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꼽문] 책새벽-화/금. 『세계철학사 2』 5장.하늘과 땅 사이에서. (p.301-401)
녹색아카데미 온라인 책읽기 모임 '책새벽-화/금' 시즌3에서는 현재 『세계철학사 2 - 아시아세계의 철학』(이정우. 2017. 길)을 읽고 있습니다.
5장. 하늘과 땅 사이에서
§1. 전쟁하는 국가들 (302)
§2. 학파들의 시대 (315)
- 두 극단: 병가와 농가
- 논리와 언어의 분석
- 음양의 형이상학
§3. 맹자와 유교 도덕형이상학의 정초 (331)
- 유가 정치철학의 정초: 인정(仁政)
- 유가적 도덕형이상학의 정초: 성선(性善)
§4. 장자와 ‘천하’질서로부터의 탈주 (356)
- 허(虛)의 존재론
- 지인-되기
§5. 종합적 사유의 출현 (378)
- 유가적 종합
- 도가적 종합
- 법가적 종합
§1. 전쟁하는 국가들 (302)
p.302-303.
춘추시대에 들어와 청동기로부터 철기로의 이행이 이루어진다. … 철기를 사용한 농업 발전은 생산력을 크게 증가시켰고 … 철제 무기의 대량생산이 군대의 조직과 전쟁의 양상을 크게 바꾸어놓은 것이다. 이 흐름은 춘추에서 전국으로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상공업에서의 생산력 또한 비약적으로 커지게 된다. … 국가들 사이의 무역이 활성화되고, 이 과정을 통해 중원의 폐쇄적 경계들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 이 과정은 또한 화폐경제의 발달을 동반했다. … 화폐의 발달은 지역적 특수성을 수적인 등질성의 차원으로 환원하는 역할을 한다. … ‘전국 규모의 유통망’이 등장 … 경제력 있는 사람들이 노역에서 해방되어 국가에의 종속으로부터 일정 정도 풀려나기에 이른다.
p.305-306.
… 사회적 변화는 늘 그렇듯이 계급 분화, 계층상의 변화를 가져왔다. … 서주 후기부터 이런 농촌 공동체들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또 종교적 틀이 와해되면서 기존의 혈연적 - 지역적 연대성이 무너지는 거대한 변화가 도래했다. …
…
예전에 원칙적으로 군주의 소유였던 토지가 매매의 대상이 되고, 땅을 ‘소유’한다는 관념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 실패한 농민은 소작농이 되거나 아예 유민이 되기도 했다. 전국시대가 되면 이런 유민들이 조직되기에 이르고, 이는 마침내 농민반란으로 이어진다.
이 시대를 이끌어간 새로운 주인공은 ‘사’ 계층이었다. 이미 공자가 씨앗을 뿌려놓았지만, ‘사’ 계층은 단순한 하급 관리가 아니라 개인의 능력과 노력을 통해 시대를 주도하는 계층으로 변모했다. … 군주와 신하의 관계도 … (거의 ‘계약’에 가까운) 이해관계에서의 상호 필요에 의해서 결합되는 경우가 많았다.
p.312.
… 드디어 붓과 먹이 사용되고, 죽간, 목간, 백서 등이 나타나게 된다. 이런 토대 위에서 마침내 ‘책’이라는 것이 등장했다. … 책이 탄생은 사상과 문화의 핵심 인프라가 탄생했음을 뜻한다. 또 하나 매우 중요한 것은 춘추시대 이래 점차 공통의 문자들이 형성되면서 중원 전체에 걸쳐 사상적 의사소통이 가능해져갔다 … 이것이 ‘제자백가’의 언어적 토대가 되었다.
p.312.
전국시대에 일어난 중요한 한 변화는 사상과 교육의 일반화이다. 물론 분명한 한계가 있는 일반화였지만, 예전에 특권계틍에 국한되었던 교육과 문화가 일정 범위의 독서층으로 확장되고 사교육이 확대되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 점에서 전국시대는 지중해세계에서의 소피스트들의 시대와 통한다.
