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 (하워드 케이)
1970년에 출간된 자크 모노의 책 <우연과 필연>은 여러 모로 의미심장한 과학고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당대에도 여러 논쟁에 휘말리기도 했고, 지난 50여년 동안 과학, 특히 생명과학 분야의 엄청난 전개와 맞물려 다시 꼼꼼하게 검토해야 할 필요도 많은 책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조금 오래되긴 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유용한 텍스트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하워드 케이가 1986년에 낸 <현대생물학의 사회적 의미: 사회다윈주의로부터 사회생물학까지>는 생물학이 사회에 대해 가지는 여러 가지 의미를 역사적 전개에 따라 살피고 있습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과 함께 거의 동시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소위 '최적자 생존'이나 '생존투쟁'이나 '자연선택'의 문제, 특히 '진화'와 '진보'의 혼용에 바탕을 둔 사회다윈주의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하여 지금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사회생물학까지 여러 사상가들의 사유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Howard L. Kaye (1986) The Social Meaning of Modern Biology: From Social Darwinism to Sociobiology. Yale University Press.
하워드 L. 케이 (지은이), 생물학의 역사와 철학 연구모임 (옮긴이) (2008). 현대 생물학의 사회적 의미 - 사회다윈주의에서 사회생물학까지. 뿌리와이파리.
<현대 생물학의 사회적 의미>가 여러 면에서 중요하고 좋은 책인데, 절판이 되어서 지금은 구하기가 어려운 상태입니다. 그 중 "제3장 분자생물학으로부터 사회이론으로"에 모노에 대한 서술이 있어서 조금 길지만 아래에 인용합니다. <우연과 필연>의 인용 페이지는 영문판으로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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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의 사회적 영향력을 해석하는 모노의 글에서도 유사한 변화가 발견된다. 변화된 해석에 따르면 확장된 생물학적 결정론이 사회적 문화적 질서의 붕괴에 대처하는 위압적인 원리로서 옹호된다. 1967년 출간된 모노의 『생물학에서 윤리학으로』(Fron Biology to Ethics)에서는 생물학적 기계론에 대한 문화적 진화(사상적 진화)의 상대적 자율성이 강조되었다. 모노에 따르면 문화적 진화는 단지 생물학적 진화와 유비적(analogous)일 따름이다. 사상이란 개인이나 집단이 이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 또한 바이러스 모델에 기초하여 그들의 '독성과 유전성', 감염 능력에 있어서 자신들의 유용성을 토대로 선택된 것이다. 이는 생물학적 진화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다([1967]1969, pp. 16-17). 하지만 『우연과 필연』(Chance and Necessity, 1971)에서 모노는 인간의 정신적 구조, 문화적 사상 및 그 진화가 본성적으로 결정된 것임을 강조한다. 인식과 의지는 단백질에서 비롯되었고, 종교, 철학, 과학을 만들어냈던 형이상학적 설명에의 욕구는 “유전자 암호 어딘가에 기재되어 있다. 사상의 감화력이 마음의 내재적이고 자연선택된 구조들의 조합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식이다(1971, pp. 166-67). 여기서 발견되는 환원론의 확장도 역시 새로운 과학적 발견의 결과라기보다는 모노의 사회적 문화적 인식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 드러난다. 1968년 혁명의 영향, 그리고 마르크시즘으로부터 스스로 더욱 멀어지게 되면서 사회적 윤리적 위기의식이 증대되었을 것이다.
영미권 사회다윈주의와 독일 과학적 유물론의 경우에서와 같이, 사회적 혼돈이 인지되던 무렵 과학의 객관성과 권위는 사회적 분석, 비평, 규범을 취급하는 한 수단으로서 많은 관심을 끌게 되었다. 분자생물학 분야에서 현대의 문화적 상황에 대한 가장 수준 높고 지적으로 가치 있는 분석으로 모노와 스텐트의 글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의 작업은 이론들이 보여주는 범주의 측면에서도 그렇고 윤리적 및 정신적 쇠락의 극복을 위해 제시된 처방의 급진성에 있어서도 동료들의 작업에 비해 훨씬 비판적이었고 또한 대중적 관심을 모았다. 이 사회생물학적 가르침은 그들이 생각하는 과학적 위상과 문화적 의미에 관한 더 명확한 관념을 확실하게 제공해 주었다.
