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바티스트 조제프 푸리에
작성자
자연사랑
작성일
2020-02-17 16:40
조회
7159
푸리에 해석과 푸리에 변환이라는 놀라운 수학적 기법을 만든 사람은 장 바티스트 조제프 푸리에(Joseph Fourier 1768-1830)입니다. 18세기-19세기 프랑스의 수학자 및 물리학자라고 흔히 소개됩니다만, 그 이력은 아주 독특합니다.
푸리에는 9살에 고아가 되었는데, 후견인이 베네틱트 수도회가 운영하는 군사학교에 조제프를 다니게 했습니다. 거기에서 수학에 강한 흥미를 갖게 된 푸리에는 16살에 또래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공식 직위를 얻기도 했습니다. 이 학교를 졸업한 뒤의 진로는 군대 장교로 가거나 수도원으로 가는 것 중 하나였는데, 르장드르라는 수학자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국방장관이 귀족이 아닌 푸리에가 군대로 가는 것을 불허하면서, 1787년 수도원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프랑스 혁명이 나면서 푸리에의 인생은 크게 달라집니다. 오세르의 군중에 했던 연설이 주목을 받으면서 오세르 민중회의의 의장까지 됩니다. 그러나 푸리에는 폭력적인 일에 전혀 연루되지 않았습니다.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한 뒤에도 시민들이 푸리에의 석방을 강하게 요구하면서 처형을 면하기도 했습니다.
26살에 막 생긴 사범학교(École normale de l’an III)에 입학했는데, 이 학교는 불과 4개월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푸리에에게 수학을 가르친 사람은 조제프-루이 라그랑주, 가스파르 몽주, 피에르드시몽 라플라스였습니다.
자코뱅이 약해지면서 푸리에는 다시 감옥에 가게 되었는데, 라그랑주와 몽주가 힘을 써서 다시 석방된 뒤 몽주가 운영하던 학교(l'École centrale des travaux publics)에 가서 수학을 가르치게 됩니다. 1795년 몽주의 '중앙학교'의 후신으로 '에콜 폴리테크닉 l’École polytechnique'이 설립되면서 푸리에는 몽주나 라그랑주와 더불어 이 새로운 학교에서 화법기하학과 해석학(미적분학)을 가르치게 됩니다.
에콜 폴리테크닉은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이공계 대학입니다. 이 학교 졸업생들 중에는 군대에 장교로 가는 경우도 많았지만, 동시에 수학과 물리학이 교육과정에서 크게 강조되었습니다. 사관학교와 최고의 공과대학을 합해 놓은 셈입니다. 이 학교 졸업생들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업적을 내면서 프랑스에서 엘리트 학교로 정립되었습니다. 19세기 동안에도 에콜 폴리테크닉 출신들은 정계와 학계에 널리 진출하여 프랑스의 엘리트주의를 만드는 데 악명 높은 기여를 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가 세 명 있고, 푸와송, 코시, 앙리 푸앵카레 같은 수학자나 코리올리, 카르노, 게-뤼삭, 르샤틀리에 같은 과학자뿐 아니라 오귀스트 콩트 같은 철학자도 이 학교 출신입니다.
푸리에는 바로 그런 학교를 설립한 주요 인물 중 하나입니다.
나폴레옹이 1798년에 이집트 원정을 갈 때 외교관 자격으로 동행했는데, 1802년 프랑스로 되돌아 와서 에콜 폴리테크닉 교수직을 다시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나폴레옹이 푸리에를 그르노블의 총독에 임명해 버립니다. 천상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였던 푸리에는 마지 못해 그르노블로 가지만, 여기에서 독감에 걸리고 이것은 평생 지병으로 남아 결국 죽음의 원인이 되어 버립니다. 이집트에서 5년 동안 적응했던 몸이 춥고 습한 곳으로 가는 바람에 감기로 고생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1822년에 푸리에가 그의 평생의 업적인 "열의 해석학적 이론 Théorie analytique de la chaleur"을 출간했는데, 사람들은 감기와 독감으로 늘 고생했던 푸리에가 열의 전달과 속성을 이해하는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고들 합니다.
바로 이 책에서 푸리에 급수, 푸리에 해석, 푸리에 변환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푸리에는 9살에 고아가 되었는데, 후견인이 베네틱트 수도회가 운영하는 군사학교에 조제프를 다니게 했습니다. 거기에서 수학에 강한 흥미를 갖게 된 푸리에는 16살에 또래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공식 직위를 얻기도 했습니다. 이 학교를 졸업한 뒤의 진로는 군대 장교로 가거나 수도원으로 가는 것 중 하나였는데, 르장드르라는 수학자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국방장관이 귀족이 아닌 푸리에가 군대로 가는 것을 불허하면서, 1787년 수도원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프랑스 혁명이 나면서 푸리에의 인생은 크게 달라집니다. 오세르의 군중에 했던 연설이 주목을 받으면서 오세르 민중회의의 의장까지 됩니다. 그러나 푸리에는 폭력적인 일에 전혀 연루되지 않았습니다.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한 뒤에도 시민들이 푸리에의 석방을 강하게 요구하면서 처형을 면하기도 했습니다.
26살에 막 생긴 사범학교(École normale de l’an III)에 입학했는데, 이 학교는 불과 4개월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푸리에에게 수학을 가르친 사람은 조제프-루이 라그랑주, 가스파르 몽주, 피에르드시몽 라플라스였습니다.