이런 흐름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 공자이다. 공자야말로 교육을 일반화한 인물이며, '지식인'이라는 개념/이미지를 만들어낸 인물이며, '학파', '스승과 제자'라는 개념/이미지를 확고하게 창조해낸 인물이다. 아울러 묵자의 능력본위 사상은 귀족 계층을 무너뜨리고 사 계층 나아가 때로는 서인 계층이 사회를 주도해나갈 수 있는 사상적 기저가 되었다.
p.313. 전국시대는 지식인들이 특히 중시되던 시대였다. 모든 국가들이 총력전 체제로 접어든 시대, 결국 부국강병이 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리라는 것이 누구의 눈에도 분명해 보였던 시대, 이 시대에 지식인들의 머리에서 나오는 '전략'은 10만 군사를 능가하는 힘이 있었다. 현대적 의미와는 뉘앙스가 많이 다르지만, '지식인'들의 몸값이 이토록 높았던 시대는 다시 없었을 것이다.
이 시대에 특히 중요했던 것은 외교였다. 작은 국가들이 하나씩 멸망하고 큰 국가들이 서서히 천하통일을 꿈꾸던 시절, 또 더 중요하게는 어느 한 국가도 다른 여섯 국가에 맞서 싸우기는 어려웠던 시절, 결국 외교의 성패야말로 한 국가의 존망을 좌우하는 갈림길이었기 때문이다.
p.314.
… 전국시대에 이루어진 거대한 변환들 중 하나는 곧 논리와 언어에 대한 관심이다. 담론계의 비약적인 활성화는 곧 어떤 담론이 진리인가의 문제를 비롯해 논리와 언어의 문제에 대한 반성을 낳을 수 밖에 없었다.
…
전국시대에 이루어진 가장 역설적인 결과는 ‘무’에 대한 ‘문’의 우위였다. 이 시대는 전쟁의 시대였지만, 오히려 무를 지배하는 것은 문이라는 생각이 확립되었던 것이다. 예컨대 초기의 삼진(한, 위, 조)은 ‘군사봉건제’의 형태를 취했으나 결국 문인관료가 지배하는 체제로 바뀌게 된다.
참고할 수 있는 자료
*302. 도철무늬에 대한 기사 (한겨레신문)
“마오쩌둥 ‘쇠붙이 모으기 운동’으로 발견된 중국 고대 청동기들” 노형석. 2021. 11. 9. 한겨레신문.
*”청동 예기, 신을 위한 그릇” 2021. 국립중앙박물관.
*도철
https://ko.wikipedia.org/wiki/도철
*쇠뇌
https://ko.m.wikipedia.org/wiki/쇠뇌
§2. 학파들의 시대 (315)
p.312.
전국시대가 되면 제후들 자신들이 나서서 학문을 대대적으로 지원하는 현상이 생겨난다. … 특히 제 위왕은 직하에 거대한 학궁—지금으로 말하면 연구소들의 클러스터—을 만들어 많은 학자들을 초빙해 연구케 했다. 위 문후만 해도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했지만, 직하에서는 순수 철학적인 논의를 포함하는 종합적 연구가 이루어지게 된다. … 맹자와 순자도 이 공간에서 활동했다.
p.322.
공손룡의 논변들은 소피스트들(의) … 농변들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공손룡에게 소피스트들과 같은 의도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의 논변들은 아직 문법, 논리학, 언어철학, 수사학 등이 정리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하나의 모색 … 반면 소피스트들은 그들 자신들이 바로 이런 담론들을 정초한 자들 … 공손룡의 논변들은 언어라는 존재에 처음 눈뜬 인간이 처했던 어려움이라 해야 할 것이다.
p.326-327.
