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적 개념과 인간의 경험 기반
양자역학 세미나에서 물리적 개념과 인간의 경험 기반에 대한 질문이 나오고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오고 가는 것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양자역학을 이해해 가는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질문이라 생각합니다.
이 문제는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에서도 더 상세하게 논의되고 있고, 앞으로 더 깊이 다루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여기에서는 소위 고전역학에서 말하는 물리적 개념이 결코 직관적이지도 않고 경험에 기반을 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짧게 지적하고자 합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근대과학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며, 특히 고전역학의 주요 개념들을 처음 제시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그런데 갈릴레오는 몇 가지 대화체의 대중적인 저서와 망원경을 이용한 관측 결과를 소개하는 저서 등 십여 권의 저작에서 체계적으로 고전역학을 전개하지 않았습니다. 흔히 자유낙하의 법칙이나 관성의 법칙을 갈릴레오가 발견했다고 서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가령 1638년 출간된 Discorsi e dimostrazioni matematiche intorno a due nuove scienze [ Discourses and Mathematical Demonstrations Relating to Two New Sciences; 새로운 두 과학에 관계된 논의와 수학적 증명]에 서술된 것을 보면 운동에 대한 새로운 서술이 직관적이지 않음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실상 세 사람(심플리치오, 사그레도, 살비아티)이 5일 동안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정의, 공리, 예비명제, 정리, 따름정리, 주석 등으로 매우 수학적인 방식으로 쓰여 있습니다. 일반 독자가 따라가기 힘든 유클리드 기하학을 이용한 증명이 계속 나옵니다. 아래에 있는 것이 빗면과 관련된 서술이 있는 페이지입니다.
약간의 과장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대화를 나누는 세 사람, 심플리치오(Simplicio), 사그레도(Sagredo), 살비아티(Salviati)는 모두 갈릴레오를 대변하는데, 심플리치오는 갈릴레오의 초기를, 살비아티는 무르익은 갈릴레오의 사유를 대변합니다. 심플리치오는 <두 주된 세계체계 사이의 대화>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을 맹신하며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인 것처럼 나왔지만, <새로운 두 과학>에서는 직관적이면서도 나름대로의 합리적 이유를 제시하는 사람입니다. 갈릴레오 자신이 운동에 대해 처음 가졌던 생각을 대변합니다. 자연스럽게 직관적인 아이디어를 상세하게 설명하곤 합니다. 그러면 사그레도가 그 직관적인 생각이 지니는 난점이나 이상한 점을 지적하고, 살비아티가 이를 수학을 이용하여 해결하는 식으로 서술이 이루어집니다.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에 나오는 소위 '고전역학'이 결코 직관적이지 않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직관적으로 보면 물체에 어떤 충격을 주거나 해서 힘을 가할 때 거기에 비례하여 물체의 속도가 바뀌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고전역학은 그 직관이 틀렸다고 말합니다. 힘에 비례하는 것은 속도가 아니라 속도의 변화, 즉 가속도라는 겁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외부에서 충격을 주면 운동의 양이 변하며, 운동의 양은 물체가 무거울수록 또는 빠르게 움직일수록 크다는 새로운 관념을 도입해야만 합니다.고전역학이 전제하는 시간과 공간의 분리도 결코 직관적이지 않습니다. 실상 고전역학에서 논의되는 물리량으로서 위치, 속도, 운동량, 에너지, 각운동량 등은 모두 갈릴레오변환 대칭성에서 유도됩니다. 직관적인 것이 아니라 수학적이며 논리적이며, 이러저러한 가정과 전제를 깔아놓고 유도하는 것이죠.
이를 명확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뇌터의 정리입니다. 다비트 힐버트의 제자로서 탁월한 업적을 많이 남긴 수학자 에미 뇌터가 고전역학에 대해 매우 특별하고 중요한 정리를 증명했습니다. 동역학 이론이 바탕에 깔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대칭성, 즉 변환에 대한 불변성이 있으면 언제나 그에 대응하는 보존량이 존재한다는 내용입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Noether's_theorem
조금 더 쉽게 풀어쓰면 다음과 같습니다. 동역학은 그 바탕에 시간과 공간과 물질에 대한 기본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물질이 공간 속을 움직여 나간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시간의 기준,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구별하는 기준은 임의적입니다. 2023년 1월 1일을 $t=0$으로 삼아도 되고, 오늘 자정을 $t=0$으로 삼아도 됩니다. 시간의 기준을 바꿈에 따라 동역학 서술이 달라지면 안 됩니다. 이것이 시간의 대칭성입니다. 뇌터의 정리는 이렇게 시간의 기준을 바꾸어도 동역학 서술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면, 항상 에너지라는 물리량이 보존됨을 증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에너지란 곧 시간대칭성의 산물입니다. 마찬가지로 위치의 기준을 여기와 저기 중 어디로 선택하더라도 물리적 서술이 달라져서는 안 됩니다. 이를 공간 평행이동의 대칭성이라 부릅니다. 그런 경우 항상 운동량이라는 물리량이 보존됩니다. 즉 운동량은 공간 평행이동 대칭성의 산물입니다. 또 공간축의 방향을 어느 쪽으로 선택하더라도 물리적 서술이 달라져서는 안 됩니다. 이를 공간 회전대칭성이라 부릅니다. 그런 경우 항상 각운동량이라는 물리량이 보존됩니다.
