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도, 열, 기체법칙의 짧은 역사
지난 번 자연철학 세미나에서 온도의 정의, 열의 정의, 엔트로피의 정의가 순환적이지 않나 하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저는 순환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온도와 열의 의미와 정의는 꽤 혼동스럽기 때문에 그 역사적 흐름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역사적 전개를 놓고 보자면, 열이나 엔트로피의 개념이 다듬어지기 전에 먼저 온도의 개념이 차근차근 정립되었습니다. 이것은 온도계라는 매우 특별한 장치와 관련됩니다. 온도를 숫자로 대응시킨다면, 기준을 설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령 물의 끓는점과 어는점이라든가 사람의 체온 같은 것이 그런 기준 역할을 합니다. 일단 온도의 개념이 자리를 잡은 뒤에 '비열'이라 등장하여 온도와 열의 관계를 밝힙니다. 그리고 열와 온도로부터 엔트로피 개념이 고안됩니다. 그러고 나면 비교적 자연스럽게 엔트로피를 내부에너지로 미분한 도함수(미분계수)의 역수와 온도를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그 뒤에 엔트로피의 정체를 밝히는 과정에서 이를 특정 거시상태에 대응하는 미시상태의 수와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열역학과 통계역학의 역사를 서술한 책은 그리 많지 않지만, 아래의 책에 있는 개관이 유익합니다.
Ingo Müller (2007). A History of Thermodynamics: The Doctrine of Energy and Entropy. Springer. (https://doi.org/10.1007/978-3-540-46227-9)
Dilip Kondepudi, Ilya Prigogine (2015). Modern Thermodynamics From Heat Engines to Dissipative Structures. Wiley. (https://amzn.to/3PU74fY)
과학사에서는 기체에 대한 자연철학적 탐구가 대략 얀 밥티스트 판 헬몬트(Jan-Baptist van Helmont 1577-1644)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http://scihi.org/jan-baptist-van-helmont-chemistry/
헬몬트는 '가스 gas'라는 말을 만들어 처음 사용했고, 이산화탄소를 비롯하여 여러 기체를 만들어 분류했습니다. 헬몬트는 파라켈수스 이후의 약화학(iatrochemistry)의 계보를 잇는 일종의 알케미 연구자로 여겨집니다.
뉴턴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1627-1691)은 1660년 "New Experiments Physico-mechanical, Touching the Spring of the Air and Its Effects"(링크)에서 기체의 부피가 압력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보일은 <회의적 화학자 The Sceptical Chymist>(1661)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 파라켈수스-헬몬트 계보의 화학을 모두 비판하면서 연금술적인 화학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프랑스의 에드메 마리요트(Edme Mariotte 1620?-1684)도 보일과 같은 기체법칙을 발표했습니다. 프랑스의 자크 샤를(Jacques Charles 1746-1823)은 압력이 일정하게 유지될 때 기체의 부피가 온도에 비례함을 밝혔습니다.
여기에 아메데오 아보가드로(Amedeo Avogadro 1776–1856)나 조제프 루이 게-뤼삭(Joseph Louis Gay-Lussac 1778-1850) 등이 밝혀낸 것까지 모아서 기체 방정식 $$ pV=nRT$$를 얻을 수 있습니다.
18세기 유럽은 기체의 시대라고 할 만큼 다양한 기체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기체의 온도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다니엘 가브리엘 파렌하이트(Daniel Gabriel Fahrenheit 1686-1736)가 1714년에 처음 수은 온도계를 만들었습니다. 온도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온도에 따라 스케일이 달라지게 하는 물리량을 잘 선택해야 합니다. 아직 샤를의 법칙이 나오기 전부터 물이나 알콜의 부피가 온도와 비례할 것이라는 생각이 퍼졌습니다. 실질적인 관계를 밝히기 전에 그냥 부피가 빠르게 커지거나 작아지는 물질을 선택하여 그 물질의 팽창비율로 온도계의 기준을 삼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파렌하이트의 접근이었습니다. 파렌하이트는 수은을 선택했습니다. 유리관을 길게 만든 뒤 거기에 수은을 집어넣고 밀봉하는 겁니다. 온도가 올라가면 수은이 팽창하여 수은기둥이 길어집니다. 온도가 내려가면 다시 수은기둥이 짧아집니다.
