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과 전체, 원자물리학을 둘러싼 하이젠베르크의 대화들 (2)

부분과 전체, 원자물리학을 둘러싼 하이젠베르크의 대화들

(1) 하이젠베르크, 양자역학, 부분과 전체. 2020년 7월 15일
(2) 하이젠베르크의 청년 시절, 이론물리학과 원자이론. 2020년 7월 22일.
(3)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독일 최연소 대학교수. 2020년 7월 29일.
(4) 서른 살의 노벨상, 전쟁 속의 하이젠베르크. 2020년 8월 5일.
(5) 코펜하겐 1941년, 왜 부분과 전체일까? 2020년 8월 12일.

김재영 (녹색아카데미)


하이젠베르크의 청년 시절

1919년 일차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독일은 말 그대로 폐허 속에 있었다. 막대한 전쟁보상금으로 전후 복구조차 쉽지 않은 때였다. 설상가상으로 바이에른에서는 뮌헨을 중심으로 내전이 벌어졌다.

그해 말 러시아 혁명에 고무된 뮌헨의 사회주의자들이 혁명을 통해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을 만들어 바이마르 공화국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했으나,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군과 민방위군에 의해 해체되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정치세력들 사이의 갈등은 시가전으로 비화되었다.

[그림 1]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 1919년 당시. (출처: wikipedia, 위키백과)

많은 독일인들이 갈등과 절망으로 괴로워하고 있던 이 시기에 하이젠베르크는 바이에른을 중심으로 한 독일 청년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 책의 첫 번째 장은 바로 이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여느 자서전적인 회고록과 달리, 어릴 적 이야기나 가족이 아니라 자신 평생 가장 큰 애정을 지니고 유지했던 청년운동 이야기로 시작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패전과 그에 이은 내전으로 당시 독일의 청년들은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하이젠베르크가 다닌 막스 김나지움은 군사예비연합의 바이에른 청년지부에 속해 있었지만, 당시 바이에른의 청소년들은 정부가 만든 군사예비연합이 아니라 ‘길을 찾는 사람들Pfadfinder‘라는 조직에 더 끌리고 있었다.

이는 영국에서 시작된 보이스카우트의 독일판으로서 군대식 조직과 청교도적 국제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다. 1919년 일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길을 찾는 사람들’의 레겐스부르크 지부를 중심으로 기성세대의 낡은 관념과 수구적인 가치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위한 가치를 추구하는 ‘청년운동Jugendbewegung’이 결성되었다.

이 운동에 적극적이었던 볼프강 뤼델과 에버하르트 뤼델 형제는 막스 김나지움의 또래 친구들을 모았다. 이 단체는 기성세대의 보호가 아니라 청소년의 자립적인 활동을 강조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도자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볼프강 뤼더는 수학과 음악에서 뛰어낸 재능을 보여 많은 학생들의 존경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지적인 자신감과 준수한 용모에 훌륭한 리더십을 갖춘 선배를 그룹의 지도자로 끌어들이자고 제안했다. 바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였다.

하이젠베르크는 당시 중상류층의 보수적 가치관을 내재화하면서 바이마르의 공화주의에 반대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낡은 왕정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 책의 1장에는 전쟁이 끝난 직후의 하이젠베르크의 혼란했던 마음이 잘 드러난다. 바이에른의 소비에트 공화주의자들을 진압하는 데 참여한 일이며, 그 와중에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읽었던 기억이며, 원자이론을 설명하는 당시의 과학 교과서를 읽었을 때의 당혹감을 원자이론에 대한 대화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하이젠베르크는 엉망이 되어 버린 기존 질서를 바로 잡아 세워 줄 새로운 질서를 간절히 찾고 있었다. 그가 지도자 역할을 맡게 된 청년운동은 바로 그런 추구를 위한 가장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 무엇보다 평생 동고동락하며 마음 속 생각을 나눈 친구들을 이 청년 운동에서 만났다.

