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학 제2도와 심학 제3도의 비교
작성자
자연사랑
작성일
2020-03-26 20:29
조회
3375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제3장을 이해하는 일이 그리 녹록치 않은 작업입니다. 어떤 면에서 저처럼 물리학 전반을 잘 이해하고 있고 심지어 고전역학과 상대성이론을 잘 알고 있는 독자를 대상으로 그 다음 단계의 이야기를 하고 계신 셈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성이론이 궁금해서 처음 이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보기 위해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를 펼치신 분은 매우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 책의 주된 목적은 알기 쉬운 상대성이론 입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저의 의견입니다. 장회익 선생님은 동의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의 이야기"라고 해서 반드시 어렵다거나 복잡하다거나 상위수준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담겨 있는 다른 상대성이론 입문서보다도 오히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바로 짚고 가장 중요한 이야기로 쑥 들어가 버립니다. 그런 점에서 본격적인 자연철학적 사유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오히려 상대성이론 입문서보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가 더 맘에 들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길은 심학 10도라는 전체적 그림 속에서 열 개의 그림을 서로 비교해 보는 것이라 믿습니다.
앞에서 눈사람님이 정리해 주신 전반적인 이야기는 제가 보기에 상당히 정확합니다.
디테일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도 하지만, 전체 숲을 보는 통찰이 필요한데, 저는 심학 제2도와 심학 제3도를 직접 비교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담영상에서도 관련된 이야기가 여러번 등장합니다만, 장회익 선생님이 심학 10도, 즉 당신의 자연철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예측적 앎"입니다.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제9도 또는 제9장 "앎이란 무엇인가?"에서 더 깊이 상세하게 다루어집니다.
우선 전체 사유 속에서 예측적 앎이 가장 핵심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자는 것이 바로 제1도의 주장입니다. 그 온갖 변화무쌍함 속에서도 우리가 알고자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먼저 확정해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형 없는 형"으로서 "특성"이라는 고유한 개념으로 규정됩니다.
그런 뒤에 변화라는 것은 곧 "상태의 변화"로 규정됩니다. 또한 변화라는 말 자체에 이미 먼저와 나중을 가르는 기준 같은 것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즉 시간이 내재적으로 있는 겁니다.
그러나 제1도에서 장현광은 기본 틀은 제시했으되, 디테일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장회익 선생님은 물리학자로서 그 디테일의 출발점을 아이작 뉴턴의 자연철학에서 가져오기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면 대상의 특성는 "질량"과 "힘"이 되고, 대상의 상태는 "위치"와 "운동량"이 됩니다.
17세기에 처음 등장하여 점점 더 세련되고 정교한 체계로 발전한 고전역학이라 불리는 이 자연철학의 사유는 지난 300년을 온통 쥐고 흔들었을 뿐 아니라 약간 과장하면 서양과학의 탁월함과 직접 연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3도와 제4도입니다. 제3도에서는 '먼저'와 '나중'을 나눌 수 있는 기준이 사실 잘못된 것임을 지적합니다. 또 '위치'라고 불렀던 것이 실상 '먼저'와 '나중'을 나누는 기준, 즉 시간과 별개가 아니라는 놀라운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겁니다.
상대성이론의 수많은 측면 중에서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의 제3장에서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이 독립되었다거나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4차원 시공간의 일부(그림자)로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일입니다. 제1도의 장현광이 문제 설정은 잘 했지만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면, 제2도의 뉴턴은 그 답을 찾기 위한 실마리 내지 첫걸음을 잘 내딛었지만, 안타깝게도 틀렸다는 것이 제3도의 핵심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함께 보아야 하고, 에너지와 운동량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제3장의 심각한 주장 중 하나가 됩니다.
그렇게 할 때에야 비로소 예측적 앎의 참된 길로 나아가는 상황이 됩니다.
심우도의 비유에서 장현광의 접근(제1도)은 앎의 바탕 구도를 제기한 것이니 "소를 찾아 나서다"라는 말이 잘 맞아 떨어집니다. 뉴턴의 접근(제2도)는 일단 첫 단추를 잘 끼운 셈이 되었지만, 실상은 "소의 자취를 보다"로 평가해야 합니다.