자코뱅이 약해지면서 푸리에는 다시 감옥에 가게 되었는데, 라그랑주와 몽주가 힘을 써서 다시 석방된 뒤 몽주가 운영하던 학교(l'École centrale des travaux publics)에 가서 수학을 가르치게 됩니다. 1795년 몽주의 '중앙학교'의 후신으로 '에콜 폴리테크닉 l’École polytechnique'이 설립되면서 푸리에는 몽주나 라그랑주와 더불어 이 새로운 학교에서 화법기하학과 해석학(미적분학)을 가르치게 됩니다.
에콜 폴리테크닉은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이공계 대학입니다. 이 학교 졸업생들 중에는 군대에 장교로 가는 경우도 많았지만, 동시에 수학과 물리학이 교육과정에서 크게 강조되었습니다. 사관학교와 최고의 공과대학을 합해 놓은 셈입니다. 이 학교 졸업생들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업적을 내면서 프랑스에서 엘리트 학교로 정립되었습니다. 19세기 동안에도 에콜 폴리테크닉 출신들은 정계와 학계에 널리 진출하여 프랑스의 엘리트주의를 만드는 데 악명 높은 기여를 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가 세 명 있고, 푸와송, 코시, 앙리 푸앵카레 같은 수학자나 코리올리, 카르노, 게-뤼삭, 르샤틀리에 같은 과학자뿐 아니라 오귀스트 콩트 같은 철학자도 이 학교 출신입니다.
푸리에는 바로 그런 학교를 설립한 주요 인물 중 하나입니다.
나폴레옹이 1798년에 이집트 원정을 갈 때 외교관 자격으로 동행했는데, 1802년 프랑스로 되돌아 와서 에콜 폴리테크닉 교수직을 다시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나폴레옹이 푸리에를 그르노블의 총독에 임명해 버립니다. 천상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였던 푸리에는 마지 못해 그르노블로 가지만, 여기에서 독감에 걸리고 이것은 평생 지병으로 남아 결국 죽음의 원인이 되어 버립니다. 이집트에서 5년 동안 적응했던 몸이 춥고 습한 곳으로 가는 바람에 감기로 고생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1822년에 푸리에가 그의 평생의 업적인 "열의 해석학적 이론 Théorie analytique de la chaleur"을 출간했는데, 사람들은 감기와 독감으로 늘 고생했던 푸리에가 열의 전달과 속성을 이해하는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고들 합니다.
바로 이 책에서 푸리에 급수, 푸리에 해석, 푸리에 변환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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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초상화를 컬러로 변환한 그림이 있더군요.
(그림 출처: https://www.sciencephoto.com)
62세까지 사신 분인데, 초상화는 아이들처럼 포동포동하군요. 아주 일찍 유명해져서 초상화가 젊을 (어릴) 때 그려졌나 봅니다. 28에 에콜 폴리테크닉 교수가 되고, 30에 나폴레옹과 이집트 원정을 함께 가고 ... 대단하신 분이네요 !
초상화 나이를 미처 생각을 못 해 보았습니다. ^^ 그런데 실상은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9살 때 조실부모하고 성당학교에 들어갔다가 수학에 재능이 있어서 수도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일을 하다가 정말 운 좋게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그 와중에 프랑스 혁명에 휘말리고 감옥에서 죽을 뻔 하기도 하구요. 수학을 잘 해서 프랑스 왕립학술원 정회원에도 추천되었지만, 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정회원이 되는 일이 무산되기도 했습니다. 혁명의 와중에 나폴레옹에게 인정(?)을 받는 바람에 조용히 학교에서 수학이나 연구하고 가르치려도 희망이 꺾이고 이집트에도 5년이나 따라 다녀야 했습니다. 귀국해서 학교에서 조용히 있으려 했지만, 곧 알프스 중턱의 그르노블 총독으로 보내 버려서 거기에서 10여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래도 그르노블에서 논문도 열심히 쓰고 자기 연구를 제대로 하려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다시 집권한 뒤에 푸리에를 또 리옹 쪽에 총독으로 임명했는데, 푸리에는 현명하게도 나폴레옹의 백일천하가 끝나기 전에 사임을 하는 바람에 화를 면했습니다. 사임하지 않았더라면 운명이 어찌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조제프 푸리에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을지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해집니다.
그러나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의 맥락에서도 그렇고 오늘날 21세기의 과학기술을 볼 때, 푸리에 변환이라는 놀라운 개념을 생각해 낸 것으로도 그의 삶은 빛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위의 그림은 1823년에 부왈리(J. Boilly)가 판화로 만들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출처: https://bit.ly/38BbzG4) 아래 있는 설명으로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 1822년 수학과학 담당" "프랑스 왕립학술원 정회원" 등이 나와 있습니다.
조제프 푸리에가 열에 대해 고민하면서 새로운 수학적 방법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어떻게 푸리에 급수와 푸리에 변환을 찾아냈는지 간단하게 설명해 주는 동영상을 링크해 둡니다.
" target="_blank" rel="noopener">But what is a Fourier series? From heat flow to circle drawings (3Blue1Brown)
영상을 보니, 주어진 열의 분포에 대한 열방정식(heat equation)을 풀기 위해서 푸리에가 삼각함수로 이루어진 급수와 변환을 도입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미분방정식을 풀기 위해서 푸리에 급수라는 도구가 도입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전에 미분방정식을 연구하였던 라플라스와 같은 학자들이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던 연유가 궁금해집니다. 푸리에 이전의 선구자들이 연구했던 방정식의 형태가 열방정식과 다른 형태였기 때문인지요? 아니면 푸리에 이전의 미분방정식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인지요?
무척 흥미로운 질문인데, 답글을 쓰다 보니 길어져서 독립된 글로 따로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