“유전자 암호의 분자적 이론”과 그에 관한 “과학적으로 보증된 결론”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모노는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영혼의 질병”에 대해 일종의 개인적․집단적 정신분열증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우리는 과학에 의해 질서지어지고 형성된 사회 및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악착같이 현대 과학의 발견으로 완전히 파괴되어버린 종교적 신앙과 신화에 근거하는 가치들에 집착하고 있다. 다윈주의 이론의 마지막 남은 공백을 채워준 분자생물학은(유전 현상의 물리적 성질과 변이의 기원) “물활론”에 근거한 모든 “인간중심주의의 환상”을 파괴함으로써 모든 종교적 신앙과 그 철학적 대용물들(예를 들면 변증법적 유물론과 스펜서, 테이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 및 여타 인문학자들의 “과학적 진보주의”)에 치명타를 날렸다. 유전자 암호의 분자 이론 덕택에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필연적이고 불가피하고 영원히 운명지어진 존재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과학은 마침내 인간이 우연히 출현했던 무심하고 광대한 우주에서 홀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인간의 운명이나 의무는 어디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1971, pp. 43-44, 180). 모노는 이러한 지식이 우리에게 사회적 질서를 기초로 하는 가치, 의무, 권리, 금기를 전복시키고 의미를 퇴색시키는 데 대한 두려움과 번민을 불러일으키는 까닭에 수 세기 동안 부정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나쁜 소식을 전하는 자를 온당치 못하게도 비난하는 사람들은 합리성을 추구하는 과학을 차츰 멀리하고 적대시 하게 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과학적 사도의 '임무'는 “전통적인 사회적 가치 체계에 근거했던 다양한 신앙 체계를 대체”할 수 있는 “과학의 특정 관련 영역으로부터 형성된 인간적으로 의미있는 사상들”을 제공함으로써 “이 현대의 정신분열증”을 제거하는 일이 되었다(1971, pp. xii-xiii; 1969, p. 2; 1972, p. 15).
그러한 물활론적 신앙을 뿌리뽑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이라든가 인간중심주의의 환상이 파괴됨으로써 겪게 되는 고뇌를 모노는 인간의 자기기만으로 돌리지 않았으며(크릭과 달리), 착취적인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으로 돌리지도 않았다(뢰브와 달리). 모노는 이에 대한 생물학적 해석을 제시한다. 물활론이 창조되고 지속되는 것은 인간 마음이 자연적으로 선택되었고 유전적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적인 “물활론을 위한 유전자(genes for ainimism)”의 진화적 기원을 설명하는데 있어 모노는 두 가지의 전혀 다른 과학적 신화를 절묘하게 이용한다. 지극히 사변적인 인간 기원에 관한 설명과 과학의 위상에 대한 주장, 이 두 가지가 현재 우리의 행동 지침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모노의 첫 번째 신화에 따르면(1971, pp. 29-33) 우리의 초기 조상들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성장과 생식을 하는 동식물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편안함을 느꼈으며, 따라서 “살아가고 자손들을 살아가게 한다는” 분명한 삶의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꼈다. 무기적 자연(바위, 강, 산, 화석, 별 등등)을 자각한 우리 조상들은 이에 대해 경외심이나 경이로움, 공포심을 지니기보다는, 탁월한 인간 고유의 의식적이고 목적적인 본성을 무기적 대상에 투영하여 여타 자연과의 괴리감을 해결함으로써 충만을 느꼈다. 무기적 본성과의 차별을 부인함으로써 사람들은 자연과의 '계약(covenant)'을 수립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연이 목적적이고 의미있는 방식으로 작용하며 인간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겼다.