[그림 2] 프룬 성. 13세기 초에 만들어졌으며, 뮌헨에서 북쪽으로 120km 떨어져 있다. (출처: burg-prunn.de)

1장이 쿠르트 플뤼겔 Kurt Pflügel과 로베르트 혼젤 Robert Honsell과 함께 나눈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뮌헨의 고성 프룬에서 ‘길을 찾는 사람들’의 지도자들이 모여 청년이 나아갈 길에 대해 밤새도록 진지한 토론을 나눈 일 또한 하이젠베르크에게는 가장 소중한 추억이었다.

이들은 19세기말부터 급격하게 도시화되고 있던 독일사회가 세계대전과 내전을 거치면서 급격하게 가치의 추락을 겪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다. 그들은 생명없는 메커니즘, 자본주의적 탐욕, 도시의 익명성, 개인적 위선을 꼬집었다.

이 책의 2장에서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하이젠베르크는 롤프Rolf von Leyden, 발터Walter Tuchmann, 발터의 어머니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눈다. 어릴 때 가졌던 꿈이었던 고전음악이 아니라 이론물리학을 전공하겠다는 베르너를 세 사람 다 적극적으로 말린다.

발터의 어머니는 “이제 세계의 미래는 너희들 청년의 손에 달려 있어. 너희가 아름다움을 선택하면 세상은 더 아름다워질 거야. 너희가 실용성을 선택한다면 세상은 더 편리한 세상이 될 거야.”

하지만 베르너는 그 말에 설득되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한번도 가 보지 않은 낯선 땅에 들어가려 하고 있어요. 올바른 답을 찾으려면 여러 세대에 걸친 물리학자들의 노력이 필요할 거에요. 저도 그 일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이론물리학과 원자이론

하이젠베르크는 1920년 뮌헨의 루트비히-막스밀리안 대학에 입학했다. 하이젠베르크가 처음에 더 관심을 가진 쪽은 이론물리학이 아니라 순수수학이었다. 뮌헨 대학에서 그리스어를 가르치던 아버지의 소개로 수학과의 린데만 교수를 처음 만났지만 그 교수는 베르너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베르너도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다행히 베르너는 당시 막 생겨나고 있던 무척 새로운 분야와 그 분야의 전문가를 소개받을 수 있었다. 원자이론이라는 것을 개척해 나가고 있던 아르놀트 조머펠트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림 3] 아르놀트 조머펠트. 1897년. (Arnold Sommerfeld. 1868-1951) (출처: wikipedia)

보어가 1913년에 새로운 원자모형을 발표하자 조머펠트는 이를 크게 환영하면서 더 세련된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이를 흔히 보어-조머펠트 이론이라 부른다. 고전양자론이라고도 한다.

1900년 흑체복사에서 나타나는 특이한 에너지 분포를 설명하기 위해 막스 플랑크는 에너지의 값이 실수처럼 연속적인 값이 아니라 정수처럼 띄엄띄엄 떨어진 값만 가능하다는 가설을 도입했다. 이를 일정한 양의 정수배만 가능하다는 의미로 독일어로 ‘quantisiert’라 불렀는데, 이것이 일본어 ‘量子化’를 거쳐 한국어로 ‘양자화’가 되었다.

5년 뒤 네덜란드의 파울 에렌페스트와 독일의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빛과 관련된 현상들, 특히 광전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광자 또는 빛 양자라는 가설을 도입했다. 물질이 근본적으로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자연철학자들의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다.

그리스의 자연철학은 이슬람 자연철학으로 계승되었고, 연금술과 점성술은 사실 이슬람 자연철학의 중요한 성과이기도 했다. 인도와 동아시아에서도 물질의 근본에 대한 자연철학적 탐구는 쉼없이 계속 되었다.