전근대 사상들이 가지는 일반적인 특징들 중 하나는 자연사와 인간사를 분절해 보기보다는 하나로 연결해 보았다는 점에 있다. 이른바 ‘천인감응’의 생각은 일찍부터 나타났지만, 이런 생각이 음양의 형이상학으로 체계화된 것은 전국시대였다.
…
흔히 동북아의 역사형이상학을 ‘순환적 세계관’이라 할 때, 이는 곧 전국시대에 추연을 중심으로 형성된 음양가의 생각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3. 맹자와 유교 도덕형이상학의 정초 (331)
p.333.
유학은 바로 이 ‘생활의 코드’를 만들어냄으로써, 그것이 현실적인 힘을 얻기 이전에 이미 동북아적 삶을 지배할 수 있는 근간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상이든 그것이 관・혼・상・제를 장악하는 순간 삶의 근간을 장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순간 그것은 철학이기를 그치고 코드/기술이 되어버리는 것 또한 사실이다.
p.333.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코드는 지배자가 누구로 교체되든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나든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것은 흐르는 강물 아래에서 매우 천천히 변해가는 모래, 진흙과 같은 것이다. 유학은 바로 이 생활의 코드를 만들어냄으로써 그것이 현실적인 힘을 얻기 이전에 이미 동북아적 삶을 지배하는 근간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상이든 그것이 관혼상제를 장악하는 순간 삶의 근간을 장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순간 그것은 철학이기를 그치고 코드/기술이 되어버리는 것 또한 사실이다.
p.336. 각주 45)
맹자의 논변(argument)은 논리적 분석에만 치중했던 명가의 논변과 구분되며, 정치적 전략의 도구로서만 실행되었던 종횡가의 논변과도 구분된다. 맹자의 사유 전개는 당대 특유의 논변적 성격을 띠고 있지만, 그는 그것을 자체로서 추구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맹자는 정교한 논변들 자체를 즐겼던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단지 ‘부득이’한 것이었을 뿐이다. 또 맹자는 논변을 철학적 목적이 아닌 정치적 전술의 목적에 복속시키지도 않았다. …
p.339.
맹자가 볼 때 부국강병의 길과 천하통일의 길로 대변되는 패도의 길은 연목구어보다 못한 일이다. 연목구어는 단순히 헛일을 한 것에 불과하지만, 패도의 길은 재앙을 부를 뿐이기 때문이다. 부국강병의 길은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쥐어짜는 길이며, 천하통일의 길은 헛된 망상에 집착하는 길이다.
백성들을 총동원하는 잔인한 체제가 아니라 백성들에게 진정 인정을 베푸는 체제만이 그들의 마음을 살 수 있으며, 천하통일의 헛된 망상을 꿈꾸기보다는 인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끄는 정치야말로 한 국가의 장래를 보장할 수 있는 것이다.
p.341.
맹자 제 선왕께 가로되, “왕의 신하들 중 누군가가 자기 처자를 친구에게 맡기고 초나라에 다녀오니, 처자가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있엇습니다. 그럴 때 그 친구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 선왕 답하기를, “그런 신하라면 내쳐버리겠습니다.”
맹자 가로되, “만일 높은 관리/장수가 아래 관리/장수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면, 그 관리/장수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 선왕 답하기를, “그야 물론 파면해버리겠습니다.”
맹자 가로되, “그렇다면 나라 전체의 정치가 엉망이라면 그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왕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딴청을 부렸다. (「양혜왕 하」)
(여기부터 2024년 5월 9일 업데이트입니다.)
p.343.
맹자가 떠나고자 할 때 제 선왕이 찾아와 붙들었으나, 맹자는 “불감청이 고소원(不敢請而固所願)”(오래도록 말 꺼내지 못했으나 이미 굳어진 마음입니다)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채 떠난다.
p.344-345.
맹자적 도덕형이상학의 출발점은 도덕의 ‘실마리’라는 개념이다. 도덕의 완성태를 논하기 이전에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현실적인 실마리를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 제선왕이 … 소를 불쌍히 여겨 구해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맹자는 제 선왕에게서 ‘인’의 실마리를 읽어냈다.