모노의 두 번째 신화(1971, pp. 160-69)에서는 물활론이 무기적 자연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원시인들의 정신적 욕구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결속과 법의 준수를 추구하는 공동체적 욕구에 기초하여 설명된다. 모노의 신화에서는 다윈시대 이래 인간의 성취와 희망으로 간주되어 왔던 언어 구사 능력의 등장과 그에 따른 문화적 혹은 관념적 진화의 등장이 사실상 인간의 실패로 그려진다. 수백만 년에 걸쳐 문화적 진화와 생물학적 진화는 조화를 이루며 작용했다. “당장의 생존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현상들을 예견”하기에는 인지 능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적 능력에 작용하는 선택압은 당장의 생존 욕구와 무관한 마음을 차츰 생성해내었고, 관념적 진화와 물리적 진화를 분리시켰다. 이 “지식의 나무”가 만들어낸 열매 중 하나가 차츰 더해가는 인간의 환경 지배였다. 하지만 이 진화적 단계에 따른 형벌은 가혹했다. 왜냐하면 문화적 진화는 인간들 사이의 “종 내부적 투쟁”(“종족이나 인종끼리의 싸움”)을 만들어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노는 이 점이 인간에게만 유일하게 나타난다고 믿는다.
문화적 진화의 등장을 통해 싸움은 더 나은 “지능, 상상력, 의지 및 야망”을 지닌 종들에게 유리한 “진화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또한 문화적 진화는 집단의 결합력과 공격성에 유리한 그 무언가를 선택하였고, 오늘날 개체의 생존은 집단의 성공에 의존하게 되었다. 강제성을 띄는 법률들(coersive laws)의 발달에 관한 이런 식의 설명에 따르면, 종족의 법을 쉽게 받아들이도록 만듦으로써 권위와 관습을 존중하는 따위의 사고가 인간 두뇌의 “본유적 영역”으로 성립되는 데 있어 선택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모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법, 사회적 구조, 문화적 전통 등은 그 자체에 의해 성립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내는 유전적 토대를 필요로 했다. 이 유전적 토대가 없이는 마음이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유전적으로 결정된 토대가 인간으로 하여금 물활론적 설명을 만들어내게 하는 신화 체계, 즉 종교였고, 자연은 그 법에 “근거(foundation)와 독자성(sovereignty)”을 제공해 주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창조되고” “유전자 암호 어딘가에 기재된” 진화는 인간의 형이상학적 설명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일종의 불안감은 “우리로 하여금 존재의 의미를 추구하도록 부추겼고”, 그 추구는 “모든 종교와 철학, 그리고 과학 자체”를 창조했던 것이다.
자칭 데카르트주의 과학자이자 “논리의 포로”(1971, p. 27)였던 모노의 그러한 논거는 철학적인 면에서 문제가 있다. 모노의 진화에 대한 신격화 이면에는(그는 “창조되고” “기재된” 진화를 말한다), 그토록 무한히 현명한 진화가 법과 사회적 결속에 집착하여 안정감을 얻게 해주는 종교를 필요로 하기보다는 왜 더 야심찬 무언가를 “창조해낼” 수 없었는지의 문제가 제기된다. 게다가 종교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형이상학적 불안은 사회적으로 장애가 되기 쉽다. 종교적 설명은 종족의 법이나 문화적 전통과 흔히 충돌되기 쉽다. 그러나 모순은 사회학자보다는 철학자의 관심사이다. 사회학자의 관심사는 모노가 어떤 방식으로 이 신화들과 과학적 수사를 이용하여 현재의 윤리적 위기들을 설명하고 해결책을 제시하여 유포했는지 하는 점이다.