제3도로 가면 상대성이론의 의미는 "소를 보다"입니다. 찾아나선 소의 그림자만이 아니라 그 그림자를 만들어낸 소를 직접 보는 것입니다. 1차원 시간과 3차원 공간이 4차원 시공간의 그림자라는 말은 민코프스키가 한 말입니다. "소의 자취를 보다"가 "소를 보다"로 된 것이 민코프스키의 말과 통하는 데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4도에서 "소를 얻다"가 되는 것은 제1도로부터 제3도까지의 준비가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시간' 개념이 '고유시간' 개념으로 바뀐다는 점입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시간과 3차원 공간이 별개로 독립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심학 제2도에서 시간과 공간을 별개로 보았던 관점이 제3도에서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여러 접근들 중에서 복소수 평면(가우스 평면)이 유용하지만, 여하간 4차원 시공간을 도입해야만 한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고유시간 다음의 이야기는 심학 제1도에 있는 "형 없는 형"(특성)과 "상 없는 상"(상태)를, 이제 달라져 버린 4차원 시공간과 연결시키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4-벡터라는 개념이 중요해집니다.
제2도에서 그 변화무쌍함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불변적인 것을 '특성'이라 불렀고, 이것은 다름 아니라 대상의 질량과 힘이었습니다. 이와 달리 변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 즉 위치의 변화를 말해 주는 '상태'는 위치와 운동량이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따로 있지 않고 4차원 시공간으로 묶여야 한다면, 제2도와 달리
(1) '먼저'와 '나중'을 구별하는 '시간'의 새로운 규정
(2) 대상의 불변적 요소인 '특성'의 새로운 규정
(3) 대상이 변화하는 요소인 '상태'의 새로운 규정
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유시간'과 '4차원 벡터'가 불쑥 튀어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시공간이 묶여서 4차원이 되기 때문에, '특성'도 3차원적인 힘과 질량으로 불충분하고, '상태'도 3차원적인 위치와 운동량으로 불충분합니다. 둘 다 4차원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실상 제3도를 잘 이해하기 위해 제4도를 들여다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제4도에서는 '상태'를 위치와 운동량(3차원이든 4차원이든)으로 규정하려던 과거의 접근방식이 아예 틀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예측적 앎에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한계가 눈 앞에 다가옵니다.
상대성이론이 궁금해서 처음 이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보기 위해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를 펼치신 분은 매우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 책의 주된 목적은 알기 쉬운 상대성이론 입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저의 의견입니다. 장회익 선생님은 동의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의 이야기"라고 해서 반드시 어렵다거나 복잡하다거나 상위수준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담겨 있는 다른 상대성이론 입문서보다도 오히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바로 짚고 가장 중요한 이야기로 쑥 들어가 버립니다. 그런 점에서 본격적인 자연철학적 사유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오히려 상대성이론 입문서보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가 더 맘에 들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길은 심학 10도라는 전체적 그림 속에서 열 개의 그림을 서로 비교해 보는 것이라 믿습니다.
앞에서 눈사람님이 정리해 주신 전반적인 이야기는 제가 보기에 상당히 정확합니다.
디테일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도 하지만, 전체 숲을 보는 통찰이 필요한데, 저는 심학 제2도와 심학 제3도를 직접 비교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담영상에서도 관련된 이야기가 여러번 등장합니다만, 장회익 선생님이 심학 10도, 즉 당신의 자연철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예측적 앎"입니다.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제9도 또는 제9장 "앎이란 무엇인가?"에서 더 깊이 상세하게 다루어집니다.
우선 전체 사유 속에서 예측적 앎이 가장 핵심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자는 것이 바로 제1도의 주장입니다. 그 온갖 변화무쌍함 속에서도 우리가 알고자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먼저 확정해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형 없는 형"으로서 "특성"이라는 고유한 개념으로 규정됩니다.
그런 뒤에 변화라는 것은 곧 "상태의 변화"로 규정됩니다. 또한 변화라는 말 자체에 이미 먼저와 나중을 가르는 기준 같은 것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즉 시간이 내재적으로 있는 겁니다.