온도의 값을 숫자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이 기준이 두 개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파렌하이트는 바닷물이 어는 온도를 0으로 놓고 사람의 체온을 90으로 놓는 기준을 선택했습니다. (지금의 정의는 좀 다릅니다. 사람의 체온은 화씨 96도이고, 바닷물 대신 소금과 염화암모늄의 용액인 고염수(브린)가 어는 점으로 합니다.) '화씨(華氏)'라는 말이 '파렌하이트'의 한자음역 華倫海特의 첫 글자에 '씨'를 붙인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Fahrenheit
스웨덴의 안데르스 셀시우스(Anders Celsius 1701-1744)는 물의 어는점을 0도로 하고 끓는점을 100도로 하는 새로운 기준점을 제시했습니다. 이를 섭씨(攝氏)온도라 하는 것은 '셀시우스'의 한자음역 攝爾修斯에서 첫 글자를 딴 것입니다. 이 외에 레오뮈르(Réaumur)의 한자음역을 딴 열씨列氏 온도도 있습니다.
이런 여러 온도 스케일들은 고정점이 두 개 필요합니다. 이와 달리 윌리엄 톰슨(켈빈)이 제안은 특별합니다. 카르노 기관의 열효율에 대한 고찰을 바탕으로 절대영도를 정의한 뒤, 섭씨 온도를 가져옵니다. 이렇게 하면 절대영도는 섭씨 -273도가 됩니다. 더 정확한 최근의 정의로는 섭씨 -273.15도가 0켈빈입니다.
William Thomson (1848). On an Absolute Thermometric Scale founded on Carnot's Theory of the Motive Power of Heat, and calculated from Regnault's Observation. Philosophical Magazine October 1848.
https://en.wikipedia.org/wiki/Kelvin
1967년까지는 °C나 °F처럼 °K라고 표기했는데, 1967/68의 국제도량형회의에서 '도(degree)'를 빼고 그냥 K라고 표기하고 읽을 때에는 '켈빈(kelvin)'으로 읽기로 했습니다.
온도를 온도계로 잰다는 관념은 생각보다 더 실질적이고 실용적입니다. 온도의 궁극적 의미를 밝히기에 앞서 온도에 따라 달라지는 물리량(가령 부피나 압력이나 전류)를 선택하고 이를 이용하여 온도를 재기로 약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도를 이렇게 정의하는 것은 퍼시 브리지먼이 주장한 조작주의(operationalism)와 연결됩니다. 브리지먼 자신은 물리량의 정의를 일련의 경험적 실질적 조작들을 통해 규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조작주의’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러가면서 철학적 조류로 여기는 것을 불편해 하고 어떤 면에서 반대하기도 했지만, 여하간 물리량이나 물리학적 개념을 조작을 통해서 규정해야 한다는 조작주의는 영미 과학철학 또는 물리철학에서 매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약간의 논란이 있지만, 온도는 여전히 온도계로 측정하는 양으로 약속한다고 말해도 됩니다. 실제의 온도계로 측정되는 물리량은 실상 수은이나 알콜의 부피라든가 전위라든가 압력이지만, 그것이 곧 온도와 일정한 관계에 있다고 가정하고 주장함으로써 온도의 조작주의적 정의가 성립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온도와 열을 연결하는 것은 조제프 블랙이 밝혀낸 비열(比熱 specific heat)의 개념입니다. 이것은 물질에 따라 그 구성방식과 무관하게 온도의 변화와 열의 양의 변화가 비례한다는 믿음입니다. 블랙을 비롯하여 18세기의 자연철학자들은 뜨거움이나 차가움과 관련된 열이라 부르는 어떤 것이 일종의 물질적인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를 저울 같은 것으로 확인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를 독특하게도 '무게 없는 유체(imponderable fluids)'로 여겼습니다. 무게가 없다는 말 대신에 단순하게 '신묘한 유체(subtle fluids)'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열 또는 뜨거움/차가움과 관련된 무게 없는 유체에는 '칼로릭(caloric)'이라는 특별한 이름을 붙였습니다. 한국어로는 '열소(熱素)'라고도 합니다. 비슷하게 빛과 관련된 무게 없는 유체를 '에테르(aether)'라 부르고, 전기나 자기와 관련된 것은 '에플루비움(effluvium)'이라 불렀습니다. 처음 에너지 보존법칙을 제시하고 증기기관과 같은 열기관의 원리를 해명한 사디 카르노의 <불의 동력에 관한 논고>에서도 열은 모두 열소(칼로릭) 개념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열량이란 다름 아니라 열소(칼로릭)의 양을 가리킵니다. 지금도 열량의 단위는 '칼로리'를 써서 이러한 과거의 역사를 잇고 있습니다. 직관적으로도 열의 흐름도 열소의 흐름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 점에서 루돌프 클라우지우스가 1857년에 발표한 논문의 제목을 "열이라 부르는 운동형태에 관하여(Über die Art der Bewegung, welche für Wärme nennen)"이라 붙인 것은 열이 열소가 아니라 운동의 한 형태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더 상세한 것은 "열역학, 기체분자운동론, 통계역학의 짧은 소개" 참조)
블랙의 논의를 요약하면 $$\Delta Q = c m \Delta T$$와 같이 쓸 수 있습니다. 열 또는 열량의 차이란 다름 아니라 온도의 차이에 비례하는 것이고 그 비례계수는 물질의 종류와 질량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블랙의 논의에서 열의 양과 온도는 비례하는 것이므로 실질적으로 동등한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도 열과 온도를 혼동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지만, 열소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이 두 개념이 동등하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는 것은 아닙니다.