모노는 과학과 그 과학이 만들어낸 객관적 지식(어떠한 설계나 목적도 상정되지 않은 물리적 실재에 관한 지식)의 규범이 지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모든 형이상학적 설명이 그 자리를 대신할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파괴되었다고 믿는다. 모노에 따르면 과학은 “인간 본성 그 자체와 하나가 되어버린 수십만 년의 전통”을 일격에 휩쓸어버렸다. 그러나 모노의 설명에 의하면 해결되지 않은 형이상학적 욕구가 현대적 위기의 핵심은 아니다. 모노는 형이상학적 욕구를 인간 진화에 있어서 종족 간의 싸움이나 고도로 결속된 집단이 주류를 이루었던 초기 어느 단계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과학과 한데 얽혀있기” 때문에 강력한 법과 형이상학적 토대들이 더 이상 선택되지 않는다. 따라서 현대 위기의 핵심은 우리가 비록 돌이킬 수 없이 과학을 우리 삶의 방식으로 “선택”했지만, 그 과학이 우리의 윤리적 전제를 완전히 개조하지는 못했다는 데 있다. 우리의 과학적 삶의 방식과 우리가 지닌 물활론적 가치 사이의 이 문화적 모순이야말로 서구인들의 정신적 불안과 서구 사회의 불안정을 만들어낸 근원이다(1971, pp. 170, 172, 177).
“지식의 윤리”라 불리는 모노의 해결책은 삶의 무의미성과 축소된 인간 위상을 받아들이고, “과학의 윤리”-객관적 지식을 추구하는 과학적 방법과 가치들에 관한 제약-를 삶의 모든 방식에 확산시키는 길이다. 모노는 우리가 과학과 그 결과들을 수용함으로써 이미 윤리적 선택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지만, 윤리적 가치는 과학적 사실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 따라서 모노의 지식 윤리는 사실상 “윤리적 선택”이 아니라 신념의 비약(Leap of faith)을 드러내고 있다. 모노의 주장에 나타나는 신념의 비약은 객관적 과학 활동 이외에 “여타의 모든 정신적 활동은 거부”되어야 한다는 “금욕주의”에서 비롯된다. 여기서는 과학적 지식만이 유일하게 “진정한” 지식이자 “다른 모든 가치들의 근거와 척도가 되는 상위의 가치”로 받아들여진다(1971, p. 180).
이와 같이 과학적 지식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모노가 주장하는 바는 과학이 그 방법에 있어서나 “발견물들”에 있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관한 특별한 지식을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과학적으로 알려진 것은 무엇이든 선하고 인간의 윤리적 함의를 지닌다고 믿는 모노에게 있어 “지식의 윤리”는 “윤리의 지식”이 된다. 따라서 DNA가 “어떤 형질을 만들어내는가”에 관한 지식은 인간의 근원적인 윤리 지침이 된다. 이는 모든 진화의 우연적 성질에 관한 지식이 우리의 정신적 지침의 새로운 토대가 됨을 말한다. 더 일상적인 문제를 생각해본다면, 인간이라는 동물의 “충동과 열정, 욕구와 한계”는 이전의 모든 신념 체계에서는 “주로 모욕과 멸시의 대상”이었는데, 이 “냉정하고 준엄한” 지식 윤리 아래서는 다르게 취급되었다. 인간에게 충동과 열정, 욕구와 한계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진화적 기원에 관한 우리의 과학적 지식을 통해 충동과 열정은 “명예”와 “존중”을 부여받게 되었고 따라서 좋은 것으로 평가되었다(1971, pp. 170, 178-79).
자신의 이론적 맥락 속에서 모노는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가 수십만 년 전 불행히도 분리되어 전쟁, 물활론, 유전적 퇴화, 그리고 이제는 윤리적 혼돈에 이르기까지 비극적인 결과들을 만들어내면서 지속적으로 별도의 흐름을 이루어 왔음을 말하면서 이들의 재통합을 제안한다. 하지만 문화와 생물학 사이, 그리고 문명화와 그 불편함 사이의 이 숙명적 갈등은 이제 더 이상 “고등한” 인간의 본능이 “하등한” 것을 지배함으로써 정복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 사회, 개인성이 단순히 생물학적 지식의 주장으로 환원됨으로써 정복된다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목적일치성에 근거한 낡은 계약을 대신하여 모노는 새로운 목적론을 제안하는데, 기계론적이고 목적성 없는 각자의 본성에 기초한 저마다의 개인적 자각이 그것이다.
