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철학이야기 대담녹취 9-2] 제8장.주체와 객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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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철학이야기

  •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제8장.사람도 소도 모두 잊다: 주체와 객체 (2)
  • 다룬 주제들
    1. ‘나’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2. 일원이측면론 
    3. 어디까지를 ‘나’라고 할 수 있나? 
    4. 집합적 주체와 온생명 
    5. ‘나’의 동심원적 구조
    6. ‘삶’이란 생명의 주체적 운영

▷ 녹취 시작 

  • 구분점 부분 : 장회익선생님 말씀

    <최> 최우석 질문
    <황> 황승미 질문

1. ‘나’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최> 첫 번째로 여쭤보고 싶은 것은 인식, 정신, 주체 이렇게도 접근할 수도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나’로 접근하셨다. 왜 굳이 ‘나’로 주제를 잡으셨나?

  • 주체의 본성에 바로 ‘나’라고 하는 게 있기 때문에 주체인 것이다. 나라는 것이 없으면 주체라는 말에 별 뜻이 없다. 나라고 하는 것, 물론 각자가 가지고 있는 나겠지. 그 나라고 하는 것을 느끼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주체다. ‘주체’라는 말은 ‘나’를 다시 객관화시킨다. 그래서 심지어는 ‘마음’이라는 말도 ‘나’의 내용을 상당히 대상화시키는 면이 있다.
  • 그래가지고서는 주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볼 수가 없다.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내’가 ‘나’라고 하는 것, 그 느낌을 가지는 존재라는 것이다. 내가 나를 이해하는 것. 그런데 물리학자는 모든 걸 다 알겠다는 사람이다. 그런데 다 알겠다가 딱 걸려버렸다. 다른 건 다 알겠는데 ‘나’는 모르겠는 거다. ‘나’한테 와서 걸린 거다. ‘나’라고 하는 것은 물리학으로 설명할 수가 없는 거다.
  • 물리학자가 왜 ‘나’를 보느냐? 물리학자의 눈에는 그게 너무도 날카롭게 다가오는 거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물리학으로는 도저히 있을 없다는 거다. 물리학에서 방정식으로 막 쓰는데, 뭐뭐 써놓고 = ‘나’하는 방정식은 있을 수가 없으니까. ‘나’는 방정식으로 써질 수 없는 성격이다.

<황> 쓸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 아, 그건 환상이다. 그런데 그건 말하자면 물리학을 뚫고 보면 알 수 있다. 본질적으로 ‘나’가 들어갈 자리는 없다. 그래서 문제가 되고, 그 문제는 물리학과 연관해서, 어째서 물리학은 모든 걸 다 설명하고 내 몸, 두뇌 구조, 사고 하나하나까지 다 물리 법칙을 따른다고 보면서 ‘나’는 뭐냐 하는 것을 얘기 안 할 수가 없는 거다.
[슬라이드 1] 주체의 특이성
  • 왜냐? ‘나’를 부정할 수는 없기때문이다. 분명히 있는데 설명이 안 되는 거다. 그러니 설명하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한다. 그래서 내가 여기(슬라이드 1) 얘기했지만, 사람이라고 하는 건 이상할 게 없다. 인품을 가진 존재라 하더라도. 그래서 물질의 집합 a가 A라는 사람이다, 이 말에 문제가 없다. 그 다음 b라고 하는 물질의 집합이 B라고 하는 사람이다, 여기에도 아무 문제가 없다.
  • 그런데 C라고 하는 물질의 집합을 했더니 ‘나’라고 하는 게 나온 것이다. 물론 C라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C라는 사람과 ‘나’ 사이에는 아주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나’라는 주체와 다른 사람들이 보는 나라는 사람은 다르다. 그런데 이 주체로서의 ‘나’라는 것이 어떻게 나오느냐?
  • 그래서 내가 재미난 가정을 하나 해봤다(슬라이드 1). 물질 현상은 동일하지만 ‘나’만은 없는 세상을 생각해보자. 이 세상이 물리 법칙으로 모든 것이 다 연관되어 있고 물리 법칙으로 이해가 가능하고, 그저 ‘나’라는 것만 없다. 그런 세상이 있다고 하면 어떤 얘기를 할 수 있겠나 상상을 해봤다.
  • 그러면 그 사람들이 말은 우리와 똑같이 하겠지, 왜냐하면 모든 것이 똑같으니까. 내가 말하는 것도 물질 현상과 관계가 있고. 내 두뇌에서 일어나는 물질현상에 의해서 내가 하는 말을 만들고. 심지어 ‘나’라는 말도 그 물질현상이 만들어내니까. ‘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없는데, ‘나’라는 말은 해야하는 거다. 왜냐하면 물리현상이 똑같으니까.
  • 그러면 그때의 ‘나’가 뭐냐 이거다. 그렇게 했을 때의 ‘나’라고 하는 것은, 말만 있지 내용이 없다. ‘나’가 없으니까. 그러면 무엇을 가지고 얘기를 할 거냐. 그 ‘나’에 해당하는 뭔가가 있게 되겠는데, 그게 없으면 그 말을 하는 전체의 의미가 틀어진다.
[슬라이드 2] ‘나’가 가지는 존재론적 양면성
  • 그래서 물질현상이 똑같다고 하면 동일한 말을 해야한다. 그런데 여기에 구멍이 뻥 뚫린다. ‘나’라는 말은 틀림없이 하고 있고, 우리는 스스로 다 ‘나’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나’는 없는 거다. 이게 모순이지. 우리는 처음에 ‘나’가 없다고 가정했는데, 우리는 ‘나’라는 말이 물질현상만 가지고도 나오니까. 뭔가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없다는 가정과 있다는 결과가 모순을 일으키는 것이다.
  • 물질현상이 지금과 똑같이 있고, 적어도 인간 정도의 존재가 자연 속의 생명 현상을 통해서 생겨났다고 할 때, 그 사람들은 ‘나’라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라는 것은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 사람들이 말하는 ‘나’라는 것은 있어야 한다. 그 ‘나’라는 것이 바로 주체거든.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물리현상이 제대로 있고 우리 사람까지를 포함하는 생명 현상이 거기서부터 나왔다면, 필연적으로 ‘나’라는 것은 그 안에서 나와야 한다. 없을 수가 없다.
  • 그래서 ‘나’를 부정하면 유물론이 되겠지만, 그러나 내가 ‘나’를 ‘나’로 느끼는 이상 부정할 수가 없다. ‘나’라고 하는 것이 물질 현상 위에 더 얹어진 존재가 아니라, 물질 현상이 있다면 거기서 ‘나’가 나와야 하는 거다. 그러면 그 ‘나’는 뭐냐. 그 ‘나’는 물질 현상과 어긋나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다 ‘나’한테서 나오는데 이것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다르거든. 내가 ‘나’를 의식한다는 것은 물리 현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2. 일원이측면론

