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4일 세미나 보충
작성자
자연사랑
작성일
2020-06-05 14:35
조회
2365
어제(6월 4일) 첫 번째 온라인 세미나는 저로서는 무척 유익한 자리였습니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자연철학 세미나의 가장 중요한 목적과 동기는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를 이해하고 그 주장과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일차적이고, 그 다음에 이와 관련된 토론거리를 찾아 이야기 나누는 것이 될 터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래도 전체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입장이다 보니까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의 내용 자체를 이해하는 일보다도 그 다음 단계에서 이야기 나눌만한 토론거리를 자꾸 제기하게 되어 세미나가 전반적으로 좀 어려워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조교'로서의 역할은 아무래도 앞의 문제, 즉 책과 대담 내용 자체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겠습니다. 앞으로는 '조교'로서의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도록 애쓰겠습니다.
그래도 다른 면에서 보면, 제가 어제 말씀드린 몇 가지 쟁점이 책과 대담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습니다. 책과 대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그렇지 않을 수 있는 점에 주목하면서 책과 대담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왜 다른지 그리고 왜 특별한지 더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제가 말씀드린 쟁점 몇 가지를 정리해 두려고 합니다.
이 문제는 상대성이론의 자연철학과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합니다. 꽤 오랫동안 상대성이론에 대한 지배적인 해석은 '상대주의'였습니다. 이름 때문에세상에 절대적인 없다는 것을 주장한 이론 쯤으로 오해받아 왔습니다.
물론 그 이전까지, 특히 뉴턴의 이름과 연결된 자연철학적 사유에서는 절대성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자연철학자 특히 19세기 이후 물리학자라 부르는 사람들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든 것을 설명하고 모든 것을 밝혀 내고 모든 것을 알아낸 것처럼 보였습니다.
17세기 왕정복고 시대 영국에서 활동했던 아이작 뉴턴은 강한 신념으로 왕당파를 지지하고 절대왕정을 믿었던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도 거의 신적인 존재인 양 말하곤 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정확히는 성공회) 내에서 삼위일체라는 개념이 신의 절대적 권력을 깎아내린다는 이유로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성부유일신 개념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20세기가 시작할 무렵 켈빈 경이라고도 부르는 윌리엄 톰슨은 물리학자들이 거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고 공언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자연철학적 사유에서는 멈춰 있는 관찰자의 좌표계와 움직이는 관찰자의 좌표계가 모두 대등함을 명확하게 밝혔습니다.
뉴턴의 왕정주의와 비교해 생각해 보면, 뉴턴의 상대성이론은 민주주의를 주장했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움직이든 움직이지 않든 어떤 속력으로 움직이든 모두가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누구나 옳다는 상대주의로 귀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좌표계에 공통으로 성립하는 법칙의 불변성은 놓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좀 오래 전이긴 하지만, 1970년대에 미국에서 꽤 널리 유행했던 '신과학 New Age Science'에서는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의 만남을 강력하게 믿었습니다. 프리초프 카프라라든가 에리히 얀치 같은 사람들이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베트남 전과 관련하여 전개된 대항문화 운동, 특히 히피 운동과도 연결되었는데, 특이하게도 미국 서부 대학들을 중심으로 현대물리학에 큰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카프라가 말한 동양사상은 동아시아가 아니라 인도를 중심으로 한 남아시아 쪽의 전통사상이긴 했지만, 나중에 이 조류가 한국에 소개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범양사라는 출판사에서 아예 "신과학총서"라는 이름으로 관련된 책들을 열심히 세상에 선보였습니다.
여기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현대물리학(가령 상대성이론)의 어떤 주장(대개 현상과 실험을 통해 옳음이 확인된)이 '동양'의 전통사상에서 말하는 것과 '통하는 바'가 있다는 말의 함의입니다.
신과학과 같은 사상조류를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현대물리학과 아시아(동양)의 전통 사상은 사실상 아무 관련이 없고, 몇 가지 유사성을 가지고 깊은 연결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도하다고 봅니다. 그와 달리 그런 유사성 자체가 그 여러 접근이 서로 통하는 바가 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자연自然'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척 난해하고 어렵지만, 19세기말에 유럽어의 natura (nature)를 한자어를 써서 번역하던 일본의 '란학사'들이 이 노자-장자의 고유한 개념을 '나투라 natura'의 번역어로 선택한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라틴어 '나투라 natura' 또는 그 그리스어 원형인 '퓌시스 physis'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들어가면 이것은 세상에 대한 개념 내지 관념 내지 이론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과 세상에 대한 관념을 굳이 구별하지 않기로 한다면 말입니다.