모노는 새로운 계약과 지식 윤리가 “과학적 사회주의의 휴머니즘”을 정당화하고 우리 자신을 능가하는 더 높은 이상을 제공할 기회, 이른바 “진정한 지식의 탁월한 가치”를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고 믿고 있지만, 그의 논거는 의도와 달리 취약성을 지닌다. 하지만 모노의 논거가 지니는 논리적 취약성, 정확히 말해서 거대분자들과 그 하위구조들에 대한 신뢰를 담은 모노의 고백에서 드러나는 과학은(프랑스 학자들의 신뢰는 “모노신론(Monodtheism)”으로 통용된다) 그 고백에 숨어있는 모순들에 비하면 그래도 비교적 나은 편이다. 이를테면, 이 “과학적 청교도”는 “정신적 활동”을 금욕주의적으로 단념하고 “인간 안의 동물”적 욕구들을 존중한다(1971, p. 178). 또한 노벨상을 수여받은 이 과학자는 모든 종교가 파괴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그 자신의 과학은 “탁월한 가치”를 지닌 “지식”을 탐구하는 새로운 종교로서 제시된다. 불행히도 서구 사회의 영혼을 치료하고자 하는 모노의 프로그램은 자멸적이다. “구세주”의 대체물로 내세워진 “지식”은 탁월한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분자생물학은 DNA와 우리의 초기 선조들이 모두 다 알고 있었던, 생명의 유일한 목표가 증식(replication)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모노의 지적 여정은 그의 가족에게서 물려받은 칼뱅주의로부터 실증주의,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결국 “지식 윤리학”에 이르렀다. 실존주의자의 복장을 걸친 그의 철학적 환원주의는 과거 자신의 청교도적 가치를 부정하여 전도시키게 되고, 게다가 또 다른 자멸적 시도로서 영혼과 사회 질서를 교정하려 하며, 영혼과 사회 질서의 토대를 침식시키는데 일조했던 참된 과학의 의미를 제시한다. 1911년, “기계론적 생명 개념”을 옹호했던 자신의 입장을 바꾼 뢰브(J. Loeb)는 그의 추종자였던 일원론자들과 자유사상가들에게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60년이 지난 뒤, 반 세기 이상을 다윈주의 사상에 저항했던 나라 프랑스에서 모노의 시도는 놀랄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모노가 대중들을 놀라게 하고 결정적인 성공을 거두었던 데는 여러 가지 근거가 있겠지만, 확실히 탁월했던 측면은 현재 분자생물학이라는 <과학>이 서구 문화의 위태로운 체계를 지지하기보다는 전복시키는 데 필요한 “난처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는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모노의 '증거'는 서구 문화를 전복시키는 '난처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서구 문화를 찬미하는 것이었으며, 논리적이고 명확한 주장이었다. “사실”로부터 “가치”로의 매끄러운 전도를 가능하게 한 것은 진실성도 불합리성도 아닌, 모노의 “정확히 생물학적인” 이론에 존재하는 형이상학, 신화, 그리고 사회적 관심사들이었다. 이들이 모노의 사회적 및 철학적 “유추”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부끄럽게도... <우연과 필연>을 함께 읽을 무렵에는 이 구절을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하워드 케이의 책 <현대생물학의 사회적 의미>는 그 연구회에서 일정한 기간 동안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고, 좋은 책이라 한국어 번역판을 내기로 했었습니다. 제가 번역 작업에서 전체 글을 모두 읽고 문체도 통일하고 윤문 작업도 담당했었는데, 너무 오래 전이다 보니 잊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우연과 필연> 전체를 세 번째 읽은 셈인데, 그래서 될수록 프랑스어 원서를 함께 보려 애썼습니다. 제가 프랑스어를 편하게 읽는 쪽은 아니어서 영어번역본과 함께 보기도 하고 중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보았습니다. 특히 한국어 번역본의 구절이나 단어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분을 다시 확인하는 식이었습니다.