맹자는 인간에는 누구나 도덕적 존재가 될 수 있는 실마리가 발견된다고 믿었다. … 그의 지론인 ‘성선’이 성립하려면 모든 인간의 평등 — 물론 현실적 평등이 아니라 도덕적 차원에서의 평등 — 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p.346-347.
이와 같이 도덕적 능력으로서의 ‘심’을 강조하고 있지만, 맹자에게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 하나는 그가 이 개념을 ‘기’ 개념과 연계해 이해한다는 점이다. ‘심’ 개념과 더불어 ‘기’ 개념 역시 전국시대에 들어 일반적인 논의 대상이 되며, 특히 맹자의 경우 도덕적 맥락에서의 ‘심’ 개념이 ‘기’ 개념과 연계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심’과 ‘기’를 잇는 매개 개념은 ‘지(志)’이다.
p.353.
맹자는 고자의 ‘본성’ 차원의 주장을 ‘성질’ 차원의 주장으로 바꾼 다음 다시 ‘본성’ 차원으로 내려가는 존재론적 층위에서의 변환을 통해서, 결국 본성이란 표면적인 성질성의 공통점이 아니라 심층적인 고유함을 통해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며 인간 본성의 고유함을 함축적으로 역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자가 생각하는 본성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식색, 사람으로 말하면 “음식남녀”이다.
§4. 장자와 '천하'질서로부터의 탈주
p.356-357.
맹자가 오로지 삶을 사유하려 했다면, 장자는 삶의 저편까지도 사유하려 했다. … 삶의 힘겨움에 대한 양자의 이해도 다르다. 맹자에게 이 힘겨움은 매우 구체적인 정치적 상황들, 민중들의 헐벗은 삶에서 발견된다면, 장자의 경우 그 어떤 삶이든 띠게 되는 비극적 성격에서 발견된다.
“잠잘 때면 꿈속의 영혼이 헤매고, 깨어나면 온간 외물들이 심신을 괴롭힌다.
…
하기야 밤낮으로 이런 변화가 계속되니, 어딘가 그 유래는 있을 터이지, 이런 감정들이 없다면야 내가 어디 있겠고 또 내가 없다면 저런 감정들이 어디 있겠냐만, … 세상의 위대한 조화 분명하나 그 신묘함 손에 잡을 길이 없고, 만물의 천변만화야 뚜렷하지만 그 이치 또한 닿을 길 없네.
…
평생토록 뼈가 빠지게 일해도 이룬 것도 없이 피곤함만 쌓이고 …
…
몸이 흩어지면 마음도 흩어질 것이니 애달프구나. 인생이란 참으로 이렇게 어두운 것인가. 아니면 나만 홀로 어둡고, 남들은 어둡지 않은 것인가.(「제물론」)
p.358.
도에 비추어 각종 미망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이명(以明)’이라 한다. 어떤 경지가 이명의 경지인가. 존재론적 도그마를 추구하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본다. 개별자들이 존재하는 그만큼 ‘세계’가 존재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저편’과 ‘이편’의 구도에 서게 된다. ...논쟁에서 한쪽이 맞으면 한쪽은 틀리게 되고, 전쟁에서 한쪽이 살면 한쪽은 죽게 된다.... 이명의 경지는 바로 이런 상대적 차원을 벗어난 경지, 그래서 거기에서는 이쪽과 저쪽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경지이다. 이것이 ‘도’의 경지이다.
그렇다면 이 도의 경지는 모든 상대성을 벗어난 차원에서 그 모두를 굽어보는 위대한 경지인가? 아니다. 인간은 도 자체가 될 수 없기에 이러한 굽어봄은 불가능하다. 장자는 이와 같은 독단적인 초월성을 거부한다. 이명의 경지에 들기 위해서는 어떤 초월적 차원에 올라야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재적 차원에서 어떤 아무-것도-아님의 위치에 서야 한다. ..장자는 이곳을 ‘도추(道樞)’, 도의 지도리라고 부른다.
p.365~ 366.