관찰자의 좌표계와 독립적으로 법칙이 성립하고 존재한다는 상대성이론의 주장에서 '법칙'이라는 것을 '물리적 실재'나 '자연'으로 바꾸면 어떨까 하는 것이 뚱냥님의 질문에 대한 확장된 이해라 봅니다.
과학철학이라는 철학의 한 분야에서는 과학이론이 얼마나 실재에 대한 올바른 서술을 담고 있는가를 놓고 아주 오랫동안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어 왔습니다. 흔히 과학실재론 논쟁이라 부릅니다. 실재론을 주장하는 부류에서는 과학이론이 여하간 세상의 실체 내지 참된 모습 내지 자연을 반영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반실재론이나 도구주의를 주장하는 부류에서는 그렇게 만들어진 이론이나 가설이 정말 참이나 진리라기보다는 관찰로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나 실험결과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모형 내지 도구일 뿐이라고주장합니다.
실상 과학철학 내에서도 상대성이론의 여러 이론적 성취를 원용하여 과학이론 자체를 바라보는 개념도구로 사용하려 한 사람도 많습니다.
상대성이론 자체는 움직이는 좌표계들 사이에서 길이나 시간 등의 물리량을 확정하기 위해, 모든 좌표계들이 동등하다는 가정을 출발점으로 삼았을 뿐입니다. 이것이 동양사상의 '자연' 개념과 닮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위험한 사고의 비약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것으로 연결되는 창의적인 통로일 수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함께 더 생각해 볼, 아주 좋은 토론거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이 문제는 제가 처음 장회익 선생님의 사유를 배울 무렵에 맨 먼저 가졌던 저의 의문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제 나름의 방식으로 잘 해결해 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가 의외로 정말 어렵습니다.
가장 중요한 실마리는 '고유시간'의 개념입니다. 움직이는 관찰자의 좌표계들(움직이는 속력에 따라 매우 많은 좌표계들이 가능합니다) 각각이 나름의 시간이 있고 모두가 옳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먼저와 나중을 비교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일종의 상대주의의 난점입니다. 이것을 해결하는 것이 바로 고유시간입니다. 우주 전체에 획일적으로 적용되는 폭군과도 같은 우주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지만, 각자가 나름의 '고유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아이디어입니다.
오스트리아의 과학사회학자 헬가 노보트니는 상대성이론의 고유시간 개념을 확장하여 사회학적인 시간 개념을 꼼꼼하게 살피고 있습니다.
헬가 노보트니의 '고유시간'
제가 언급한 것은 삼각함수를 곡면 위에서도 정의할 수 있기 때문에 삼각함수가 피타고라스 정리아 2차원 평면에 내재한 것으로 보는 건 좀 부정확하다는 점이었습니다.
구면삼각법 자체는 또 다른 공부거리라서 여기에서 소개하기는 좀 불편하지만, 요즘은 관련된 자료가 많이 있습니다.
가령 https://en.wikipedia.org/wiki/Spherical_trigonometry
삼각형은 2차원 평면에서 정의되는 것이지만, 임의의 차원에서도 삼각형 비슷한 것을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를 '단체 單體 simplex'라고 부릅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Simplex
이 질문은 설명의 여지가 무척 많은 것이어서 말썽거리가 된 것 같습니다.
저의 의도는 물리학에서 말하는 개념들과 논리도 수학 못지 않고 추상적이고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수학과 물리학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고, 그 방법론도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제 주장은 좀 과격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문제는 제가 따로 글을 독립하여 더 이야기를 펼쳐보겠습니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자연철학 세미나의 가장 중요한 목적과 동기는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를 이해하고 그 주장과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일차적이고, 그 다음에 이와 관련된 토론거리를 찾아 이야기 나누는 것이 될 터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래도 전체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입장이다 보니까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의 내용 자체를 이해하는 일보다도 그 다음 단계에서 이야기 나눌만한 토론거리를 자꾸 제기하게 되어 세미나가 전반적으로 좀 어려워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조교'로서의 역할은 아무래도 앞의 문제, 즉 책과 대담 내용 자체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겠습니다. 앞으로는 '조교'로서의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도록 애쓰겠습니다.