새삼 다시 보니 자크 모노의 접근에서 이상한 점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지능지수가 높은 사람들이 자식을 덜 낳기 때문에 호모 사피엔스의 지능이 전반적으로 낮아지는 것을 우려하는 대목에서는 우생학의 느낌이 있어서 좀 불안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에서 자크 모노의 입장과 관점을 비판적으로 살피고 있어서 큰 도움이 됩니다. 물론 이런 관점을 모두 신뢰할 필요는 없겠고, 이것도 다시 더 곱씹어 보면서 더 적절하고 올바른 해석과 평가로 연결시켜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새삼 다시 보니 자크 모노의 접근에서 이상한 점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지능지수가 높은 사람들이 자식을 덜 낳기 때문에 호모 사피엔스의 지능이 전반적으로 낮아지는 것을 우려하는 대목에서는 우생학의 느낌이 있어서 좀 불안했습니다."
선생님 위 댓글을 보고 책을 다시 보니 저도 모노의 책 중 이 부분의 글을 거꾸로 읽었었네요. 자크모노는 지능지수와 번식의 상관관계를 우생학에 대한 비판으로 쓴 게 아니라 오히려 우생학적 결론처럼 썼네요. 독일의 우생학 같은 것은 과학의 일종으로 받아들이고 헤겔의 변증법은 물활론으로 비판하고 있는 셈인데 굉장히 희한한 결론으로 나아간 셈이네요. 선생님의 다른 게시글에는 자크모노가 레지스탕스 경력조차 있었다는데 왜 이런식으로 썻을까요? 인간의 존속에도 사회적으로는 우생학이 물활론보다 훨씬 더 해로운 것 같은데 말이죠.
남겨주신 위 게시글로 조금은 유추가 됩니다만. 선생님께서 수많은 좋은 글들을 쏟아내 주시는데 제가 모르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암튼 진정한 학자란 이런 거구나 싶어 늘 경탄하게 됩니다.
자크 모노는 여러 모로 흥미로운 인물인 것 같습니다. 제가 1960년대말의 알튀세르-모노 논쟁에 대해 모임에서 짧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모노는 이미 1950년대부터 소비에트연방의 사회주의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며 교조화된 국가사회주의라고 비판했었습니다. 특히 생물학에 뤼센코주의가 세력을 얻어 과학자들을 숙청하기까지 했으니까요. 헤겔의 변증법이든 역사유물론에 크게 반대한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또 우생학은 생물학자 다수가 지지하고 옹호한 입장이기도 해서 모노가 특별히 다르다고 말할 수 없는 면도 있어 보입니다.
역사유물론을 유전학에 오남용한 리센코주의에 대한 반작용이 자크 모노의 논리에 크게 영향을 미쳤겠군요. 반면 자크모노의 명쾌한 비판논리에도 우생학의 그늘이 남아있는 것으로도 보이고요. 교차하는 다른 맥락들을 보여주셔서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고맙습니다.^^
지능이 되었든 다른 신체 능력이 되었든 간에, 인간의 유전자를 우성 유전자와 열성 유전자를 나누는 발상이 정서적 역겨움을 동반한다는 것과는 별도로, 우성과 열성을 가르는 기준 자체도 환경이 극심하게 변화한다면(ex. 빙하기의 도래)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 있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지금 당장의 기준으로 열성 인자를 걸러내어 우성 인자만을 늘려간다는 발상 자체가 정말 근시안적이라고 여겨집니다.
