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족 (1): 천원지방, 갈릴레오, 뉴턴, 여헌 장현광
자료
앎의 바탕 구도
작성자
자연사랑
작성일
2019-12-11 23:07
조회
5473
여하간 그보다 나중 사람인 외암 이간(李柬, 1677년~1727년)의 책 <외암유고>에 등장하는 육면세계설을 보면 여전히 하늘은 둥근 것으로 땅은 육면체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이 잘 드러납니다.
장현광이 지구설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면, 그의 질문 "대지는 왜 떨어지지 않는가?"라는 질문에서 '대지' 즉 땅은 네모난 모습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2) "중요한 점"이라고 표시한 내용은 약간 더 깊이 생각해 볼만합니다. 공기저항 같은 것이 없다면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이 떨어지는 속도가 같다는 말의 다른 표현은 공기저항이 있으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됩니다.
두 가지 점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하나는 뉴턴 이전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과 비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으로 이어지는 실마리입니다.
널리 알려진 갈릴레오의 피사 사탑 실험[정확하게 말하면 갈릴레오는 그런 실험을 한 적이 없고 자신의 논문 "운동론 De motu" (1590)에서 1575년 피사 대학 지롤라모 보로(Girolamo Borro)가 한 실험을 인용한 것입니다만]은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이 똑같이 떨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과학사에서 중요한 이유는 그 전까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에서 말하는 것을 반박하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에서는 세상의 중심이 지구이고, 지구의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네 원소 중 흙(terra)과 물(aqua)은 근본적인 무거움(gravitas)을 지니고 있고, 숨(aer)과 불(ignis)은 근본적인 가벼움(levitas)을 지니기 때문에, 연기는 위로 올라가고 돌멩이는 아래로 떨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무거운 물체(즉 terra 원소가 더 많이 들어 있는 것)가 가벼운 물체보다 더 빨리 아래로 떨어집니다. 깃털이 느리게 떨어지는 것은 terra보다 aer가 더 많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눈사람님(neomay3님)이 중요한 점이라고 빨간색으로 표시하신 내용에서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가 물체의 질량(즉 구성요소나 성분)과 무관하게 같은 속도록 떨어진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새로운 주장입니다. (이것은 제3장에서 이야기되는 일반상대성이론의 개념적 기초 중 하나인 '등가원리'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공기저항 같은 것을 고려한다면, 물체의 질량에 따라 낙하속도가 달라집니다. 이것도 당연히 제2도의 기본 골격을 통해 완전히 이해할 수 있고 또 예측할 수 있습니다. 전체 틀은 그대로 유지되지만, 단지 그 안의 힘의 구체적 모습과 수식이 달라질 뿐인 거죠.
이것은 눈사람님(neomay3님)이 "중요한 점"이라고 표시하신 것이 정말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지적하려던 것이었습니다.
(3) 그 다음 주목할 문제는 비스듬히 던진 물체가 그리는 궤적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에 따르면, 대포알의 궤적도 직선이어야 합니다. 옆으로 물체를 던지거나 대포알을 쏘면 그 물체에 코나투스(아베로에스) 내지 임페투스(장 뷔리당, 운동량 개념과 유사함)를 전달해 주게 됩니다. 그 코나투스 내지 임페투스는 물체가 전진할수록 점점 빠져나갑니다. 임페투스가 다 떨어지면 물체는 지구 중심, 즉 세계의 중심을 향해 떨어지게 됩니다.
[그림 출처: Daniel Santbech (1561)]
갈릴레오는 이런 관념이 옳지 않음을 논증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수평으로 던진 물체의 운동 궤적을 면밀하게 연구했습니다.
수평으로 던진 물체뿐 아니라 비스듬히 던진 물체의 운동궤적이 소위 parabola 모양(번역하면 포물선이지만, 이 말은 말 그대로 던져진 물체의 궤적이 그리는 선이라는 뜻이라 영어로 나타내는 게 더 확실할 듯 합니다.)임을 증명한 것입니다.
<자연철학 강의> 118쪽에 바로 이 이야기가 상세하게 나옵니다. '고전역학'이라는 새로운 앎을 통해 옆으로 던진 물체의 운동이 그리는 궤적을 정확히 찾아내고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죠.
아래 그림은 갈릴레오가 낙하를 연구하면서 그린 그림과 노트입니다.
