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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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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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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may33 | 2024.04.04 | 0 | 268 |
『세계철학사 2』 책꼽문 업데이트 했습니다. 4장. '도'를 찾아서. p.241-255.
『세계철학사 2』 책꼽문, 4장 p.285까지 업데이트 했습니다.
『세계철학사 2』 책꼽문, 4장 p.286-299까지 업데이트 했습니다.(4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