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언어 상대성, 문학에서의 상대성, 생물학적 상대성이론
질문 및 토론
상대성이론
작성자
자연사랑
작성일
2022-01-06 00:06
조회
2893
상대성이론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제3장 심학제3도에서 제가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물리학의 영역을 넘어서는 '상대성' 또는 '상대성이론'이란 이름이나 관련된 개념이 어느 정도 적절한가 하는 의문입니다.
상대성이론이란 이름이 준 충격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이 상대성(relativity)란 이름에 매혹당했습니다.
아인슈타인과 상대성이론이 언어, 문학, 생물학에 끼친 영향이라고 말할 때 유의할 점은 그 이론의 이름이 하필 '상대성(relativity)'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영어권에서는 '상대성이론'이란 말 대신 그냥 '상대성 relativity'을 씁니다.
상대성이론은 곧이곧대로 하면 theory of relativity라 해야 하겠지만, 많은 책이나 논문이 다 그냥 relativity라 부릅니다. 이 이름을 처음 도입한 것은 프리드리히 하제뇌를(Friedrich “Fritz” Hasenöhrl 1874-1915)로 알려져 있습니다. 1905년 아인슈타인의 그 유명한 논문의 제목은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역학"이었고, 한동안 그냥 로렌츠 이론 또는 로렌츠-아인슈타인 이론쯤으로 불리던 것을 하제뇌를이 1905년 논문에 나오는 원리 하나를 대표하여 '상대성원리 Relativitätsprinzip"라 부르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이 이름이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종종 '상대성이론 Relativitätstheorie'이란 표현도 사용되었지만, 여하간 '상대성원리'가 더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이름이 다름 아니라 "무엇이든 절대는 없다"는 상대주의를 말하는 것으로 오해되었다는 점입니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의 기록을 보면, 아인슈타인(아박사)의 이름은 늘 "무엇이든 절대는 없다"는 관념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상세한 이론은 이해하기도 어렵고(세상에 그걸 이해하는 사람은 모두 합해 12명이라는 근거 없는 이야기가 1930년대 내내 돌아다녔습니다), 제대로 배울 기회도 없으니까, 그냥 그 이름만 가지고 상상을 했던 셈입니다.
(1) 언어 상대성 이론
널리 알려져 있듯이, 아마추어 언어학자 벤자민 리 워프(B. L. Whorf 1897-1941)는 이누이트의 언어 속에는 '눈'이라는 말이 여러 개인 반면 영어에서는 하나뿐이라는 이야기를 퍼뜨렸습니다.
1940년 MIT Technology Review에 "과학과 언어학(Science and linguistics)"이란 제목의 글을 기고했는데, 거기에서 그 유명한 이누이트(에스키모)의 눈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후 이 주장은 “the Great Eskimo Vocabulary Hoax”로까지 불리며, 오래된 괴담이 되었습니다.
Deconstructing “the Great Eskimo Vocabulary Hoax”
워프는 화학공학자였지만, 언어 내지 언어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성서 히브리어, 중앙아메리카 언어를 독학했고, 에드워드 사피어(Edward Sapir 1884-1937)에게 배우기 위해 예일대 대학원에 입학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지는 않았지만 샤피어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흔히 사피어-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이라 부르는 것은 언어는 문화 상대성을 가진다는 생각인데, 워프는 이를 '언어학적 상대성 이론(linguistic relativity)'이라 불렀습니다. 이 용어를 보면 아인슈타인의 이름과 연관이 없을까 문득 궁금해지는데, 실제로 이런 이름을 워프가 선택한 것은 당시 미국에 널리 퍼져서 유행하고 있던 상대성이론(relativity)의 인기를 이용하려던 것이었습니다.
F. Heynick (1983). "From Einstein to Whorf: Space, time, matter, and reference frames in physical and linguistic relativity"Semiotica. 45-1/2: 35-64.
(2) 문학에서의 상대성이론
언어 또는 언어학에서의 상대성뿐 아니라 문학에서도 상대성 또는 상대성이론이 크게 주목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독일어권에서는 상대성이론이 가져온 시간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소설 속에 녹여내려는 흐름이 두드러졌습니다.
