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계란 무엇인가?
국소질서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물음이 있습니다. “복잡계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생물학은 생명에 대한 탐구이고, 물리학은 물질에 대한 탐구이지만,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나 “물질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한없이 깊고 난해하고 다양한 층위가 있는 문제입니다. 이보다 더 어렵고 다층적인 문제가 바로 “복잡계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물질이 이루는 여러 모습이 대체로 복잡계(complex system)입니다. 지구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지형들도 복잡계로 볼 수 있습니다. 태풍이나 제트 기류 같은 기상학적 대상들도 복잡계입니다. 무엇보다 생명도 복잡계입니다. 경제현상, 주식시장도 복잡계입니다. 선거결과도 복잡계이고 뇌의 작동도 복잡계입니다. 어쩌면 복잡계가 아닌 것을 찾기가 더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세상 만물이 모두 복잡계인 것은 아닙니다.
철학자 제임스 레디먼과 캐롤라인 위스너는 이 문제를 직접 상세하게 논의하는 책을 2020년에 냈습니다.

이 책에서 복잡계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소개되는데, 실상 복잡계의 정의를 놓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복잡계와 연결시킵니다.
- 많아지면 달라진다.
- 살아 있지 않은 계들이 질서를 만들어 낼 수 있다.
- 복잡성은 단순성으로부터 나온다.
- 좌표화된 거동에서는 전반적인 통제자가 꼭 필요하지 않다.
- 복잡계는 네트워크나 정보처리 시스템으로 모형화될 수 있다.
- 복잡계에는 다양한 종류의 불변성과 여러 형태의 보편적 거동이 있다.
- 복잡성 과학은 계산적이며 확률적이다.
- 복잡성 과학은 여러 전문분야와 연관된다.
- 복잡계가 만들어내는 질서와 복잡계의 질서 자체는 차이가 있다.
물론 이렇게 복잡계의 특징들을 늘어놓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된 논의가 아니겠습니다. 이 저자들은 다음과 같은 복잡계의 핵심을 제시합니다.
- 다수성: 복잡계는 많은 구성요소들 사이의 많은 상호작용과 연관된다.
- 무질서와 다양성: 복잡계의 상호작용은 좌표화되거나 중심적으로 제어되지 않으며 구성요소들이 다를 수 있다.
- 되먹임(피드백): 복잡계의 상호작용이 반복되면 이전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되먹임이 일어나며, 이는 계의 창발적(떠오르는) 동역학에 유관한 시간 스케일에서 일어난다.
- 비평형성: 복잡계는 환경에 열린 계이며 외부의 무엇인가에 의해 추동되는 경우가 많다.
- 자연발생적 질서와 자기조직화(스스로 짜임): 복잡계는 부분들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는 구조와 질서를 보인다.
- 비선형성: 복잡계는 맺음변수(파라미터)나 외부 추동자에 대한 비선형 의존성을 보인다.
- 견고성: 복잡계의 구조와 기능은 유관한 섭동에 대해 안정하다.
- 내포적 구조와 모듈성: 복잡계의 구조, 클러스터링, 기능의 분화에는 다중 스케일이 있을 수 있다.
- 역사성과 기억: 복잡계는 매우 긴 역사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으며 역사에 대한 기억을 저장한다.
- 적응 거동: 복잡계는 환경의 상태와 그에 대한 예측에 따라 그 거동을 수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종합하여 레디먼과 위스너는 복잡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복잡계는 자연발생적 질서와 자기조직화(스스로 짜임), 비선형 거동, 견공성, 역사성과 기억, 내포적 구조와 모듈성, 적응 거동 중 일부 또는 전부를 보이는 계이다. 이런 특징들은 다수성, 무질서와 다양성, 되먹임과, 비평형성에서 비롯된다."
"a system is complex if it has some or all of spontaneous order and self-organisation, nonlinear behaviour, robustness, history and memory, nested structure and modularity, and adaptive behaviour. These features arise from the combination of the properties of numerosity, disorder and diversity, feedback and non-equilibrium." (p. 11)
'복잡계'의 특징과 정의를 소개한 이유는 그 개념이 장회익 선생님의 '국소질서'와 직접 연결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장회익 선생님의 국소질서는 대략 "물질 체계가 비평형적 상황에 놓일 때 요동(搖動 fluctuation)에 의해 확률적으로 발생하는 것"(<과학과 메타과학 217쪽)으로 서술됩니다.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 156쪽에서는 "한 부분계가 준안정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 ... 주변으로부터 에너지 흐름을 받아 유지되는 비평형 질서"로 규정합니다. 이는 "주변의 도움을 통해 상당 기간 준안정 상태에 머물면서 상대적으로 높은 질서를 유지해 가는 것"입니다.
복잡계의 정의에서 자주 등장하는 '자연발생적 질서 spontaneous order'나 '스스로 짜임(자기조직화 self-organisation)'은 확률적 요동으로 설명되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확률적 요동이란 말은 실상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그냥 원래부터 그렇게 되기도 한다는 뉘앙스가 강합니다. '요(搖)'라는 말이 흔들림이란 의미이고, 평형이라 부르는 어떤 안정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경향 내지 성향을 가리킵니다. 만일 모든 것이 평형이라면, 세상에 변화라는 게 있을 수 없습니다. 결국 모든 종류의 변화는 여하간 작은 요동에서 시작한다고 말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지난 번 <과학과 메타과학> 세미나에서 7장 "우주 이야기"를 다룰 때 질문을 하려 했었습니다. 통계물리학과 복잡계 과학에 익숙한 저로서는 216쪽에 "자기조직이라든가 질서형성이라는 말은 정확히 물리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다분히 생기론적 색채를 띠는 용어이다."라는 문장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제 이해 속에서는 요동을 통해 확률적으로 무엇인가가 생겨가는 것이 다름 아니라 자기조직 또는 질서형성이기 때문입니다.
복잡계 과학을 공부할 때 곧잘 비교적 널리 알려진 기존의 과학, 특히 물리학의 접근이 얼마나 좁고 제한되고 특별한가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체 두 개가 서로 힘을 주고받으며 움직이는 것은 어찌어찌 풀어내는 게 쉽지만, 당장 물체가 세 개가 되면 제대로 된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류츠신의 소설 <삼체>가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프랑스의 수학자 앙리 푸랭카레가 삼체 문제를 풀어서 천체역학에 적용하려다가 카오스 이론의 원리들을 맞닥뜨린 것도 이와 연관됩니다.
여하간 복잡계가 무엇인지, 그리고 질서 나아가 국소질서가 무엇인지 더 이야기 나누고 더 생각해 볼만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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