  • ‘나’는 결국 물질 현상이고 거기서 ‘나’라는 것이 나온다. 하나가 물질의 외면이라면 내면에 해당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물질 현상 자신이 ‘나’라는 것을 느끼고 있으니까 내면적인 존재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두 개의 측면이다 이거지. 물질만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가 나올 수 있으니까. 물질 현상이 있다고 하면 언젠가는 적어도 그 안에서 ‘나’라는 것이 나오게 돼있다는 것이다.
  • 그래서 이런 존재론은 일원적이기는 하다. 하나의 실체, 나눌 수 없는 하나이지만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 외적 측면은 우리의 물질적인 면이다. 나의 밖에 있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은 다 외적 측면이다. 반면 그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안에 들어 있는 존재가 느낄 수 있는 그것이 바로 ‘나’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일원이측면론’이라고 얘기했다. 하나의 실체인데 두 측면을 가지고 있다. 본질적인 두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모순된다.
[슬라이드 3] 한 실체의 두 양상: 일원이측면
  • 다시 말하면 내가 물리학을 했기 때문에, 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뭔가가 또 있다는 얘기를 할 수 있다. 물리학을 모르는 사람은 뭐 당연히 있겠지 하겠지만. 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고, 그것이 바로 내면적인 것이다. 물리학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지만 다른 측면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것을 인정해야 된다는 입장이다.
  • 내가 스피노자를 깊이 연구한 것은 아니지만 나중에 스피노자를 보니까, 스피노자가 몇 백 년 전에 이미 한 것과 내 얘기가 크게 다르지 않다. 아, 스피노자는 물리학을 모르고도 그런 얘기를 했구나, 나는 물리학을 알기 때문에 이런 얘기를 하는데. 그런데 알고보면 스피노자도 이미 물리학에 대한 철학적인 바탕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의 보편 법칙에는 예외가 없다하는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예외처럼 보이는 또 하나(내적 측면)가 있다면 이것은 그것(물질)의 한 속성이지 그것(물질)과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본 것이다.
  • 그래서 스피노자의 철학, 스피노자의 표현을 보면 ‘일원이측면론’이라기 보다는 일원다측면론에 가깝다. 하나인데 여러 측면이 있고, 그 중의 하나가 마음이라고 한 것 같다. 그런데 그건 중요하지 않고,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마음이기 때문에 나는 일원이측면론으로 봐야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최> 우주가 태어나서 물질 세계가 깊이 들어가면 양자역학적인 법칙에 의해서, 집합적으로는 통계역학적인 법칙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원자를 형성하고 항성과 행성 체계를 형성한다. 이런 과정 끝에 우연히도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생겨나면 질서들이 정교화돼서,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 위에 2차 질서라고 하는 생명 현상이 태어나고 온생명을 이루게 된다.

그러면 그것이 계속 깊어진다고 할까, 굉장히 다채롭고 풍성해지는 경향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고, 그것이 보편 법칙에 의해서 그래야만 된다라고 나온 건 아니지만 얼마든지 그럴 수 있고 그럴 수 있는 개연성이 굉장히 강하다고 이해가 된다. 거기에 더해서 물질의 정교한 수준이 깊어지면 그 물질의 내면이 생길 수 있다라는 말씀인가?