그러나 제1도에서 장현광은 기본 틀은 제시했으되, 디테일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장회익 선생님은 물리학자로서 그 디테일의 출발점을 아이작 뉴턴의 자연철학에서 가져오기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면 대상의 특성는 "질량"과 "힘"이 되고, 대상의 상태는 "위치"와 "운동량"이 됩니다.
17세기에 처음 등장하여 점점 더 세련되고 정교한 체계로 발전한 고전역학이라 불리는 이 자연철학의 사유는 지난 300년을 온통 쥐고 흔들었을 뿐 아니라 약간 과장하면 서양과학의 탁월함과 직접 연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3도와 제4도입니다. 제3도에서는 '먼저'와 '나중'을 나눌 수 있는 기준이 사실 잘못된 것임을 지적합니다. 또 '위치'라고 불렀던 것이 실상 '먼저'와 '나중'을 나누는 기준, 즉 시간과 별개가 아니라는 놀라운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겁니다.
상대성이론의 수많은 측면 중에서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의 제3장에서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이 독립되었다거나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4차원 시공간의 일부(그림자)로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일입니다. 제1도의 장현광이 문제 설정은 잘 했지만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면, 제2도의 뉴턴은 그 답을 찾기 위한 실마리 내지 첫걸음을 잘 내딛었지만, 안타깝게도 틀렸다는 것이 제3도의 핵심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함께 보아야 하고, 에너지와 운동량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제3장의 심각한 주장 중 하나가 됩니다.
그렇게 할 때에야 비로소 예측적 앎의 참된 길로 나아가는 상황이 됩니다.
심우도의 비유에서 장현광의 접근(제1도)은 앎의 바탕 구도를 제기한 것이니 "소를 찾아 나서다"라는 말이 잘 맞아 떨어집니다. 뉴턴의 접근(제2도)는 일단 첫 단추를 잘 끼운 셈이 되었지만, 실상은 "소의 자취를 보다"로 평가해야 합니다.
제3도로 가면 상대성이론의 의미는 "소를 보다"입니다. 찾아나선 소의 그림자만이 아니라 그 그림자를 만들어낸 소를 직접 보는 것입니다. 1차원 시간과 3차원 공간이 4차원 시공간의 그림자라는 말은 민코프스키가 한 말입니다. "소의 자취를 보다"가 "소를 보다"로 된 것이 민코프스키의 말과 통하는 데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4도에서 "소를 얻다"가 되는 것은 제1도로부터 제3도까지의 준비가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시간' 개념이 '고유시간' 개념으로 바뀐다는 점입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시간과 3차원 공간이 별개로 독립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심학 제2도에서 시간과 공간을 별개로 보았던 관점이 제3도에서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여러 접근들 중에서 복소수 평면(가우스 평면)이 유용하지만, 여하간 4차원 시공간을 도입해야만 한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고유시간 다음의 이야기는 심학 제1도에 있는 "형 없는 형"(특성)과 "상 없는 상"(상태)를, 이제 달라져 버린 4차원 시공간과 연결시키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4-벡터라는 개념이 중요해집니다.
제2도에서 그 변화무쌍함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불변적인 것을 '특성'이라 불렀고, 이것은 다름 아니라 대상의 질량과 힘이었습니다. 이와 달리 변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 즉 위치의 변화를 말해 주는 '상태'는 위치와 운동량이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따로 있지 않고 4차원 시공간으로 묶여야 한다면, 제2도와 달리
(1) '먼저'와 '나중'을 구별하는 '시간'의 새로운 규정
(2) 대상의 불변적 요소인 '특성'의 새로운 규정
(3) 대상이 변화하는 요소인 '상태'의 새로운 규정
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유시간'과 '4차원 벡터'가 불쑥 튀어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시공간이 묶여서 4차원이 되기 때문에, '특성'도 3차원적인 힘과 질량으로 불충분하고, '상태'도 3차원적인 위치와 운동량으로 불충분합니다. 둘 다 4차원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실상 제3도를 잘 이해하기 위해 제4도를 들여다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제4도에서는 '상태'를 위치와 운동량(3차원이든 4차원이든)으로 규정하려던 과거의 접근방식이 아예 틀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예측적 앎에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한계가 눈 앞에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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