장자의 철학은 지식을 다투는 철학이 아니다. 모든 지식은 어떤 '세계', 어떤 패러다임/에피스테메, 어떤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서로 "진리"를 주장하지만, 진리란 결국 어떤 '세계'안에서 성립하는 것이고 그 세계를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말이 통하는' 것이고, 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그 '세계'의 언어에 익숙해져 있는 것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세계', 패러다임/에피스테메, 틀에 집착한다. 그래서 자신들의 '믿음'을 가지고서 다른 '믿음'들을 적대하고, 자신들의 잣대로 함부로 타자들을 매도하고, 하나의 정치적 입장에 서서 다른 모든 측면들까지도 재단하려고 하고, 한줌의 지식을 가지고서 오만하게 잘난 척하기도 한다.
사실 누구나 어떤 잣대를 가지고서 타자들을 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잣대가 하나일 때 독단과 미망이 싹튼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타자성(otherness)에 부딪치고 그 부딪침을 통한 깨어남을 겪어 보지 못한 자들일수록 미망에 빠져 독단을 휘두르기 마련이다. 하나의 매트릭스에 집착하는 사람은 영원히 그 매트릭스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장자가 이 모든 것들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허의 터에 설 때, 꿈과 깨어남을 겪으면서 다양한 '세계'들을 가로지를 때 이 모든 것들이 나름대로의 뜻을 가짐을 알 수 있다고 본다. 한 '세계'에서 깨어나본 사람만이 그 한 세계와 다른 세계를 비교할 수 있는 것이다.
p.368.
맹자의 사유와 장자의 사유는 상앙으로 대변되는 전국시대 변법의 질서에 대한 두 상이한 응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맹자는 민본사상을 역설함으로써 법가적 냉혹함에 저항하고자 했고, 장자는 무위사상을 전개함으로써 작위의 폭력으로부터 탈주하고자 했다. 그러나 역사는 비극적이게도 이 두 길이 아니라 상앙의 길, 진(秦)의 제국화라는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이 진이 곧 멸망한 후 맹자의 사상을 어느 정도 흡수한 한나라가 등장했고, 그 후에는 장자가 수많은 지식인들을 사로잡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현실과 사상, 역사와 철학의 관계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라 하겠다.
p.369-370.
우선 장자는 우리에게 주객합일의 에티카를 선사한다. … 문명/작위론 기본적으로 객체를 ‘대상’으로 삼아 주체 중심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에서 성립한다. 장자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주객 분리를 극복해서 주객합일의 경지로 나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
인간은 세계와의 직접적 소통을 잃어버리는 대신 ‘표상(re-presentation)’을 통한 관계에 익숙해졌다. 그 결과 ‘자연=퓌지스’는 인간이 대상화해서 조작할 수 있는 ‘자연=네이처’가 되었다. …
…
사람의 일로 하늘의 일을 뒤덮으려 할 때 인간은 앎 자체가 담고 있는 위험과 질곡에 빠져버린다. 인간은 앎을 추구하지만 궁극에는 앎 자체를 극복하고서 도에 도달함으로써만 이 지경으로부터 빠져나와 다시 하늘=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
주객분리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끝없이 객체를 대상화하고 조작해 문명의 끝에 다다른 오늘날, 인류는 헤어날 길 없는 역운에 직면 … 전국시대 장자의 상황과 지금 우리의 상황에 큰 차이가 있을까? 장자의 철학은 궁극적으로 하늘과 사람의 합일, 자연과 작위의 화해의 철학이다.
(여기서부터 2024년 5월 16일 업데이트입니다.)
p.376.