  • 내면이 표출된다라는 말이다. 그전까지는 아마 내면이 숨겨져있었는지 모르지, 안나타나니까. 원자 수준의 뭐가 마음이 있다, 이런 건 우리가 알 수 없다. 그래도 그런 정교한 것이 되면 외부로 내면이 표출된다. 이게 ‘주체’, ‘나’이다. 그래서 일단 내가 주체로서 ‘나’를 느끼면 이번에는 옆의 다른 사람들도 각각 자기의 ‘나’가 있지 않나. 그래서 이번에는 ‘나’와 ‘나’끼리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대화가 형성이 된다.
  • 그러니까 지금까지, 그것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물질 현상만 보였는데, 이렇게 되면 이번에는 주체가 내부에 숨어있다가 그러한 정교한 어떤 질서 속에서 표출이 된다. ‘나’라고 하는 것, 서로 간의 ‘나’를 인정하고, 서로의 ‘나’가 표면으로 나오는 것이다. 지금은 이 사람(최우석)을 두고 그저 A라는 물질 덩어리라고 볼 수가 없다. ‘나’와 대등한 하나의 사람이다. 지금 이런 상황이다.
  • 지금 우리 인간과 인간이 이루고 있는 사회에서 ‘나’는 주체가 표면화되고 나타나서 주체와 주체간의 관계를 통해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다. 물질 덩어리들이 만나서 ‘사회’라는 것을 이룬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것이 놀라운 것이다. 생명이 거기까지 오니까, 지금까지는 내면에 있어서 전혀 보이지 않던 것이 외부로 표출이 되고, 이제는 오히려 주체가 모든 상황의 중심에 서고, 오히려 우리 몸이라고 하는 것은 뒤로 빠져 있는 것이다.
  • 그래서 나는 그 관계를 뫼비우스 띠로 모형화를 한 것이다. 뫼비우스 띠가 이렇게 가다가 어느 순간에 안쪽 면이 표면으로 나오지 않나. 한번 이렇게 꼬인다. 꼬이는 바로 그 지점이 인간이 주체를 발견하고 그때부터는 주체가 중심이 돼서 모든 현상을 파악하게 되는, 주체가 표면에 나서는 순간이다. 몸은 그대로 있는 거다. 그 주체는 몸을 바탕으로 해서 모든 것이 나오지만, 이 순간을 넘어서면 몸은 더 이상 의식하지 않고 마음의 세계, 정신의 세계 속에서 몸은 그냥 바탕, 서포트만 해주면 되는 거다.
[슬라이드 4] 뫼비우스 띠의 내면: “삶”의 세계
  • 그렇게 가서 다시 자연의 질서를 발견하게 되고, 다시 자연의 모습을 보면 뫼비우스 띠처럼 우리가 파악하는 자연에 대한 이해와 연결이 되는 식으로 안밖이 바뀌고 연결이 되는 모양이 된다. 이 모형이 우리 전체를 포괄하는 모형이 된다하는 내용을 이 책 마지막 챕터에 했다. 여기서 관련되는 내용이 나왔기 때문에 설명했다.
  • 그래서 이 뫼비우스 띠는 내면과 외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 때에는 주로 외면이 보이다가 어느 순간에는 내면이 나타나는 이런 재미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우주의 역사 속의 인간을 이해할 때, 인간은 그 둘을 같이 가지고 있다. 내면과 외면을 같이 느끼고 있는데, 그러나 사회활동이나 정신활동으로 갈 때에는 오히려 내면의 주체가 운전석에 앉는 것이다.
[그림 1] M. C. 에셔. “Swans”. 1956. (출처: M. C. Escher Foundation)

3. 어디까지를 ‘나’라고 할 수 있나?

<최> 뒤로 가기 전에 앞에 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다. 저 나름대로 물질현상, 생명현상과 구분되는 ‘나현상’이라고 불러보면,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나현상’의 어디까지를 말씀하시는지 알고 싶다. 가령 인간처럼 언어, 자각능력이 없는 생명도 감각, 때리면 아프다는 고통 등 이런 감각 능력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런 것도 ‘나현상’의 하나로 들어갈 수 있나?

  • 느끼는 주체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그것을 느낌으로 느끼면 주체인 것이다.

<최> 밖에서 찌르면 움찔하지만 내면에서는 아프다고 느끼는지 우리는 모르는데, 적어도 그 안에서 우리는 잘 모르기만 짐작컨대 ‘아파’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때부터 이미 ‘나’는 있는 것이다라고 보아야 하나?

