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의문 한두 가지
어제(10월 8일) 모임, 그리고 지난 9월 24일 모임에서 "생명이 도대체 무엇일까?"하는 어렵지만 매우 중요한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 문제를 나름 공부해 온 입장에서 한두 가지 의문이 들었지만, 온라인 모임의 분위기상 꺼내지는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조금 소개를 드리고 의견을 경청하려 합니다.
장회익 선생님의 접근에서 '우연'과 '필연'이 특별한 방식으로 조우한다는 것은 온라인 세미나에서도 살짝 말씀드렸습니다만, 여러 면에서 새삼 강조할 점이라 생각합니다. 일찍이 자크 모노가 <우연과 필연>이라는 저서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었습니다. 생명의 많은 부분은 우연적이거나 확률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것이 어쩌다 보니 생겨났다는 오랜 믿음의 연장선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21세기에도 근본주의 기독교의 가르침, 즉 모종의 신이 여러 식물과 동물들을 말로 만들었고 또 인간도 비슷한 방식으로 만들었다는 지극히 신화적인 가르침이 여전히 통하고 있습니다. 마치 마술과도 같은 이 구절들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아주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생명이란 것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아무도 제대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럴 능력을 가진 사람도 실상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연철학'이라는 접근이 가지는 근본적인 한계와 더불어 근원적인 중요성이 살아납니다. '자연철학'은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그냥 선언하고 선포하듯이 '진리'를 설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요한 문제를 함께 풀어가자는 솔직하고 정직한 제안인 셈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의견 없이 말 그대로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볼츠만이든, 슈뢰딩거이든, 섀넌이든, 마투라나이든, 아이겐이든, 카우프만이든, 러브록이든, 시몽동이든, 베르그손이든, 스피노자이든, 이 문제를 깊이 성찰하고 고민한 선각자들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새로운 대답을 모색하는 태도가 이 '자연철학'에서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사소한 질문은 이렇습니다.
자체촉매 국소질서(ACLO)와 자기조직화(스스로 짜임)의 관계는 무엇일까? 자기조직화 또는 스스로 짜임은 영어로 self-organization입니다. 1970년대에 소위 신과학 운동(New Age Science)이라 부르는 사상적 흐름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자주 언급된 특이한 용어입니다. 생명체든 자동차나 컴퓨터 같은 종류의 '기계 machine'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조직화(짜임) organization'입니다. 그런데 어찌어찌 해서 그런 것이 저절로 생겨날 수 있었다는 주장이 바로 '자기조작화 담론'의 핵심입니다.
저는 장회익 선생님께서 제창하시는 '자체 촉매 국소질서 auto-catalytic local order, ACLO)'가 근본적으로 1970년대에 이야기되던 '스스로 짜임'(자기조직화)의 연장선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8일 모임에서 이 문제를 질문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고간 이야기의 흐름에서 제 질문이 다소 뜬금없는 것이 될 것 같아서, 다른 질문(온생명 사상이 전체주의로 흐를 우려는 없는가?)을 먼저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가장 최신의 주장 중 하나는 미국의 의학자-생물철학자-복잡계이론가인 스튜어트 앨런 카우프만의 주장입니다. 장회익 선생님과 거의 비슷한 연배이신 스튜어트 앨런 카우프만(Stuart Alan Kauffman 1939- )(https://en.wikipedia.org/wiki/Stuart_Kauffman)은 1993년에 출간된 저서 The Origins of Order: Self-Organization and Selection in Evolution (1993)에서 스스로 짜임과 진화에서의 선택 문제를 '질서의 창조'라는 맥락에서 설명합니다. 2년 뒤에 나온 At Home in the Universe: The Search for the Laws of Self-Organization and Complexity (1995)는 그 스스로 짜임과 복잡성을 연결시키려는 진지한 시도였습니다.
작년에는 A World Beyond Physics: The Emergence and Evolution of Life (2019)라는 책을 출간하여 생명의 창발(떠오름)과 진화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체계적으로 전개합니다.
장회익 선생님께서도 여러 차례 언급하신 것처럼, '복잡성 과학'(이전에는 '카오스 이론'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훨씬 많은 영역을 아우르면서 명실 공히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정립되어 가고 있습니다)이라 부르는 지난 20여년 동안의 접근이 나름의 의의가 있습니다.
장회익 선생님께서 <자연철학강의>에서 언급하신 '최초의 자체촉매 국소질서'는 제가 아는 지식 안에서는 '리보자임'입니다. 1982년 리보자임(ribozyme)이라는 특이한 생체분자가 촉매, 즉 반응의 시작과 끝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자유에너지의 장벽을 낮추어 반응을 촉발하는 역할을 하는 성질이 발견되었습니다. 2012년 리보자임이 자체촉매 집합을 구성할 수 있음이 실험적으로 밝혀지면서, 지구에서의 생명의 기원에서는 리보자임이 뭔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는 믿음이 지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리보자임의 특별한 역할을 탐구하던 토머스 체크가 1989년 이에 대한 연구 업적으로 노벨화학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https://www.nobelprize.org/prizes/chemistry/1989/cech/article/
자체촉매 국소질서의 개념은 매우 중요하고 소중합니다. 그만큼 다른 학자들의 주장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밝히는 것이 의미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스튜어트 카우프만.
The Origins of Order: Self-Organization and Selection in Evolution (1993).
At Home in the Universe: The Search for the Laws of Self-Organization and Complexity (1995).
A World Beyond Physics: The Emergence and Evolution of Life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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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저번주 온라인 모임은 살짝 아쉽기도 했습니다. 장회익 교수님의 공개 강의가 있을 때 몇번 가본 것이 다이지만 매 장소마다 주장이 강하시고 책을 자세히 읽어보시지 않은 분이 계셔서 어떠한 논리를 주장하시거나, 종교와의 연관성을 물으시는 경우가 있었는데요.
저 역시도 주제에 맞는 심도 깊은 토론에 참여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러한 유사한 상황의 반복은 피곤하기도 합니다. 이번 세미나처럼 온라인으로 참여할 기회는 흔치 않은 것 같아서 제한된 시간에서 조급함을 느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견해는 중요하고, 그런 견해들을 배제하고 가자는 것은 아니고요. 다만 출판 설명회에 할 법한 질문들 외에, 이 글에 써주신 글 같은 것들처럼 더 다양하고 심도 깊은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에서 글을 남겨봅니다.
과학사적으로 정리해주시니까 좀 더 폭넓게 이해가 됩니다. 카우프만이 어떤 얘기를 하고 있는지도 꽤 궁금해지네요. 자연사랑님, 고맙습니다.
j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발제 따로 토론 따로인 경우가 심심찮게 있죠. ^^;
책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로 하는 세미나인 만큼 책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확인하고 이해하는 게 제일 먼저일 것이고, 저자도 참석하시니 가능하면 저자를 적극 활용(?!)해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게 세미나의 목적에 맞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