진화의 어느 순간에 갑자기 전혀 다른 환경이 도래해서 예전에 열성으로 분류되던 특성이 오히려 생존에 도움이 되는 우성 인자로 뒤바뀔 수 있음을 고려할 때, 유전자 pool을 선택적으로 좁히는 것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유전자 pool을 보존하는 것이 인류 전체의 생존과 결부된 이익에 더 복무하는 전략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생학적 관점은 단지 윤리적으로만 역겨운 것이 아니라, 바로 눈앞의 현실만 고려하는 더 멍청한 전략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다만, 우생학적 주장을 하는 경향을 유발하는 유전자가 있다면 공익 차원에서 그 유전자는 살짝 유전자 가위로 편집해도 눈감아줄 수 있겠다는 위험한 생각도 든다는 게 함정! ^^
저도 발췌글 따라 읽다 너무 끌려서 책을 사서 혼자 읽고 있는데 지적하신 부분이 이상해서 제가 이해를 잘 못 하나~ 혼자 아리송했었는데...
"대표적으로 지능지수가 높은 사람들이 자식을 덜 낳기 때문에 호모 사피엔스의 지능이 전반적으로 낮아지는"
근데 이 부분이 과학적 근거로는 부족하지만 사회적 시각으로 보면 사회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봐야 한다봅니다. 선후가 바뀌었지만, 어쨌든 사회적 자원을 충분히 받고 자라는 아이는 지능이 대체로 높고 그렇치못한 집단, 민족, 나라는 상대적으로 지능이 발현될 기회가 적으니 현상적으로 그렇기도하니요. 후자의 민족이나 나라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후손을 낳고 있구요.
그러니깐, 타고난 지능지수가 문제가 아니라 상대적 결핍으로 지능 발현의 기회가 차단되는 문제는 냉철하게 인식하고 인류전체가 불평등을 해결해 나가야 할 부분같습니다.
늘 앞선 자료를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올리는 자료를 읽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이 책은 저도 함께 끼어서 공부하던 모임에서 공동번역으로 낸 번역서입니다. 아쉽게도 지금은 절판되어 버려서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작권 문제는 사라진 셈이어서 이 부분을 번역하신 선생님께 양해도 구하지 않고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 부분을 발췌하여 올렸습니다. 적당한 시점에서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함께 읽으며 불편함을 느껴 재영님께 설명을 부탁드린 부분이군요. 좋은 자료 공유 감사합니다. ‘우연과 필연’이란 텍스트를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되네요.
‘ 모노의 프로그램은 자멸적이다. “구세주”의 대체물로 내세워진 “지식”은 탁월한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분자생물학은 DNA와 우리의 초기 선조들이 모두 다 알고 있었던, 생명의 유일한 목표가 증식(replication)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데 불과하기 때문’
이 부분을 읽으며 철학에서의 흄의 자가당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모노의 책을 읽으며, 모노의 의도와는 달리 ‘지식의 윤리‘에 대한 믿음에 감화되기 보다는 오히려 경각심이 느껴지더군요. 그리고 인간이 ‘인간 자신’ 혹은 ‘자신의 지식’을 윤리의 척도로 삼는다는 대전제에 심각한 회의가 들었습니다.
저는 한동안 기독교의 ’원죄의식‘이 너무 불편하고 또 불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고 있었는데…
오히려 이 책을 읽으며 비로소 인간에게 ’원죄의식‘과 같은 백신이 정말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끔찍하게 파괴적 지능이 높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을 제어할 대항력이 우리가 속한 생태계에서 점점 줄어들고 있다면,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제어하기 위한 목줄 몇 개 정도는 마련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그런 점에서 원죄의식과 같은 관념이 필요한 측면이 있겠구나 싶더군요.
지금껏 이루어진 역사를 본다면 우리가 무얼 보고 우리 자신, 인간을 믿어야 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너희는 스스로 다이너마이트 같은 존재임을 알고 경계하라‘는 지침 하나 정도는 인류가 마음에 품고 살아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누가 인간을 좀 말려주면 좋겠지만, 이 우주에 아무도 그런 존재가 없다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말리며 살아야겠지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