Thomas Mann (1875–1955)
Meerfahrt mit Don Quijote (1935), Der Zauberberg (1924), Felix Krull
Robert Musil (1880–1942)
Alfred Döblin (1878–1957) Berlin Alexanderplatz (1930)
Max Brod (1884–1968) Tycho Brahes Weg zu Gott (1916)
Hermann Broch (1886–1951) Die unbekannte Größe
Gottfried Benn (1886–1956)
이것은 영어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국의 작가들이 이 야릇하고 신비스러운 이름을 듣고 '상대성' '4차원' '미지의 세계' 같은 것을 떠올리고 심지어 자신의 문학 작품 속에 이런 관념을 녹여내려 한 것도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문학 작품의 단골 소재인 시간여행도 상대성이론이 주는 새로운 관점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Michael Whitworth (2001).Einstein’s Wake: Relativity, Metaphor, and Modernist Literature. Oxford University Press. https://amzn.to/3rlTvIW
20년 전에 나온 이 책은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을 확장한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라는 이름과 그에 연결된 이론이 작가들에게 일종의 '깨달음' 내지 '각성'을 일으켰다는 주장입니다. 위트워스가 다루는 작가는 조제프 콘라드(Joseph Conrad), 버지지안 울프(Virginia Woolf), 엘리엇(T.S. Eliot), 로렌스(D.H. Lawrence),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이다. 하나같이 굵직굵직한 작가들입니다.
이 책에서는 이런 여러 작가들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물리학에서의 상대성이론이 주는 상상의 세계와 근본적으로 새로운 개념을 자신의 작품 속에 녹여내려 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1895년에 출간된 허버트 조지 웰즈(H.G. Wells 1866-1946)의 소설 <시간여행기계 The Time Machine>에는 유명하지만 덜 알려진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모든 물체는 네 방향으로 연장되어 있어야 해. 길이, 폭, 두께 그리고 지속이지. ... 시간과 3차원 공간 사이에는 우리의 의식이 시간을 따라 흐른다는 것 외에는 아무 차이가 없지. ... 네 번째 차원은 바로 시간이야."
(3) 생물학적 상대성이론
생물학에서도 상대성이론이 등장합니다.
2017년에 나온 데니스 노블의 책 <생명의 곡조에 맞추어 춤추기: 생물학적 상대성>이 바로 생물학에서의 상대성이론을 주장하는 책입니다.
Denis Noble (2017). Dance to the Tune of Life: Biological Relativity. Cambridge University Press.
"The principle of Biological Relativity is simply that there is no privileged level of causation in biology: living organisms are multi-level open stochastic systems in which the behaviour at any level depends on higher and lower levels and cannot be fully understood in isolation. Just as Special Relativity and General Relativity can be succinctly phrased by saying that there is no global (privileged) frame of reference, Biological Relativity can be phrased as saying that there is no global frame of causality in organisms." (p. 160)
하지만 꽤 정교한 논의를 담고 있는 이 책에서 상대성원리는 물리학에서의 접근과 상당한 괴리를 보입니다. 위에 인용한 단순한 이야기 정도로 '생물학적 상대성이론'이란 이름을 붙여도 좋을지 의문이 듭니다.
(4) 상대론적 뇌 이론
2015년에 나온 뇌 과학 분야에서의 책 하나는 <상대론적 뇌>라는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Miguel A. Nicolelis, Ronald M. Cicurel (2015) The Relativistic Brain: How it works and why it cannot be simulated by a Turing machine. https://amzn.to/3EVxnM0
물리학의 영역을 넘어서는 '상대성' 또는 '상대성이론'이란 이름이나 관련된 개념은 적절할까요? 그런 이름을 물리학의 영역이 아닌 분야에서 사용해도 될까요? 하지만 '상대성'이란 용어를 물리학이 독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물리학의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 이야기와 직접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널리 알려진 만화 컷 하나 첨부합니다. 제목이 "철학자와 물리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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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릴 적에 외삼촌에게서 "상대 성 이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세상에 남자와 여자처럼 서로 상대되는 것이 꼭 있다는 거란다." 라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 돌이켜 생각해보니, 당시 노총각이던 외삼촌이라서 그런 예를 드셨나 봅니다 ㅠㅠ )
장회익 선생님께서도 '상대성 이론' 이란 이름이 잘못 붙여졌다며, 절대성 이론이라고 해야 한다고도 예전 세미나에서 말씀하신 기억도 납니다...만, 뉴턴의 절대시간, 절대공간에 반대하는 의미로 '상대성 이론' 이라고 불렀다는 얘기도 있던 것 같습니다. ( 불변성 이론 이라고 부르자는 의견도 있는데, 절대공간, 절대시간보다 휠씬 보수적으로 느껴집니다 )
이렇듯 상대의 반대는 절대인데, 교육에서도 상대평가와 절대평가 가 있습니다.
천문학에서는 별의 밝기를 절대 등급과 겉보기 등급으로 나누니까, 여기는 좀 다르게 쓰는군요.
수학에서는 절대값이라고, 좌표축의 원점부터의 거리를 의미하는데, 절대값의 반대는 좀 애매합니다. 직선 위에서 라면 +,- 부호값이 될텐데, 평면에서는 위치가 여러 개가 가능하니까, 절대값만 얘기합니다.
그리고 상식으로는, '절대' 라는 말이 들어간 것은 꼭 문제를 일으킵니다. 절대로 예외가 없는 규칙은 절대 없다 라던가, 절대 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 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