그래도 다른 면에서 보면, 제가 어제 말씀드린 몇 가지 쟁점이 책과 대담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습니다. 책과 대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그렇지 않을 수 있는 점에 주목하면서 책과 대담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왜 다른지 그리고 왜 특별한지 더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제가 말씀드린 쟁점 몇 가지를 정리해 두려고 합니다.
(1) 상대성원리는 상대주의를 함축하는가, 아니면 오히려 보편적 규범과 원칙을 강조하는가?
이 문제는 상대성이론의 자연철학과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합니다. 꽤 오랫동안 상대성이론에 대한 지배적인 해석은 '상대주의'였습니다. 이름 때문에세상에 절대적인 없다는 것을 주장한 이론 쯤으로 오해받아 왔습니다.
물론 그 이전까지, 특히 뉴턴의 이름과 연결된 자연철학적 사유에서는 절대성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자연철학자 특히 19세기 이후 물리학자라 부르는 사람들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든 것을 설명하고 모든 것을 밝혀 내고 모든 것을 알아낸 것처럼 보였습니다.
17세기 왕정복고 시대 영국에서 활동했던 아이작 뉴턴은 강한 신념으로 왕당파를 지지하고 절대왕정을 믿었던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도 거의 신적인 존재인 양 말하곤 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정확히는 성공회) 내에서 삼위일체라는 개념이 신의 절대적 권력을 깎아내린다는 이유로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성부유일신 개념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20세기가 시작할 무렵 켈빈 경이라고도 부르는 윌리엄 톰슨은 물리학자들이 거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고 공언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자연철학적 사유에서는 멈춰 있는 관찰자의 좌표계와 움직이는 관찰자의 좌표계가 모두 대등함을 명확하게 밝혔습니다.
뉴턴의 왕정주의와 비교해 생각해 보면, 뉴턴의 상대성이론은 민주주의를 주장했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움직이든 움직이지 않든 어떤 속력으로 움직이든 모두가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누구나 옳다는 상대주의로 귀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좌표계에 공통으로 성립하는 법칙의 불변성은 놓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뚱냥님(조윤숙님)의 질문: 관찰자의 좌표계에 따라 물리법칙이 달라지지 않음을 주장하는 상대성원리는 동양의 자연(自然) 즉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개념과 닮아 있지 않나?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좀 오래 전이긴 하지만, 1970년대에 미국에서 꽤 널리 유행했던 '신과학 New Age Science'에서는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의 만남을 강력하게 믿었습니다. 프리초프 카프라라든가 에리히 얀치 같은 사람들이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베트남 전과 관련하여 전개된 대항문화 운동, 특히 히피 운동과도 연결되었는데, 특이하게도 미국 서부 대학들을 중심으로 현대물리학에 큰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카프라가 말한 동양사상은 동아시아가 아니라 인도를 중심으로 한 남아시아 쪽의 전통사상이긴 했지만, 나중에 이 조류가 한국에 소개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범양사라는 출판사에서 아예 "신과학총서"라는 이름으로 관련된 책들을 열심히 세상에 선보였습니다.
여기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현대물리학(가령 상대성이론)의 어떤 주장(대개 현상과 실험을 통해 옳음이 확인된)이 '동양'의 전통사상에서 말하는 것과 '통하는 바'가 있다는 말의 함의입니다.
신과학과 같은 사상조류를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현대물리학과 아시아(동양)의 전통 사상은 사실상 아무 관련이 없고, 몇 가지 유사성을 가지고 깊은 연결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도하다고 봅니다. 그와 달리 그런 유사성 자체가 그 여러 접근이 서로 통하는 바가 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자연自然'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척 난해하고 어렵지만, 19세기말에 유럽어의 natura (nature)를 한자어를 써서 번역하던 일본의 '란학사'들이 이 노자-장자의 고유한 개념을 '나투라 natura'의 번역어로 선택한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라틴어 '나투라 natura' 또는 그 그리스어 원형인 '퓌시스 physis'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들어가면 이것은 세상에 대한 개념 내지 관념 내지 이론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과 세상에 대한 관념을 굳이 구별하지 않기로 한다면 말입니다.