  • 그렇다. 내면이 작용하는 것이다. 물리적으로야 아플 이유가 사실 없다. 그저 거기 닿았을 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나한테 와서 아프다고 하는 그런 것이 나오면 달라진다. 그건 마음의 한 중요한 한 속성이기 때문에 그 속성이 거기서 표출한다(면 마음, ‘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실제로 그 다른 생명체의 아픔을 느껴볼 수는 못한다. 내가 지금 아픈 그 동물이 돼서 내가 그 아픔을 느낄 수는 없다. 유추하는 거지. 그런데 틀림없이 내가 느끼는 아픔과 동일한 아픔을 느낄 것이다라는 것을 인정하면, 그러면 그 존재는 주체를 가지고 의식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 대충 우리가 현상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람끼리는 쉽게 알 수 있지. 다른 사람이 아플 때 어떤지는 내가 아파봐서 아니까. 사람끼리는 이렇게 알기 쉬운데, 동물은 조금 다르지만 거의 유사한 그런 것이 있으면 거기도 주체가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사람보다는 주체의 활동 범위, 활동의 폭이 좀 작다고 볼 수는 있지만 다른 동물들의 몸에서도 작동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사람뿐 아니라 적어도 우리가 보고 있는 일부 동식물은 이미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주체를 나타낼 수 있다고 본다.

<최> 선생님의 논증은 그걸 물리법칙으로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경험세계에서의 것으로 보면 물질 세계가 깊어지면 ‘나현상’은 나올 수 밖에 없겠다는 말씀인가?

  • 아주 존재론적인 큰 가설은 물질 현상 만으로 존재하는 물질 세계는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어떻게 되면 언젠가는 주체가 나올 수 있는 그런 성격도 이 물질 세계가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적어도 우리 인간의 경우에는 (주체가) 표면으로 표출된다, 그런 것이다. 
  • 굉장히 흥미로운 얘기다. 말하자면 물리학 입장에서 좁은 물리학으로만 보면 절대로 나올 수 없었던 건데, 현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을 물리학과 연결하다보니까 이번에는 물리학의 일부 혹은 물리적인 상호작용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측면으로 존재하는 거다. 논리적으로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최> 분리할 수가 없고, 하나의 실체의 다른 측면이지만 그 둘 사이에는 아까 데카르트도 그런 것을 겪은 것 같은데, 인과라는 걸 논할 수는 없는 건가?

  • 그렇다. 인과의 문제가 아니다. 인과는 물질과 물질 사이의 일인데, 이건 인과가 아니라 하나인데 하나가 나타내는 서로 다른 측면일 뿐이다.

<최> 내가 생각해서 내 팔을 든다, 내가 보고 싶어서 본다가 아니라 본다라는 것과 물질이 이러한 양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 동시라는 말은 좀 웃기기는 한데, 같이 가고 있다, 정신이 내 몸을 조종한다든가 몸의 약물이 내 정신에 뭘 만드는 게 아니라 물질적인 양태와 내적인 어떤 것이 같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을 어느 쪽에서 보느냐의 문제다?

  • 그렇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나’라고 하는 것은 외부의 영향과 무관하게 변함없이 따로 있고, 어떤 자극이 있으면 내가 적극적인 반응할 수도 있고. 그러니까 독립적으로 ‘있다’는 어떤 상정을 흔히 쉽게 하고 있다. 그래서 마음으로서의 ‘나’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물질이 와서 여기에 닿고 물질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하고,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다.
  • 그렇지만 더 근원적으로 보면 그렇게 구분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 자체도 이미 그런 신체적인 물리적인 영향 아래 가능하다, 이렇게 보는 것이 맞다고 본다.

<최> 그렇게 따지면 너무 신비롭다. 물질 세계가 깊어지면 ‘나’가 나올 수 밖에 없다니, 참 놀라운 얘기다.

  • 놀라운 것이다. 우주와, 그 우주에 살고 있는 우리가 알면 알수록 놀라운 존재다.

<최> 물질의 내면을 논할 때, 온도라고 하는 게 각각의 입자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입자들이 어떤 집합을 이루어서 계를 이루되 거기 안에서 정의될 수 있는 것과 비슷하게 얘기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물질의 내면이 입자를 쪼갰을 때 거기 안에 있냐 없냐 논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런 것들이 일종의 복합적이고 종합적인 뭔가를 이루고 거기 안에서 생명 현상 정도의 정교한 질서가 고도로 유지될 때 그 물질의 집합 안에서 일어난다, 이렇게 봐야 되는 건가?

  • 그렇다.

4. 집합적 주체와 온생명

<최> 그러면, 뒤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우리는 지금 낱생명 단위로 나를 느끼고 그러리라고 짐작을 하고 있다. 그런데 선생님 책에서도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의식 중에서 결국 나로부터 유래하는 게 결국 얼마나 되겠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최근에 와서 집합지성 얘기도 하고 있고, 결국에는 우리가 책이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는 것도 그렇고. 그것이 집합적 존재로서의 낱생명 안의 ‘나현상’은 다시 또 다른 나와의 접속을 통해서 또 다른 ‘나현상’을 중층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보시는 건가?

