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질문] 미시상태-거시상태의 구분과 실재론 논쟁
통계역학에 기반을 둔 자연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 구분이 미시상태와 거시상태의 구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열통계역학에서 거시상태는 부피, 압력, 온도와 같이 실험실에서 장비를 이용하여 직접 측정하고 확인할 수 있는 양을 기반으로 합니다. 이와 달리 미시상태는, 기체가 근본적으로 아주 많은 수(아보가드로 수)의 분자 또는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한 뒤, 이 분자 또는 입자가 뉴턴역학(더 정확하게는 해밀턴 역학)에서 규정하는 [위치와 운동량]의 값들을 기반으로 합니다. 이 미시상태들 전체의 집합을 위상공간(phase space)라 부르고, 실제의 계산은 위상공간에서의 다양한 계산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매우 핵심적이면서도 사실상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한 가정이 들어갑니다. 즉 기체라는 것은 아주 많은 수의 분자 또는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가정입니다. 이것이 원자론의 가정입니다. 에른스트 마흐가 루트비히 볼츠만을 혹독하게 비판했던 이유도 원자론의 가정을 도입함으로써 자연철학(더 좁게는 물리학)에 형이상학적 요소를 도입해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미시상태/거시상태의 구분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논쟁이 과학철학에서 소위 실재론 논쟁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일련의 철학자들이 과학이론에서 이론적 용어(개념)와 경험적 용어(개념)을 구별하고, 이론적 용어(개념)은 실질적으로 꼭 하나의 실체로서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 용어(개념)을 설명하고 해명하기 위한 일종의 도구라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에너지, 엔트로피, 원자, 분자, 빅뱅, 블랙홀, 유전자, 지질학적 판 같은 것이 정말 어딘가에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관측할 수 있는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모형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칭하여 '도구주의 instrumentalism'라고 흔히 부르고, 약간 더 강조하기 위해 '반실재론 anti-realism'이라고도 부릅니다. 이와 달리 물리학을 비롯하여 자연과학에서 논의되는 이론적 용어(개념)가 세계 속에 정말로 있는 것을 반영한 것이라고 믿는 입장이 과학실재론(scientific realism)입니다. 물론 더 정교하게 논의하자면, 이런 단순한 도식이 부적절한 면도 있습니다.
(출처: philosophy in figures https://bit.ly/3suqoGy )
하지만 더 생각해 보면,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구별하는 것 자체는 단지 확률계산에서 "더 세밀하게 나누어 세는 것"과 "더 뭉뚱그려 세는 것"의 관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윷놀이의 예에서도 이 점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통계역학의 경우에는 그 '윷'에 해당하는 원자/분자/입자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근본적으로 없기 때문에 이렇게 미시상태를 세고 다루는 것에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물리학자라면 원자/분자/입자의 미시상태를 계산하는 것에 거의 불만을 가지지 않겠지만, 자연철학자라면 그런 것이 실체로서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를 골몰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미시상태-거시상태의 구분이라는 문제는 여러 면에서 실재론-반실재론 논쟁과 깊이 맞물려 있습니다. 원자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긴 하는 것일까요? 또는 원자/분자/입자의 실재성 문제와 전혀 별개로 미시상태-거시상태의 구분은 항상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옳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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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상태에 속하는 현상이 실험과 관측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거시상태로 옮겨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나요? 그리고 실재론과 반실재론 중 어느 쪽이 우세한지 궁금합니다. 실험을 하는 과학자들은 실재론자여야 하지않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2. 실재론과 반실재론이라고 대략 둘로 나누기도 하지만, 위의 글에 있는 그림처럼 더 세분화할 수 있고, 실재론도 '존재자 실재론(entity realism)', '구조실재론(structural realism)', '비표상 실재론(nonrepresentational realism)', '추측 실재론(inferential realism)', '약한 실재론(weak realism)', '수렴적 실재론(convergent realism)' 등으로 아주 다양하고 복잡한 주장들이 오랜 시간 동안 제기되었습니다. 반실재론이라 부르는 주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질문으로 올린 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실재론' 논쟁이 아니라 '과학 실재론 논쟁'입니다. 보통의 '실재론' 문제는 철학 전반에서 근본적으로 실체, 실재, 물자체, 존재 등에 대한 심오한 논쟁인 반면, 과학실재론 논쟁은 과학이론에서 제기되는 개념이나 용어의 실재성에 대한 것이어서 훨씬 더 좁습니다. 후자의 좁은 의미로 볼 때, 과학자의 대부분은 소박한 의미로 과학실재론을 지지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험전공인가 이론전공인가와 무관하게 말입니다. 자신이 연구하는 대상이 일종의 소설이라거나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아무래도 흥미와 열정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연구에 매진하는 과학자들은 대개 철학적 논의, 특히 과학실재론 논쟁 같은 것을 탁상공론으로 여기면서 무시하거나 비판합니다. 즉 실재론도 반실재론도 지지하지 않고 그런 문제에 아예 관심을 꺼 버립니다. 저명한 과학자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많았습니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19세기 내지 20세기 초 유럽의 과학이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쪽으로 주도권이 옮겨가면서 그런 경향이 많이 커진 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1970년대에 "Shut up and calculate!" 같은 말까지 나오는 분위기가 된 셈입니다.