관찰자의 좌표계와 독립적으로 법칙이 성립하고 존재한다는 상대성이론의 주장에서 '법칙'이라는 것을 '물리적 실재'나 '자연'으로 바꾸면 어떨까 하는 것이 뚱냥님의 질문에 대한 확장된 이해라 봅니다.
과학철학이라는 철학의 한 분야에서는 과학이론이 얼마나 실재에 대한 올바른 서술을 담고 있는가를 놓고 아주 오랫동안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어 왔습니다. 흔히 과학실재론 논쟁이라 부릅니다. 실재론을 주장하는 부류에서는 과학이론이 여하간 세상의 실체 내지 참된 모습 내지 자연을 반영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반실재론이나 도구주의를 주장하는 부류에서는 그렇게 만들어진 이론이나 가설이 정말 참이나 진리라기보다는 관찰로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나 실험결과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모형 내지 도구일 뿐이라고주장합니다.
실상 과학철학 내에서도 상대성이론의 여러 이론적 성취를 원용하여 과학이론 자체를 바라보는 개념도구로 사용하려 한 사람도 많습니다.
상대성이론 자체는 움직이는 좌표계들 사이에서 길이나 시간 등의 물리량을 확정하기 위해, 모든 좌표계들이 동등하다는 가정을 출발점으로 삼았을 뿐입니다. 이것이 동양사상의 '자연' 개념과 닮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위험한 사고의 비약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것으로 연결되는 창의적인 통로일 수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함께 더 생각해 볼, 아주 좋은 토론거리라 생각합니다.
(3) 시간과 공간이 대등하다는 주장은 예측적 앎이라는 틀에서 항상 '먼저 상태'와 '나중 상태'를 가르는 것과 충돌하지 않을까? 시간은 근본적으로 공간과 다른 것이 아닐까?
사실 이 문제는 제가 처음 장회익 선생님의 사유를 배울 무렵에 맨 먼저 가졌던 저의 의문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제 나름의 방식으로 잘 해결해 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가 의외로 정말 어렵습니다.
가장 중요한 실마리는 '고유시간'의 개념입니다. 움직이는 관찰자의 좌표계들(움직이는 속력에 따라 매우 많은 좌표계들이 가능합니다) 각각이 나름의 시간이 있고 모두가 옳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먼저와 나중을 비교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일종의 상대주의의 난점입니다. 이것을 해결하는 것이 바로 고유시간입니다. 우주 전체에 획일적으로 적용되는 폭군과도 같은 우주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지만, 각자가 나름의 '고유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아이디어입니다.
오스트리아의 과학사회학자 헬가 노보트니는 상대성이론의 고유시간 개념을 확장하여 사회학적인 시간 개념을 꼼꼼하게 살피고 있습니다.
헬가 노보트니의 '고유시간'
(4) 삼각함수는 2차원 평면을 출발점으로 한다는 말에 대한 추가적인 생각.
제가 언급한 것은 삼각함수를 곡면 위에서도 정의할 수 있기 때문에 삼각함수가 피타고라스 정리아 2차원 평면에 내재한 것으로 보는 건 좀 부정확하다는 점이었습니다.
구면삼각법 자체는 또 다른 공부거리라서 여기에서 소개하기는 좀 불편하지만, 요즘은 관련된 자료가 많이 있습니다.
가령 https://en.wikipedia.org/wiki/Spherical_trigonometry
삼각형은 2차원 평면에서 정의되는 것이지만, 임의의 차원에서도 삼각형 비슷한 것을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를 '단체 單體 simplex'라고 부릅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Simplex
(5) 수학적인 것과 물리학적인 것은 애초에 같은 부류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 질문은 설명의 여지가 무척 많은 것이어서 말썽거리가 된 것 같습니다.
저의 의도는 물리학에서 말하는 개념들과 논리도 수학 못지 않고 추상적이고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수학과 물리학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고, 그 방법론도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제 주장은 좀 과격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문제는 제가 따로 글을 독립하여 더 이야기를 펼쳐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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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이 4차원임을 처음 밝힌 헤르만 민코프스키의 논문을 아래 링크에서 직접 볼 수 있습니다.
Hermann Minkowski. "Space and Time" (Minkowski’s Papers on Relativ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