  • 그렇다. 쉽게 말해서 ‘우리’라는 말을 쓴다. 보통 1인칭 복수라고 한다. 1인칭이라고 할 때 이미 ‘나’라는 게 전제가 된다. ‘나’를 중심으로 해야 1인칭이 되니까. 1인칭 복수로 해서 ‘우리’라고 할 때는, 지금 여기 우리 세 사람이 있지만 이것은 서로 다른 ‘나’로 보는 게 아니라 합쳐서 하나의 주체에 해당하는 그런 의식을 지금 가지는 것이다, ‘우리’라고 할 때는. ‘나’의 일부로 볼 때 ‘우리’가 된다. 그래서 ‘나’ 의식은 내 몸 하나가 가장 작은 단위가 될 거 같은데. 물론 그것보다 더 작은 단위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 우선 집합적 주체라고 하는 것이 상당히 흥미로운 것이다. 우리는 ‘우리’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쓴다. ‘우리’라고 할 때는 이미 함축되기를 이미 ‘나’의 일부인 측면이 상당히 강하다. 물론 우리 안에서도 또 나눠서 ‘너’로 구분이 되지만, 일단 ‘우리’라고 할 때는 전체를 하나로 보는 면이 있다. ‘우리’로 느낄 때 이 사람이 어디 찔렸다, 물론 직접적인 감각은 내가 못 느끼지만 이 마음은 찌르르해서 같은 아픔을 느낄 수 있다.
  • 그러니까 적어도 마음의 입장에서는 연결돼서 같은 감정을 한 몸이 느끼는 것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까 직접 신경선이 연결되어 있지는 않지만, 시각적으로 저 사람이 아픈 것을 보고 그것이 역시 내 신경을 역시 찌르는 거다. 그러니까 단지 신경선을 가지고 직접 연결되는 것이 아닐 뿐이지, 적어도 정보적으로는 마찬가지다. 시각적으로 보는 것도 역시 정보거든.

<최> 유선과 무선으로. ㅎㅎ

  • 그렇지. 시각으로 전달돼서 역시 같이 아픔을 느끼는 거다, ‘우리’일 경우에. 그러한 의미에서 사실은 내가 ‘나’라고 하는 것과, 물론 다른 면도 많이 있지만, 공통되는 부분이 굉장히 크다. 집합적인 건데. 이건 특히 가정같은 경우에는 아주 가깝게 느낀다, 가족 간에는. 공동체도 ‘우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느끼고. ‘우리’가 점점 확대될 수 있다. 그러니까 민족, 국가, 인류까지는 누구나 다 인정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또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 인류는 하나로 같이 살아야된다고 생각을 한다.
[슬라이드 5] 집합적 주체의 형성
  • 그런데 그 이면에서 마음으로 느끼는 것은 그것이 내 몸이라는 얘기다. 보통은 내 몸을 하나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내 몸이라는 의식이 몸에서 멀어질수록 옅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그런 내가 내 몸을 생각한다는 것에 해당하는, 엷기는 하지만 그런 것으로 연결이 된다. 이게 집합적 주체다.
  • 집합적 주체가 되는 것은, 그렇게 해야 우리 삶이 연결이 되는 삶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왜 내 몸을 의식하고 아끼느냐. 내 생존을 보살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 집합적인 주체도 마찬가지다. 그래야 우리 집합적 주체가 생존할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나’도 생존에 유리해지고. 그래서 서로 엮여지는 것이다.
  • 그렇게되면 이게 어디까지 갈 거냐. 생명의 단위가 어디냐. 어디까지 있어야 생명이냐. 우리가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게 생명의 보존이다. 생명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데, 생명의 범위가 온생명까지 간다. 그러니까 당연히 온생명을 내 몸으로 볼 수밖에 없다. 온생명이 일단 내가 느낌으로 가질 수 있고 가져야 하는 한계이다.
  • 온생명 밖의 저쪽에 어떤 것은 우리 생명과 아무 관계가 없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내가 어떤 아픔으로 느낄 이유가 없다. 그렇지만 온생명은 내 생존에 직접 관계가 되기 때문에, 온생명을 ‘나’로 느끼는 것은 개인으로서 개인이 자기 주체를 확대해나가는 데 있어서 가야되고 갈 수 있는 한계이다.
  • 그래서 각자가 온생명을 ‘나’라고 느낀다면, 그 온생명은 나의 온생명이나 최군의 온생명이 거의 99.999% 다 공통된다. 딱 서로의 개체만 살짝 다를 뿐이다. 거의 같은 ‘나’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그렇게 느끼는 ‘나’들이) 같이 모이면 온생명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나’를 생각할 때는 내 안에 있는 신경세포들이 서로 연결돼서 사고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 온생명 안에서 서로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얘기를 하면 우리의 마음이 연결이 되고 생각이 정리가 되고 심지어 아는 것도 공유가 된다.
  • 그러니까 온생명 전체에 하나의 주체가 그 안에 있다, 그 하나에 우리는 참여하고 있다, 이렇게 볼 수가 있다. 그래서 생명체로서의 온생명이 하나일뿐만 아니라 주체로서의 온생명도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온생명을 ‘나’로 느낄 수 있고, 온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의 본질적인 단위이지만 그것은 주체를 그 안에 부여할 수 있다. 그 주체가 하는 중요한 역할은, 인간의 의식이 주체가 되고 인간이 ‘우리’를 하나의 공동체로 볼 때에 그 몸이 온생명이 되는 거니까. 
  • 말하자면 우리 인간은 사람으로 비유를 하자면 사람의 두뇌 속에 있는 신경세포들이 서로 연결돼서 ‘나’라고 하는 것을 만들듯이, 사람과 사람 우리도 다 정보적으로 연결된다. 신경세포도 정보적으로 연결되는 게 중요하다. 우리도 정보적으로 연결되고, 심지어 물리적으로도 연결된다. 왜냐하면 지금 말 소리가 가서 들리니까. 정보적으로 물리적으로 다 연결돼 있는 거다. 두뇌 속에서 하고 있는 일을 우리가 똑같이 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의 의식 주체가 될 때 그것이 온생명의 의식이다, 이렇게 보지 못할 이유가 없겠다는 것이다.
  • 그래서 온생명이 우리 생명이 단위이지만 의식 주체의 단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온생명은 의식 주체를 가진 살아있는 존재다, 이렇게 되는 것이다.