… 초인의 진정한 모습은 플러스의 방향보다는 마이너스의 방향에서 더 잘 보인다. 삶의 가혹한 고통 속에서도 미소와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 자신을 해하려는 인간을 오히려 너그럽게 포용하는 사람, 타인들의 적대에 원한을 가지기보다 오히려 사랑으로 그 적대를 극복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초인의 모습을 본다.
초인은 어떤 현란하고 엄창난 일을 해내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고난을 초연하게 극복할 수 있는 사람, 원한을 사랑으로 덮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초인의 철학은 우리에게 이 힘겨운 세상을 미소 지으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힘을 담고 있다.
p.377.
장자는 이처럼 탈주의 철학을 전개했지만, 견유학파가 그랬듯이 탈주의 또 다른 면 즉 구체적인 정치철학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탈주는 한편으로 기표들의 그물망으로부터의 해체적인 도주를 뜻하지만, 또한 동시에 특이자들의 구축을 뜻하기도 한다. 사실 해체적 도주와 특이자들의 구축은 동전의 양면이다.
각주70) 장자가 「덕충부」에서 그린 기형의 인물들은 소수자들이 아니라 특이자들(singularities)을 뜻할 수도 있다. ‘예’의 세계가 그어놓은 일반성과 특수성의 피라미드 구조를 벗어나는, 들뢰즈적 뉘앙스에서의 ‘괴물들’이다. 소수자들이 소수자-되기라는 윤리적-정치적 행위를 행할 때 소수자들과 특이자들은 일치하게 된다.
p.378.
각주 72)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삼재’를 비롯해 장자의 생각은 유가적 정치 속으로 들어간 도가적 면모로서 이후 사대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아야 한다. … ‘무위지치’의 이념은 후대에, 특히 한대 초에 일종의 제왕학 또는 통치술로서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
…
그러나 다른 한편 동북아에서 농민혁명이 발발할 때면 흔히 도가적 배경을 띠고서 나타났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동북아 전통의 구조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사회 개혁이 위로부터의 개혁이나 농민혁명이 있었을 뿐 ‘시민사회’의 성숙한 내재적 개혁은 어려웠기 때문이다.
§5. 종합적 사유의 출현
p.379.
천하의 통일이라는 상황은 곧 종합적인 철학을 요청한다. 이는 곧 지중해세계에서의 통일이 종교에서의 단일화를 요청했던 것과도 같다. 이러한 사상적 종합 중에서도 우리는 법가적 종합, 도가적 종합, 유가적 종합이라는 세 갈래를 변별해낼 수 있다.
p.385.
맹자의 경우 인간은 100점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살면서 점차 점수는 낮아질 수밖에 없으며, … 노력을 통해 다시 원점수를 회복해나가는 것이 관건이다.
순자의 경우 인간은 0점이 아니라 60점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낙제점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따라서 부단한 노력으로 60점 이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렇게 보면 맹자와 순자의 실질적 차이는 처음 보기보다는 크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 바로 이런 의미에서 순자에게 교화는 훨씬 더 적극적인 의미를 띠며, 발명과 창조라는 의미를 머금게 된다. …
p.386.
… 순자에게는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잠재력을 실현하는 사람은 실현하고, 실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실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 각자가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내적 경향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결과론이며, 여기에서 순자의 논리는 교착 상태에 빠지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순자에게서 작위의 핵심은 학문에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맹자가 본성의 회복을 역설한다면 순자는 작위 특히 학문에 매진할 것을 역설한다.
p.389.
중요한 것으로,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의 선/악을 실체주의, 본질주의의 시각에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순자가 역점을 두는 것은 ‘자연상태’에서의 인간은 악할 수밖에 없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선하게 만들어가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학문이 그토록 중요할 수밖에 없다. 순자사상의 의의는 오늘날 새롭게 음미될 충분한 가치가 있다.
p.392~393.
황로지학의 최고 범주는 도와 법이 아니 라 도와 기이다. 신도를 비롯한 인물들에게 도란 자연법칙이다. 그러나 황로지학에서의 도는 지중해세계로 말한다면 '부정신학'적으로 논의된다.
