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스님의 질문 2에 대한 하나의 대답
시지프스님의 두 번째 질문도 엔트로피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 아주 적절하고 좋은 질문입니다.
"얼음, 물, 수증기, 이렇게 H2O 의 거시상태를 나누고, 미시상태들의 수인 엔트로피를 (이론적으로) 헤아려 본다면, 얼음이 가장 적고, 물이 중간쯤, 수증기가 가장 클 것입니다.
여기에 열역학 2법칙을 적용하면, 우주에서 가장 흔한 H2O 의 거시상태는 수증기가 되야 할텐데, 현실에서는 얼음입니다. 우주의 대부분은 절대영도에 가까운 춥고 텅빈 공간이니까요. 엔트로피가 온도와 연결되지만, 온도를 빼고 그냥 엔트로피만 생각하는 것은 이런 이상한 결과가 나옵니다."
루트비히 볼츠만에 따르면, 엔트로피는 다름 아니라
$$ S = \log W $$
입니다. 여기에서 $W$는 특정 거시상태에 대해 그 거시상태를 구성하는 미시상태의 수입니다. 독일어로 확률을 의미하는 Wahrscheinlickheit의 첫 글자 W를 딴 것입니다. 로그 값을 취한다는 것이 다를 뿐 그냥 확률입니다.
열역학 둘째 법칙은 고립된 계의 엔트로피는 결코 감소하지 않으며 언제나 증가하거나 현상유지에 머문다고 말합니다.
엔트로피의 증가라는 것이 $S = \log W $라는 식만으로 보면, 모든 변화는 더 확률이 큰 쪽으로 일어난다는 지극히 당연한 주장일 뿐입니다.
얼음과 물과 수증기를 놓고 보면 모두 $\mbox{H}_2 \mbox{O}$ 분자들로 이루어졌더라도 결국 얼음이라는 거시상태에 해당하는 미시상태의 수보다 물이라는 거시상태에 해당하는 미시상태의 수가 더 클 겁니다. 그리고 수증기라는 거시상태에 해당하는 미시상태는 훨씬 더 많을 겁니다.
따라서 열역학 둘째 법칙에 따르면 시간이 흐를수록 얼음은 점점 더 줄어들고 모두 수증기가 되어 버릴 겁니다. 이상한 결과인가요? 아닙니다. 정말로 이 우주에서 $\mbox{H}_2 \mbox{O}$ 분자들이 얼음 상태로 존재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입니다. 우주 어딘가에 만일 $\mbox{H}_2 \mbox{O}$ 분자들이 있다면, 거의 대부분 수증기 즉 기체의 상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실제로 그러합니다.
여기에서 논리적 비약이 된 것은 우주 공간 대부분은 절대 0도에 가까운 춥고 텅빈 공간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우주 공간 대부분에는 사실상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열역학 둘째 법칙은 국소질서가 생기는 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가령 별 같은 것이 그런 국소질서입니다.
별은 절대 0도에 가까운 춥고 텅빈 공간이 아닙니다. 태양 표면의 온도는 5778켈빈 즉 섭씨 5500도로 엄청나게 뜨겁습니다. 그 내부로 들어가면 온도는 더 올라갑니다. 현재 정립되어 있는 천체물리학의 모형에 따르면 태양의 중심부는 2천 7백만 켈빈 이상의 엄청난 고온입니다. 하지만 태양은 우주에 존재하는 수없이 많은 항성들(즉 별들)과 비교하면 아주 보잘것없고 작은 별입니다. 태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수소이고 중심부에 헬륨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핵융합으로 빛을 냅니다. 천체물리학의 관점에서 별이란 기체분자들(거의 대부분 수소와 헬륨)이 자체 중력으로 오그라드는 힘과 기체의 팽창압력이 평형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은하와 별이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대한 자연철학적 접근으로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325-329쪽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 내용은 천체물리학, 천문학, 우주론이 확립한 것이지만, 그 자연철학적 함의는 또 다른 면에서 곱씹어 볼만합니다.