<황> 의식 주체로서의 온생명이 되려면 문명이 현대 문명 정도까지는 발전이 돼야 가능할 것 같다.

  • 그래서 내가 지금 우리가 놀랍다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 온생명은 40억 년의 역사를 거쳐서 왔다. 그런데 그 40억 년 동안 적어도 온생명의 의식이라고 하는 주체가 그 안에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주체가 있었다는 생각이 안 든다. 그리고 그나마 주체를 그래도 비교적 명료하게 의식한 것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각각 개인의 주체가 싹트기 시작할 때부터 그 주체가 나오고, 그리고 그 주체는 곧 이어서 ‘우리’라고 하는 집합적 주체로 간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온생명이다 우리 몸이 온생명이다, 그리고 온생명에서 우리가 활동하는 정신적인 존재는 우리 두뇌 안에서 내가 나를 의식하고 있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아하! 우리 온생명이 비로소 의식의 주체가 되었다,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다.
  • 굉장히 놀라운 현상이다. 왜냐하면 온생명이 오랜 기간 동안 생존에 성공했지만 지금 우리 정도까지 오니까 비로소 어쩌면 우리 세대에서 처음으로 의식의 주체로 나왔다, 이것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거기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온생명의 주체로서. 이것도 놀라운 일이다. 이것이 우주 역사 138억 년 사이에 쉽게 있을 수 있는 일이겠느냐 이거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우주사적인 사건 정도라고 본다. 온생명이 하나의 의식 주체로 서게 된 것. 이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 이렇게 되면 이미 우리는 우주적 존재라고 얘기해도 된다. 우리의 삶의 터전이 이미 우주다. 앞에서 우주를 쭉 보지 않았나. 그리고 이 우주 안에서 생명은 지구의 온생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이 지구 온생명이 의식의 주체로 생존해나간다는 것은 우주 안에서 엄청난 놀라운 사건이다. 우리는 나머지 우주도 알고 이해하고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주적 존재로 다시 부상할 수 있지 않느냐는 얘기다.

<최> 우주적 범위에서 그것도 놀랍고 신비로운 일이기는 하지만 온생명이 출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우리가 잘 모르기는 하지만 다른 어디서도 얼마든지 온생명을 단위로 하는 온생명들은 생겨날 수 있는데. 그 와중에 나를 ‘나’로 느끼는 온생명 단위까지 생겨나는 것은 더더욱 놀랍고 신비로운 일이다는 말씀인 것 같다.

몇 가지 더 짚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나’라고 하는 것을, 제 식대로 표현하면 ‘나현상’으로부터 감각을 넘어서는 인식, 지식 이런 것들이 쭉 나왔다고 하면, 정보들이나 지식들도 ‘나현상’ 안에 있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 그렇다. 좁혀서 생각하면 우리 두뇌 속에 있는 수많은 신경세포들이 서로 연결돼서 정보를 주고 받고 있다. 그것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라고 그냥 보면 된다.

<최> 그러면 낱생명 안의 ‘나현상’과 집합적 주체로서의 ‘나현상’은 사실 구분하기 어려울만큼 아주 거의 동등한 현상이지 않을까 싶다. 개인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정보적인 교류와 낱생명 간의 정보적인 교류들이 범위를 좀 달리하고 한층 위에 다른 층이 올라가기는 하지만 거의 동일한 일이 일어나는 것 같다.

  • 그렇게 볼 수 있다.

5. ‘나’의 동심원적 구조

<최> 그러면 낱생명 단위의 나와 집합적인 나의 명확한 경계, 이런 것들을 덜 중요하게 봐도 될까?