요컨대 에너지, 운동량, 각운동량은 시간과 공간의 대칭성에서 엄밀하게 유도되는 물리량입니다. 직관이나 경험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역학에서 다루는 물리량은 질량, 길이, 시간, 각도, 넓이, 부피, 힘, 에너지, 압력, 운동량, 각운동량, 돌릴힘(토크), 광도, 온도, 전하량 등등 매우 많습니다. 하지만 이 중에서 더 기본적인 물리량이 있고 그 기본물리량으로부터 유도되는 물리량이 있습니다. 넓이나 부피는 실상 길이로부터 유도됩니다. 속도나 가속도는 길이와 시간으로부터 유도됩니다. 운동량이란 것은 질량과 길이와 시간으로부터 유도됩니다.
국제 도량형 단위계가 이런 관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기본단위 일곱 가지, 즉 시간, 길이, 질량, 전류, 온도, 물질의 양, 광도는 다른 유도단위의 기초가 되는 단위입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International_System_of_Units
이것은 실상 물리학의 근본적인 가정과 직접 연관됩니다. 이른바 자연단위계(natural unit system)는 국제 표준단위계의 변형입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Natural_units
예를 들어 상대성이론을 가져오면 시간과 공간을 같은 단위로 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c=1$이라 나타냅니다. 양자역학으로 가면 질량과 길이가 직접 연결되어 같은 단위로 잴 수 있게 됩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hbar=1$이라 나타냅니다. 양자역학에서는 모든 길이를 $\frac{\hbar}{m c}$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드브로이 파장입니다. 만일 $c=1$, $\hbar=1$이라 하면, 즉 길이와 시간과 질량의 단위를 그렇게 선택하면 길이는 질량의 역수 $1/m$과 같아집니다. 이에 대한 간단한 논의가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의 제5장 앞부분에 있습니다.
요컨대, 양자역학 또는 양자이론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관념과 개념들이 직관적이지 않은 반면, 고전역학은 직관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옳지 않습니다. 물리학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직관적이지 않은 개념과 관념과 언어를 선택하여 세계를 서술하려는 시도라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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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강조해서 쓰신 부분에 특히 공감합니다. "고전역학에서 말하는 물리적 개념이 결코 직관적이지도 않고 경험에 기반을 둔 것도 아니라는 점" , "매우 수학적인 방식으로" , "결코 직관적이지 않음" , "물리학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직관적이지 않은 개념과 관념과 언어를 선택하여 세계를 서술하려는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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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신정(양력 1월1일)에도 세배하고, 구정(음력 1월1일, 설날)에도 세배를 했는데, 세배돈이 달랐습니다 ! 시간 기준이 달라졌더니, 같은 동역학적 행위 (큰절하기) 의 결과가 달랐졌어요 !! 게다가 학년이 올라갈수록 세배돈이 달라지다가, 사라졌습니다 !!! 뇌터와 힐베르트는 독일 사람이라서 몰랐던 걸 까요? (^^)
뇌터의 정리에 대한 설명도 잘 읽었고, 기본 물리량 얘기도 있네요. 잘 읽었습니다. 길이와 시간과 질량의 단위를 적절히 조절하면 길이가 질량의 역수와 같아진다는 얘기가 무척 흥미롭네요. 좁은 유리관을 채우는 차원만이 존재한다면 이런 관계가 성립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그리고 뇌터의 정리에서 대칭성과 보존되는 물리량 이야기를 읽으니 질량보다는 운동량을 더 근본적인 양으로 삼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장회익 선생님 책에 그래서 대부분의 수식이 운동량과 에너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떤 기준과 어떤 단위로 대상을 측정하는가….하는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깊은 함의가 숨어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