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고전역학보다 양자역학을 먼저 가르치고 배우기
과학, 특히 물리학의 역사적 전개를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과거의 믿음과 이론과 접근이 옳지 않음이 밝혀지면서 더 세련된 믿음과 이론과 접근이 이를 대치해 온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21세기 과학교육에서 특히 물리학 교육에서는 항상 고전역학 특히 뉴턴의 운동법칙과 그에 관련된 운동의 서술이 맨 처음을 차지합니다. 중등교육은 물론이고 대학 초급과정에서도 대체로 그러합니다. 과연 꼭 그래야 할까요?
흔히 양자역학에 비해 고전역학이 더 직관적이며 경험에 가깝기 때문에 그렇다고들 합니다. '고전역학'이 '양자역학'보다 더 직관적이고 경험에 가깝다고 여기는 것은 오랜 오해입니다. 가령 차라리 더 직관적이고 경험에 가까운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입니다. 이 점은 과학교육학에서 깊이 있게 다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지금 어디에서도 직관적이며 경험에 가까운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을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습니다. 과학사 시간에나 과거의 틀린 접근이라면서 언급할 뿐입니다.
뉴턴 역학 더 나아가 고전역학에서 하필 시간과 공간을 가르고 모든 것을 입자로 환원한 뒤에 그 위치와 운동량(속도)을 '상태'로 삼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가르치기는 쉽지 않습니다. 위치나 속도에 비해 운동량, 에너지 등등의 개념은 그다지 직관적이지 않습니다. 과학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17세기 자연철학(운동량) 또는 19세기 자연철학(에너지의 경우)의 산물입니다. 운동량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을 비판하고 새로운 수학적 자연철학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도입된 것이라 보아야 한다. 14세기에도 임페투스와 코나투스 개념이 논의되긴 했지만, 데카르트의 오개념을 거쳐 뉴턴과 라이프니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운동의 양'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이 정착되었습니다. 에너지 개념은 상당 부분 독일 낭만주의 자연철학(Naturphilosophie)의 산물입니다. 물론 셸링의 신비주의적인 자연철학의 논의가 에너지 개념의 선조였다는 이야기를 물리학자들은 대체로 거부합니다. 그러나 헬름홀츠와 마이어는 명시적으로 낭만주의 자연철학을 인용하고 있고, 토머스 영이 '에너지'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 기존의 vis viva를 대치할 때에도 이미 근본적으로 자연철학적 사유가 녹아 들어 있었습니다.
양자역학은 미시세계를 서술하고 고전역학은 거시세계를 서술한다는 흔한 이분법적 관념도 부적절합니다. 양자역학이라 불리는 물리학 이론을 "상태, 물리량, 측정"의 세 요소로 구성된 수학적 형식체계의 한 형태라고 보면, 일상적 경험세계뿐 아니라 우주 전체에 대해서도 '양자우주론' 같은 것을 만들 수 있습니다. 물리학에 국한한다면 SQUID처럼 아주 큰 대상에 대해서 양자역학적 서술을 해야 하는 경우도 분명히 있습니다.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차이를 "상태, 물리량, 측정"의 세 요소로 대비시키면,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습니다.
* 고전역학: 상태=위상공간의 한 점, 물리량=위상공간을 정의역으로 하는 실수값 함수, 측정=물리량 함수의 치역
* 양자역학: 상태=벡터공간(힐버트 공간)의 한 점, 물리량=벡터공간을 정의역으로 하는 자기수반(에르미트) 연산자, 측정=물리량 연산자의 빛띠분해된 사영연산자와 보른 해석
양자역학의 핵심은 물리량을 표현하는 연산자와 측정을 나타내는 연산자를 구별한다는 데 있습니다. 고전역학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물리량의 값을 결정론적으로 예측할 수 없고 단지 확률서술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초급 양자역학에서 이런 것을 모두 소개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물리학에서 물리량의 역할과 의미를 분명하게 강조하고 이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 양자역학임을 보여주는 식으로 한다면, 처음 배우는 사람들도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초급 수준에서부터 양자역학을 먼저 가르치고 배우기는 쉽지 않겠지만, 중급 수준에서는 고전역학 없이 양자역학에서 시작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입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이러한 접근을 차근차근 시험해 오고 있습니다.
Lautesse, P., Vila Valls, A., Ferlin, F. et al. Teaching Quantum Physics in Upper Secondary School in France: . Science & Education 24, 937–955 (2015). https://doi.org/10.1007/s11191-015-9755-9
Pospiech, G. Philosophy and Quantum Mechanics in Science Teaching. Science & Education 12, 559–571 (2003). https://doi.org/10.1023/A:1025384115480
Lévy-Leblond, J. M., & Balibar, F. (1984). Quantique: rudiments. Paris: InterÉditions/CNRS; Lévy-Leblond, J. M., & Balibar, F. (1990). Quantics: rudiments of quantum physics. Amsterdam: North-Holland Publishing Company.
저는 프랑스의 물리학자/철학자 장-마르크 레비-르블롱(Jean-Marc Lévy-Leblond) 선생님이 서울대에서 초청강연을 했을 때, 운 좋게 바로 옆자리에서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레비-르블롱은 양자역학 교육은 적어도 중급과정에서 시작하는 게 적절하고 유익하다면서 프랑스에서 진행되고 있는 여러 시도들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몇몇 시범학교를 선정하여 고전역학보다 양자역학을 먼저 가르치고 그에 대한 성취를 비교하는 프로젝트였는데, 꽤 긍정적인 결과를 얻었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장회익 선생님의 자연철학처럼 접근한다면 중급과정의 과학교육에서 양자역학을 먼저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고 유익하지 않을까요?
이와 관련하여 1999년 포슈피히의 논문의 내용 일부를 참조하는 것이 도움이 될 듯 합니다.
초심자에게 양자역학을 가르치는 법.
Chris Ferrie (2017). General Relativity for Babies: An Introduction to Einstein's Theory of Relativity and Physics for Babies. (https://amzn.to/3bux7us)
Chris Ferrie, Cara Florance (2018). Nuclear Physics for Babies: A Simple Introduction to the Nucleus of an Atom. (https://www.amazon.com/dp/1492671177)
Chris Ferrie, Julia Kregenow (2018). Astrophysics for Babies: A STEM Book about Space and Astronomy for Little Ones. (https://amzn.to/39NFX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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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자에게 양자역학을 가르치는 법" (2) 위치-운동량 이야기를 꺼내지 말 것. (3) 하이젠베르크 미결정성 관계식은 꺼내지도 말 것. (4) 입자-파동 이중성 어쩌구 하는 이야기를 꺼내지 말 것. (5) 스핀을 말하더라도 '돌고 있는 입자'라고 얘기하지 말 것. (6)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언급하는 것 자체는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그 이야기는 귀류법의 맥락에서 다루어야 한다. // 이런 것들이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데 큰 장벽, 큰 함정들이로군요. (그러면 대중강연, 대중과학책에서 저런 걸 빼면 별로 남는 것이 없을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