(제 개인적 경험을 침소봉대하면 안 되겠지만, 물리학과에 다닐 때 이런 질문을 하면 물리학과 선생님들은 질색을 하거나 심지어 모욕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할 시간에 방정식을 어떻게 풀 것인가 고민하라는 식이었죠.)
그렇다면 '과학자에게 과학철학이 필요한가?'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저는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학자에게야말로 철학적 논의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철학 일반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과학철학 즉 과학 자체에 대한 여러 철학적 논의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과학을 제대로 공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넓게 과학이라고 부르는 활동은 다른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전문성을 가지고 특별한 대상을 매우 정교한 새 기법과 접근으로 탐구하는 것인데, 자신이 공부하는 대상과 연구 결과를 무비판적으로 "진리의 발견"으로 여기게 되면, 결국 과학적 탐구의 본말이 전도됩니다. 그래서 흔히 이야기되는 '과학의 발전'이란 관념이 생깁니다. 과학자들은 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평생의 노고를 바치는 일종의 노예가 됩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과학을 발전시키는가?" 묻는다면 과학탐구의 극심한 소외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과학적 탐구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높은 연봉과 사회적 지위와 명예와 편안한 직장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 되어 버립니다.
찰스 다윈의 새로운 이론을 열심히 대변하고 알리던 토머스 헉슬리에게 어느 기자가 1830년대에 처음 신조어로 탄생한 '과학자(scientist)'인가 하고 물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헉슬리는 매우 불쾌해 하면서 자신은 그런 저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헉슬리는 자연에 대한 숭고한 탐구를 이용하여 재물과 사회적 지위를 얻으려 하는 새로운 '과학자(scientist)'라는 집단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요즘 21세기의 대학에서는 과학자들에게 창업을 강조하고 특허권을 선취하는 데 크게 관심을 갖게 하고 있으니 200년 사이에 참 많은 변화가 있는 셈입니다.
과학철학이든 일반적인 철학이든 그러한 성찰을 늘 하지 않는 과학자는 두 가지 위험성에 처합니다. 하나는 과학탐구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다 보니 부와 사회적 지위를 추구하게 되고 그 와중에 많은 부정행위의 유혹에 쉽게 노출됩니다. 다른 위험은 자신이 발견한 것을 절대화하거나 진리로 여김으로써 다원적이고 풍부한 논의와 탐구를 가로막기 쉽습니다.
"철학을 잊은 과학"은 황우석 같은 연구부정으로 쉽게 이어질 수도 있고, 맨해턴 계획처럼 엄청난 살상무기를 거리낌 없이 만들게 되기도 할 것입니다.
무척 중요하지만 동시에 매우 어려운 질문을 주셨습니다.
1. 통계역학이라 부르는 물리학의 한 이론에서 '미시상태'는 가장 최소 단위가 되는 상태 서술을 가리킵니다. 고전역학에서는 모든 구성입자들의 위치와 운동량이 되고 양자역학에서는 슈뢰딩거 방정식에 들어가는 상태함수(파동함수)가 됩니다. 거시 상태는 대개 "온도, 압력, 부피" 이렇게 세 가지로 서술됩니다.
그렇게 보면 "미시 상태에 속하는 현상"이란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많은 수의 입자(분자, 원자)로 구성된 대상의 '미시상태'는 실험과 관측 기술이 발전한다 해도 경험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개별 분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모두 알 수 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값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런 것은 원리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미시상태/거시상태의 구별은 통계역학에서 "더 세분화된 서술"과 "더 뭉뚱그린 서술"의 구별과 통합니다. 어디까지를 같다고 하고 또 어디까지를 다르다고 말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스케일의 선택에 지나지 않기도 합니다. 아주 잘게 쪼개서 다 다르다고 하거나 적당히 뭉뚱그려서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식물의 분류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종(species)'이라는 이름으로 아주 세분화하여 나눌 수도 있고, 비슷한 종들을 묶어서 '속(genus)'으로, 다시 이를 묶어서 '과(family)', '목(order)', '강(class)', '문(phylum)', '계(kingdom)' 등으로 뭉뚱그릴 수도 있습니다. 물리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보면 미시상태/거시상태의 구별은 서술하는 사람의 선택에 따라 임의적으로 바뀔 수도 있는 셈입니다. 이 경우에는 관측 기술 등이 발달함에 따라 과거에는 뭉뚱그려 보던 것을 더 세분화하여 볼 수도 있게 됩니다.
질문하신 의도를 "미시 상태에 속한 현상"이라기보다는 "아주 작은 미시세계에 속한 현상"이라고 바꾸어 생각한다면, 당연히 관측 기술 등이 발달함에 따라 더 작은 것까지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