블랙은 열소 개념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공식을 도입한 셈이 되었지만, 현대의 정립된 열역학에서 보면 이 관계식은 거시상태변수인 온도, 압력, 부피를 내부에너지와 연결시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U = U(V, T)$$에 해당하며, 이를 구성방정식이라 부릅니다. 이상기체는 내부에너지가 부피와 무관하게 온도의 함수로만 주어지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즉 $$U= U(T)$$가 됩니다.
클라우지우스는 이러한 열소 개념에 기반을 둔 열과 온도의 개념을 비판하고 새롭게 확장하여 $$T = \frac{\partial U}{\partial S}$$ 또는 $$\frac{1}{T}=\frac{\partial S}{\partial U}$$라는 관계식을 제안했습니다. 여기에서는 열소의 양이란 개념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단지 엔트로피라는 새로운 개념이 들어오고 그 변화율을 온도로 보는 것입니다.
이 정의는 실상 에너지 보존법칙에 해당하는 열역학 첫째 법칙을 $$ T dS = dU + p dV$$라 쓰고 나면 자명하게 유도되는 것입니다. 즉 $$ dS= \frac{1}{T} dU + \frac{p}{T}dV$$임을 주장하면 $$dS = \left( \frac{\partial S}{\partial U}\right)_V dU + \left( \frac{\partial S}{\partial V}\right)_U dV$$이므로 $$ \frac{1}{T} = \left( \frac{\partial S}{\partial U}\right)_V , \quad \frac{p}{T}= \left( \frac{\partial S}{\partial V}\right)_U$$가 되어야 합니다. 이 때 $S = S(U, V)$와 같이 엔트로피는 내부에너지와 부피의 함수로 설정됩니다.
마찬가지로 $$ dU = T dS - p dV$$임을 주장한다면, $U (S, V)$에 대하여 $$dU = \left( \frac{\partial U}{\partial S}\right)_V dS+ \left( \frac{\partial U}{\partial V}\right)_S dV$$이므로, $$ T = \left( \frac{\partial U}{\partial S}\right)_V , \quad p= - \left( \frac{\partial U}{\partial V}\right)_S$$가 되어야 합니다.
요컨대, 이상기체의 평형열역학은 가령 다음 세 방정식으로 완결적으로 규정됩니다. $$ pV = n R T $$ $$U = U(T)$$ $$ T dS = dU + p dV$$ 방정식은 세 개뿐인데 변수는 $V, T, p, S, U$로 다섯 개라서 이 방정식은 풀리지 않기 때문에 추가적인 가정을 덧붙여야 합니다.
그러나 온도의 정의가 순환적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온도는 온도계와 온도 스케일을 정의하고 이에 따라 온도계로 측정하는 것이라 정의합니다. 기체의 거시상태는 온도와 부피 외에 압력까지 정해주면 $(p, V, T)$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이 거시상태를 가령 이상기체에 적용하면 에너지 보존법칙까지 끌어들여 거시상태 변수들과 내부에너지 및 엔트로피 사이의 관계를 유도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온도와 내부에너지 및 엔트로피 사이의 새로운 관계는 온도에 대한 기존의 조작주의적 정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정의가 아니라 정합성을 나타내는 관계식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할 것입니다.
문제점이 있는 듯 보이는 것은 클라우지우스의 논의에 바탕을 둔 열역학적 관계식에 볼츠만이 주장한 경우의 수로서의 엔트로피를 대입할 때입니다. 볼츠만에게 엔트로피는 특정 거시상태를 구성하는 여러 미시상태의 수를 로그값으로 환산한 것으로 정의됩니다. 즉 $$S=\log W$$입니다. (논의를 선명하게 하기 위해 $k_B = 1$인 단위계를 쓰기로 합니다. 이것은 에너지를 온도의 단위와 같은 것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frac{1}{T} =\frac{\partial S}{\partial U} = \frac{\partial \log W}{\partial U} = \frac{1}{W}\frac{\partial W}{\partial U}$$가 됩니다. 즉 약간 복잡해지긴 했지만, 특정 거시상태를 구성하는 미시상태의 수가 내부에너지의 변화에 따라 민감하게 또는 둔감하게 변화하는 비율이 온도와 관련된다고 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이렇게 해석되는 온도는 맨 처음에 조작적으로 정의된 것처럼 온도계로 정해지는 그 온도와 같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정의가 순환적으로 이루어진다기보다는 여러 규정과 정의가 충돌하지 않도록 조정된다고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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