현대 천문학과 천체물리학에 따르면, 우주 대부분에서 $\mbox{H}_2 \mbox{O}$ 분자는 거의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찾아내기만 하면 우주 속의 생명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주생물학(astrobiology)이라는 신생분야의 발견과 논의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만일 존재한다면 액체나 고체 상태일 가능성은 극히 희박합니다. 있더라도 기체 상태일 겁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리 주변에는 $\mbox{H}_2 \mbox{O}$ 분자가 널려 있습니다. 물론 지구에서도 $\mbox{H}_2 \mbox{O}$ 분자 대부분은 수증기 상태로 존재합니다. 이것이 '기권'입니다. 그리고 '수권'이 액체 상태의 물분자들입니다. 그리고 고체 상태의 얼음들이 조금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엠페도클레스-아리스토텔레스의 4 원소가 고체(흙 terra), 액체(물 aqua), 기체(숨/공기/바람, aer), 불(ignis)였던 것은 상당히 통찰력 있는 자연철학적 사유의 결과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볼츠만이 1875년 무렵에 클라우지우스의 엔트로피 개념을 포함하면서도 결국 $S = \log W$라는 새로운 정의를 통해 엔트로피 개념을 확장하여 재정의함으로써 확률-통계 이론을 가져온 것은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실상 그 전까지 볼츠만은 열역학 둘째법칙을 H-정리나 에르고딕 가설을 기반으로 뉴턴 역학으로부터 유도하려고 엄청나게 애를 쓰고 있었고, 또 성공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반론에 부딪히자 열역학 둘째법칙이 엄격하게 뉴턴 역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단지 확률-통계적인 경향을 나타낼 뿐이라는 약화된 주장으로 돌아서게 된 것입니다.
엔트로피를 $S = \log W$로 재정의하는 것은 곧 열역학 둘째 법칙을 확률-통계적으로만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확률-통계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물리학적 접근이 약화되었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확률-통계 이론을 엄격하게 적용함으로써 훨씬 더 많은 것을 알아내고 올바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확률-통계 이론을 써서 기존에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던 많은 현상들을 설명하게 만든 것이 바로 통계역학이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확률 이론이 왜 그렇게 잘 작동하는지 제대로 해명하고 있지 못합니다. 심지어 확률이 정확히 무엇인지조차 광범위한 동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확률을 정의하기 위해 모든 미시상태가 똑같이 가능해야 한다고 가정합니다. 확률이론을 처음 시작한 피에르 시몽 드 라플라스가 바로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선험적 동등성 가정은 실상 옹호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로널드 피셔, 예르지 네이먼, 이곤 피어슨, 리하르트 폰미제스 같은 사람들은 상대빈도의 극한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접근들은 엄밀한 토대를 놓지 못하고 문제점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확률을 사람들의 지식의 정도 또는 믿음의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어떤 면에서 요즘 대세는 그런 쪽이고 그 중 한 분파인 베이즈주의가 중심이 되는 것 같습니다. 수학적으로는 콜모고로프 확률공간이론이 확립되어 있어서 전공자들은 그 이론과 공리체계를 써서 연구하고 있지만, 수학적 접근만으로는 그에 대한 자연철학적 기반에 대한 탐구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장회익 선생님께서는 확률 문제에 대한 자연철학적 탐구에 대해 따로 언급하시지는 않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저도 이 문제를 오랫동안 놓지 않고 공부를 해 왔는데, 나중에 기회 되는 대로 더 소개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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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명에서 빠진 것이 꽤 있어 보입니다. 우선 은하와 은하, 더 좁게는 별과 별 사이의 공간에는 $\rm{H}_2\rm{O}$가 전혀 없다는 점을 강조했어야 하겠습니다. 별과 별 사이에 있는 '먼지'는 그리 단순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기체 상태로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Cosmic_dust 참조)
별과 별 사이에 있는 공간의 온도는 거기에 있는 기체의 온도로 따지는데, 대략 $10^4-10^7$ 켈빈 정도로 꽤 높은 것 같습니다.
https://astronomy.stackexchange.com/questions/15086/how-cold-is-interstellar-sp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