  • 그러니까 우리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나는 이것을 동심원적 구조라고 보고 있다(슬라이드 6). 그래서 가장 작은 범위에서는 낱생명으로서의 ‘나’로, 그것은 당연히 누구나 느낀다. 일차적인 내 몸의 보존 책임은 바로 내가 지고 있는 거니까. 그 다음에 우리 사회, 공동체로서의 ‘우리’가 있고, 온생명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아울러서 굳이 우리라는 주체라고 표현을 하려면 ‘온우리’라고 표현을 하면 될 것 같다. 그래서 온우리라고 하는 것이 온생명으로서의 나이다.
[슬라이드 6] ‘나'(삶의 주체)의 동심원적 구조
  • 그런데 이것은 우리 각자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동심원을 어떻게 조화시키면서 사느냐. 이것이 중요하다. 제일 밖이 중요하니까 나머지는 싹 지우자, 뭐 그런 사람도 있다. 아주 정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우주 전체만 보는. 그러나 실제 우리 삶은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동체는 또 공동체로서의 면이 있고, 나는 또 나 홀로 해야할 역할도 있다.
[슬라이드 7] 소인, 군자, 성인
  • 그래서 이것을 다 같이 공유하는 것이 우리 삶의 주체로서의 ‘나’의 성격이다. 그런데 서로 각자가 다른 모습을 띠는 것은 이 동심원에서 어느 것을 더 중시하면서 살고 있느냐의 차이다. 가장 큰 경계는 사실상 거의 다 공유하고 있다. 개인 입장에서는 그걸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있지만.
  •   내가 장난을 하나 해놨는데. 슬라이드 7에서 맨 위 그림처럼 ‘나’를 가장 중시하는 사람을 소인이라고 불렀다, 옛날부터. 대게 어릴 때는 이렇다. 다른 것은 아직은 잘 모르고, 우선 자신부터 잘 보살펴야 성장하니까. 성장하면서 밖으로 나아가야 되는데.
  •   ‘우리’를 중시하는 정도가 되면 이제 ‘군자’라고 부를 수 있다, 예전에는. 적어도 우리 공동체를 주로 보살피는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군자다.
  •   이제 ‘온우리’를 생각하는 정도가 되면 ‘성인’의 반열에 오른다고 본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성인이 꼭 좋은 것은 아니고, 우리도 생가하고 나도 생각해야 풍부해진다. 다 잊어버리고 ‘성인’만 하겠다? 글쎄…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 같지는 않다.
  • 그런데 ‘온우리’는 대부분 의식을 못하기 때문에 강조할 필요는 있다. 적어도 온생명 정도의 삶을 내가 살아가는 것, 이것을 우리가 꼭 가져야 하지만, 그걸 위해서 나머지를 다 포기할 필요는 없다.
  • 그래서 이번 장에서 제일 중요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 심학 8도(슬라이드 8)이다. 여기서는 ‘작은 나’와 ‘큰 나’로만 나눴다. 중간에 여러 개가 있겠지만. 그런데 각각의 ‘나’에서 빨간색 ‘작은 나’는 내면의 의식으로서의 나이고, 외면은 몸이다. 온생명도 빨간색 ‘큰 나’, 즉 온우리는 내면의 의식 주체로서의 나이고, 밖은 몸으로서의 온생명이다.
[슬라이드 8] 심학 제 8도. 주체와 객체의 관계
  • 몸과 마음이 구분될 수 없는 하나인데, 그 안의 내면을 보면 각각이 이러한 동심원적인 구조를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렇게 이해를 해볼 수 있다.

<최> 작은 나와 작은 몸의 내면과 외면의 선을 한번씩 꼬아주셔야할 것 같다(뫼비우스의 띠처럼). @.@

  • 그건 또 뒤에서 다시 논하고. 현재 우리 삶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나, 주체가 표면에 나와 있다. 물론 몸이 중요하지만, 일차적인 관심은 ‘나’라고 하는 주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6. ‘삶’이란 생명의 주체적 운영

<최> 여기에서 저는 좀 깜짝 놀랐다. p.427 첫 번째 줄에서 “‘삶’이란 한마디로 규정하자면 ‘생명의 주체적 운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서 깜짝 놀랐다. 생명이 온생명을 단위로 생겨나고 그 생명의 전개가 낱생명으로 전개가 되고 있다고 할 때, 사실 굉장히 낮은 수준의 생명이라고 하면 세포들이 꿈틀꿈틀대는 것같은 그런 이미지로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이 어느 정도 전개가 되고 정교함이 더해졌을 때, 고통처럼 어떤 지각할 수 있는 ‘나’가 나왔을 때 그때 비로소 삶이라는 게 시작했다라고, p.427의 이 부분에 의하면 그렇게 볼 수가 있다.

내가 나를 나로 느끼면서 물질이 생명 현상을 유지해나가는 바로 그것이 ‘삶’이다. 삶이 이제 한편으로 보면 물질적으로 이해되는 측면이 있고, 또 한편으로도 ‘나’라는 측면이 이해된다.

  • 같은 현상이지만, 그걸 그냥 ‘나’를 숨겨버리고 생명 현상으로만 보면 그건 생명 ‘현상’이지 ‘삶’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살아있다는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고. 살아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삶이라는 명사를 만들 때의 ‘삶’은 주체가 운전석에 앉을 때, 주체가 운전석에 앉아서 영위할 때가 ‘삶’이다. 그런 주체가 없고 몸이 주관하게 되면 그것은 생명 현상이다. 그래서 삶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의미를 가진다.
  • 뫼비우스 띠를 보면 안쪽에 있다가 표면으로 올 때부터가 ‘삶’이라는 것이다. 주체가 운전석에 앉을 때부터. 그것이 삶이다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이제 삶을 비로소 이해를 하는 것이다. 삶이 뭐냐? 그 안에 나타나는 주체가 주관이 돼서 자기가 판단을 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다.