'무릇 '도'란 형태들[개별자들]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지키지 못한다. '도'는 가면 돌아오지 않고, 온다 해도 머물지 않는다. 도는 들으려 한다 해서 들리는 것이 아니며, 그저 문득 마음속에 있을 뿐이다. 가물가물해 그 모습은 볼 수가 없지만, 은현하기에 나와 생을 함께한다. 그 형태를 볼 수 없고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차례로 모든 것을 이루나니, 하여 '도'라 일컬어 진다.' ([관자], [내업])
'도'는 모든 곳에 있지만 그 어느 특정한 곳에도 있지 않은 존재이고, 감각적으로는 접할 수 없지만 우리의 마음속에서 또 삶/생명에서는 느껴지는 존재이며, 현실적으로 확인되는 존재가 아님에도 세계의 모든 일들을 하나씩 이루어나가는 존재이다.
우선, 도는 그 어떤 특수성에도 갇힐 수 없는 무엇이다. 그래서 도는 '큼', '하나', '허', '무명'등으로 표현되며, 여기에서 '큼'은 그 위대함을, '하나'는 그 총체성과 통일성을, '허'는 그 비어 있음과 무한한 잠재력을, '무명'은 인간의 언어로 온전히 표상할 수 없음을 뜻한다.
그러나 '도'가신비한 것만은 아니다. "차례로 모든 것을 이룬다"는 것은 도가 단순한 혼돈이나 신비이기만 한 것만이 아니라 세계를 지배하는 이법이기도 하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의 성격은 흔히 '항'/'상'으로 표현된다.
도는 "자본자근"(장자) 즉 '자기원인(causa sui)'이며, 그 이치는 인간의 인식 능력을 초월하지만, 인간은 세계에서 도의 위대한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도는 스스로를 숨기면서 동시에 드러낸다. 도는 불가지의 존재이지만, 또한 그 활동을 우리에게 현시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도가 "문득 마음속에 있을 뿐"이며, "은현하기에 나와 생을 함께한다"는 점이다. 도와 기의 형이상학을 배경으로 해서, 특히 마음과 생명에 대해 깊이 천착해들어가고 그 기반 위에서 정치를 논하는 것이 황로지학의 핵심 특징이다.
p.394-395.
황로지학은 군주의 내업, 심술(心術), 백심(白心)을 통해 무위지치의 정치철학을 정초하고자 했다...우주의 신묘한 정기는 오직 인간의 마음, 허정한 마음에서만 포착되며, 특히 군주가 이런 득도를 통해 무위지치를 행할 때에만 국가가 잘 다스려진다는 것이 황로지학의 핵심이다. 법가사상이 이름- 자리의 구조화라는 언표적 배치, ‘코드화’에 주력했다면, 황로지학은 왕의 몸을 중심에 놓고서 신체적 배치, 영토화에 주력했다고 할 수 있다.
*백심(白心): 마음을 깨끗이 함.
p.401.
춘추전국시대는 이 왕의 존재가 와해되고 제후들의 쟁패가 펼쳐진 시대이다. 천하통일의 기운이 무르익던 시절에 새롭게 부활 한 것은 바로 왕의 존재였고, 이 시대가 요청한 학문은 바로 제왕학이었다.
『관자』는 관자라는 신하를 모범으로 삼아 쓴 저작이지만, 이미 이런 관점을 잘 보여준다. 『여씨춘추』는 보다 체계적인 국가철학을 담고 있고, 제왕학으로의 길을 더 잘 드러내고 있다. … 『덕도경』에서 제왕학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론적으로는 ‘은미(隱微)함’을 역설하고 있지만, 사실은 제왕학을 노골적으로 펼치고 있는 저작이라 할 것이다. … 이저작들에서 아른거리는 것은 바로 왕의 귀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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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꼽문] 책새벽-월. 『역사의 역사』 "제4장.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 랑케"(p.119-14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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