(4) 하나 덧붙이자면, (아산 세미나에서 제가 살짝 언급하긴 했습니다만), 장현광이 "땅이 왜 떨어지지 않을까?"라고 물은 반면, 뉴턴이 "사과가 왜 떨어질까?"라고 물었다는 대조법은 디테일로 들어가면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해하면, 동아시아의 어리석은 낡은 성리학적 자연철학과 유럽의 세련된 고급 자연과학이 대비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간단하게 말했듯이, 과학혁명 이전에 유럽에서 500여년 동안 대학에서 활발하게 가르치고 토론했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은 동아시아 자연철학과 마찬가지로 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세상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라고 새로 이야기하는 바람에 곤란해지긴 했죠. 뉴턴에 앞서 요하네스 케플러가 바로 그 문제를 깊이 파고듭니다. 뉴턴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사과는 왜 떨어지는가, 그리고 왜 달은 떨어지지 않는가?" 쯤이 될 겁니다. 사과와 달의 운동을 모두 동일한 법칙 내지 원리로 설명하려 했다는 것이 뉴턴의 기여입니다.
아래 그림에서 달도 사과나 대포알처럼 사실은 떨어지는 것인데, 그 떨어지는 정도가 달라서 지구 주위를 회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발상이 놀라운 셈입니다. (그림 출처: I. Newton. On the System of the World)
(5) 한 가지 더 덧붙여야 할 듯 합니다. 뉴턴이 "사과가 왜 떨어지나?" 하고 물었다는 표현에는 약간의 어폐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뉴턴은 사과가 왜 떨어지는지, 즉 중력의 근본원인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단지 기존의 논의들을 종합적으로 앞뒤가 맞도록 체계화하기 위해서는 모든 물체들 사이에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이 작용한다고 가정했을 뿐입니다. 뉴턴 당시 사람들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신비롭게 서로를 끌어당긴다는 뉴턴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특히 데카트르주의 물리학을 따르던 사람들에게는 접촉도 없이 서로 끌어당긴다는 주장은 신비주의였고 소위 '감추어진 속성 occult property'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반발에 대해 뉴턴은 유명한 대답을 합니다.
"나는 가설을 세우지 않는다 hopothese non fingo"
이 말은 보편중력(만유인력)은 가설이 아니라 행성의 운동과 사과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한 자연의 사실이며 법칙이라는 주장이라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 엄청난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바로 200여년 뒤 아인슈타인을 통해서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처음부터 뉴턴에 반기를 든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가능하게 한 엄청난 저작이 에른스트 마흐의 [역학의 발달]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20대 나이에 대학을 졸업하고 변변한 직장도 없이 모리스 솔로빈이나 콘라트 하비히트나 미셸 베소 등과 어울리면서 올림피아 아카데미라는 이름까지 지어서 여러 책을 함께 읽고 밤늦게까지 토론했죠. (<자연철학 강의> 136-142쪽) 여기에서 읽은 책 중 하나가 바로 마흐의 <역학의 발달>이었습니다. 마흐는 그 책에서 뉴턴의 자연철학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결국 아인슈타인이 새로운 길을 찾아나가게 하는 단초를 제공했습니다.
아이러니라면, 그렇게 해서 일반상대성이론이 틀을 잡고 난 뒤에 아인슈타인이 젊은 시절 마흐에 빠져 있던 것을 후회하는 얘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전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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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사랑2023-02-13 23:35
박성래 (2005). "우주에 관심 둔 성리학 거장 장현광". 과학과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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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사랑2019-12-11 23:12
눈사람님(neomay3님)의 요청을 따라 아래 <자연철학 그림노트> 글에 딸린 제 답글을 모아서 새 글로 만들어 올립니다. 답글들 사이의 빈 줄이 사라지지 않아서 여백이 좀 안 예쁩니다.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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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may32019-12-11 23:17
고맙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내서 다시 정리해주시다니~
그림을 고쳐볼까 생각 중인데, 하루하루 일에 쫓기다보니 & 어떻게 고쳐야할지 몰라서 그냥 있는 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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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헌 선생의 "왜 대지는 떨어지지 않나?" 하는 대목의 '대지'는 '지구'로 그리면 안 될 듯 싶습니다. 동아시아 신유학(성리학)의 자연철학에서는 '천원지방 天圓地方'이라 해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 모양이라는 믿음이 유지되었습니다. 물론 18세기 홍대용은 이른바 '지구설 地球說' 즉 땅이 둥글다는 새로운 학설을 적극 수용했지만, 그 전까지는 지구설을 받아들인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홍대용은 바로 윗세대에 속하는 김석문(金錫文 1658-1735)에게서 해와 달과 땅이 모두 둥글다는 주장을 배웠는데, 다른 사람들과 달리 '지구설'에 거부감을 갖지 않았습니다. 김석문보다 상당히 앞세대에 속한 장현광(1554-1637)이 지구설을 받아들였는지 여부는 한번 상세한 내용을 찾아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