<최> 선생님 옛날 책 중에서 유명한 책이 『삶과 온생명』인데, 거기에 ‘삶’과 ‘온생명’이라고 쓸 때에는 생명을 운영하는 ‘나’를 염두에 두고 지으신 건가?

  • 그때에 그 ‘삶’은 우리 동서 학문의 특징을 구분해보면서 쓴 말이다. 동양학문의 전통에서는 삶의 문제를 표면에 내세우고 묻는 체계일 수 있다. 그래서 삶을 중시한 거다. 그것에 비해서 서구학문은 물질과 마음으로 이원화했다. 그래서 물질만에 대한 학문이 따로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마음에 대한 것은 인문학이 또 따로 있고.
  • 그걸 둘로 갈라서 체계화했고. 그렇게 해서 물질 현상에 대해서는 상당히 성공적인 학문을 성취했지만, 동양에서는 본질적으로 삶을 어떻게 살 거냐, 삶의 문제에 모든 것을 부착을 시키는 식으로 학문을 전개했다. 개념도 근본적으로는 삶에 닿는 개념이 기본이고, 나머지는 부수적이다.

<최> 저는 중학교 때부터,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어느날 밤에 혼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면서 있다가 문득 내가 죽으면 나를 나로 생각하는 나도 없어지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를 나로 생각하는 내가 없어진다는 게 너무 두려웠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을 만날 때 이따금 나를 나로 생각하는 내가 없어진다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두렵냐, 너는 두렵지 않냐 종종 물어보곤 한다. 

상대성이론을 논하는 책의 후반부에서 ‘나’라고 하는 것이 138억 년의 존재 세계로부터 쭉 풀어져서 나와서 이렇게 설명이 되는 이런 국면으로 오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없어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은 평정심을 가지고 보게 된다고 할까 그런 걸 느꼈다. 앎이라고 하는 것이 원래 이렇게 나 자신에 대한 이해와 나 자신에 대한 제어, 조종 이런 것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인가?

  • 그래서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처음부터 ‘나’만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의 모든 물질적인 것을 통해서 그것과 나의 관계까지를 이해함으로써 비로소 ‘나’를 제대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중요하다고 해서 나만 하자, 세상의 다른 것은 다 던지고. 이런 비유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모든 걸 던지고 산에 혼자 올라가서 수도만 하자, 나만 이해를 하자, 내 마음이 모든 것이니가 내 마음만 따지자하고 사는 삶이 나를 제대로 잘 알게 하는 걸까? 나만 이해하자, 제일 중요하니까. 그런데 그것이 과연 나를 정말 이해하는 제일 좋은 길이냐?
  • 이런 데서 나는 물론 그렇게 해서 깨닫는다는 사람도 있으니까, 주관적인 깨달음에 대해서 내가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 우리가 여러가지를 감안해 볼 때에는, 나를 알기 위해서는 이 (우주 역사) 전체가 여기까지 온 것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아까 잠깐 얘기했지만, 내가 물리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나’ 문제가 심각해졌다는 말과 관계가 있다. 우주 전체가 이러이러한데 여기에 내가 이렇게 연결됐구나, 했을 때 나에 대한 이해도 더 깊어진다는 것이다.
  • 그리고 이것은 나이에 따라서도 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아까 중학교 때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당연한데. 아까 슬라이드 7에서 맨 위 그림(소인의 작은 ‘나’ 중심의 구조), 중학교 때는 이 상태다. ‘나’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거야. 불안할 수 밖에 없지. 그런데 그 다음에, 군자는 나를 희생하고 우리를 살리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군자지. 그 다음, 성인. 성인은 온우리가 나이기 때문에 나와 우리는 지워도 된다. 전체를 나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 그래서 이제 내 나이쯤 되면 ‘나’에 해당하는 동그라미를 상당히 지우려고 한다. 마지막에는 아주 자연스럽게, 내가 죽는 게 아니다, 온우리를 나로 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 온생명이 중요한 것이지, 나는 단지 잠깐 동안 온우리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을 뭔가 줘야될 것은 주고. 그 다음에는 어차피 시간의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제 사라져야 되는 존재다.
  • 온생명이 커다란 나무라면 나는 잎인데, 그 잎은 언젠가는 떨어져야 되고, 나무는 그냥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나무를 나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잎만 나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크게 다르다. 잎만 나라고 생각하면 떨어지고 나면 끝이다. 그런데 이렇게 크게 보면 죽지를 않는다, 단지 쉬는 거지. 왜냐하면 ‘나’로 활동하는 건 고달프거든. 이제 그만 고달파도 된다 이거지. 나머지가 용인해주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이 된다. ‘나’를 이렇게 이해한다는 것은, 특히 나이를 먹으면 걱정을 안 해도 된다.

끝.

녹취: 황승미 (녹색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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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의 그림은 모두 장회익선생님의 강의자료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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