17세기 유럽에서 갈릴레오로부터 뉴턴에 이르기까지 근대과학의 기반이 만들어졌다. 갈릴레오는 기하학을 통해 낙하의 법칙을 증명하고 이를 직접 만들 장치로 실험하여 확인했다. 뉴턴은 자신이 생각해 낸 빛과 색의 새로운 이론을 두 개의 프리즘을 이용한 실험으로 증명하고 운동의 일반법칙을 수학을 통해 연역적으로 논증했다.

18세기에 영국의 화학자 존 돌턴이 화학적 원자론이라는 것을 도입한 이래, 19세기 내내 물질의 근본적인 구성에 대한 탐구는 끝을 모르고 확장되었다. 19세기에 새롭게 발견된 전기와 자기와 빛에 대한 탐구는 전통적인 뉴턴역학을 더 많은 영역으로 확장하면서 물리학이라는 전문분야를 만들어냈다.

게다가 에너지라는 개념이 여러 사람의 손을 통해 만들어지면서 모든 물리적 현상들을 통일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언어가 만들어졌다. 무엇보다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그 바탕에 깔려 있는 원자라는 개념을 확립하고 여기에 확률과 통계의 이론을 덧붙인 통계적 열이론은 19세기말 가장 뜨겁고 강렬한 성과였다.

19세기 독일어권의 물리학은 철두철미 실험이었다.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뒤늦게 과학의 세계에 눈을 뜬 독일은 실질적이고 경험적인 기술 위주의 과학을 발전시켰다. 이 상황을 바꾸기 시작한 것은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과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였다.

[그림 4] 왼쪽부터 네른스트, 아인슈타인, 플랑크, 밀리칸, 폰 라우에. 1931년 베를린 폰 라우의 집에서. (출처: wikipedia)

전기나 자기나 빛처럼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자연현상을 다루기 위해서는 탄탄한 수학적 분석과 상상력 풍부한 가설들과 이에 대한 정교한 실험적 확인이 만나는 새로운 접근방법이 요청되었다. 이 분야가 바로 이론물리학이었다.

조머펠트는 바로 독일에서 새로 싹트고 있던 이론물리학의 대표자였다. 관찰한 현상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수학적으로 분석하고 실험을 통해 확인하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하이젠베르크는 이런 접근에 적격이었다.

하이젠베르크가 이론물리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고 조머펠트를 지도교수로 삼은 것은 인류 역사에 고마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이젠베르크가 양자역학을 구성해 갈 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비정상 제만 효과와 헬륨의 스펙트럼 선의 파장들을 고전양자이론, 즉 보어-조머펠트 이론으로 도무지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림 5] 태양 흑점의 스펙트럼에서 나타나는 제만효과. Hale, Nicholson and Joy, 1919. The Astrophysical Journal. Vol.49. (출처: wikipedia)

하이젠베르크로서는 내내 비정상 제만 효과를 물고 늘어지다가 1925년 봄 알레르기성 비염을 앓고 건강을 위해 휴가를 내서 헬골란트를 찾아갔다. 이 책의 5장에서 상세하게 묘사된 것처럼 어느 날 밤 갑자기 막혀 있던 문제가 삽시간에 해결되는 놀라운 경험을 한다.

“마치 표면적인 원자 현상을 통해 그 현상 배후에 깊숙이 숨겨진 아름다운 근원을 들여다 본 느낌이었다. 이제 자연이 그 깊은 곳에서 내게 펼쳐 놓은 충만한 수학적 구조들을 좇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자 나는 거의 현기증을 느낄 지경이었다.”

– 하이젠베르크

양자역학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3)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독일 최연소 대학교수”으로 계속됩니다.

[그림 6] 교수자격시험(Habilitation)을 보고 있는 하이젠베르크. 1924년. (출처: wikiwand)

* 이 글은 2016년에 출간된 <부분과 전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지음, 유영미 옮김, 서커스)에 실린 감수의 글을 위한 초고를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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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색아카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