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5-3의 보충 3: 변별체 개념
장회익 선생님의 자연철학에서 양자역학에 대한 깊은 성찰이 중요한 버팀목이 되는 것 같습니다.
물리학자이자 철학자로서 물리학의 주요 이론들을 차례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다루시면서 자연철학의 사유를 펼쳐 나가시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런 동시에 그 중 가장 핵심인 것이 바로 양자역학을 둘러싼 사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번에는 변별체 개념에 대한 가벼운 메모를 남겨두려고 합니다.
대담 중에 상태 변화에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이 강조됩니다. 그것은
(1) 슈뢰딩거의 방정식
(2) 상태 전환 (공리 4)
입니다. 최우석님 질문에서 고전역학은 외력이 상태를 바꾼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frac{dp}{dt}=F$$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힘이 주어지면 운동량이 바뀔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방정식, 즉 뉴턴 방정식은 초기 조건이 주어지면 나중의 값이 유일하게 확정되는 미분방정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처음 상태를 알면 나중 상태를 유일하게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정론이 튀어나온 것이기도 합니다.
장회익 선생님의 답변에서 명시적으로 말씀하시지는 않은 것 같지만, 외력은 곧 퍼텐셜 V(x)과 같습니다. $$F = - \frac{dV}{dx}$$라 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뉴턴의 상태 변화 원리는$$ \frac{dp}{dt} = - \frac{dV}{dx}$$로 쓸 수도 있습니다.
비슷하게 슈뢰딩거 방정식에 들어 있는 퍼텐셜 $V(x, y, z)$가 바로 그 힘의 의미를 지닙니다. 다만 엄밀하게 말하면 외력만이 아니라 내부적인 힘(흔히 상호작용이라 부릅니다)도 포함된 것이고, 내부와 외부를 구별하는 것이 종종 혼동스러워서 '외력'이란 표현은 양자역학에서 사용되지 않습니다.
저는 장회익 선생님의 새 저서에서 양자역학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기여가 "공사건(null event) 또는 빈 사건"의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이 문제를 제대로 짚은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상호작용 없는 측정"에 대해 말한 엘리추어와 바이드만도 그런 심오한 성찰을 함께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변별체라는 오묘하고 쉽지 않은 개념에 대해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세상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는 것은 그것과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자연철학 세미나도 맞닥뜨리고 만나야 뭔가 이야기가 오고가고 생각의 불이 튀고 새로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온라인 세미나라도 해야 생각을 교환할 수 있습니다.
흔히 오해되는데, 고전역학이나 여현 장현광의 사유에서는 마치 변별체가 없는 것처럼 이야기되곤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앎, 지식은 변별체를 필요로 합니다. 장현광이 대변하는 성리학적 자연철학은 전지적 시점을 택하거나 성인의 관점을 택하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지식이나 사상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전역학과 상대성이론을 기반으로 한 자연철학에서도 결국 시간과 공간을 결정하는 것은 시계와 자이며, 위치와 운동량을 결정하는 것도 어떤 식으로든 도입된 특별한 존재물입니다. 에너지라는 난해한 개념도 결국 여하간 측정의 산물이고 세상을 그렇게 측정을 통해 지식으로 변화합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변별체입니다. 스포츠의 예를 들면, 축구공이나 야구공이 특정한 영역 안에 놓여야 골인이나 스트라이크가 됩니다. 특정한 영역을 벗어나야 홈런이 됩니다. 그렇게 따로 마련된 영역 안에 있는가 아니면 그 밖에 있는가를 판별하는 것이 바로 변별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양자역학 이전의 변별체는 언제나 "온/오프" 내지 "예스/노"의 이분법적 질문과 대답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변별'하고 난 뒤에도 대상이 달라지지 않는다고 철썩같이 믿었습니다. 그래서 변별자의 개념이 도드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양자역학의 자연철학에서는 두 가지 근원적 새로움이 있습니다. 첫 번쨰는 양자역학을 통해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온/오프" 또는 "예스/노"의 이분법이 아닙니다. "그렇다"와 "그렇지 않다" 사이의 온갖 가능성이 다 허용됩니다. 그것을 확률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퍼지'라는 말도 씁니다. 0과 1 사이의 실수라고 해도 됩니다.
다만 혼동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여하간 최종적으로 변별체와 만나서 생겨나는 사건은 여전히 이분법적입니다. 흔적을 남기는가, 안 남기는가 둘 중 하나입니다. 적당히 흔적을 남기는 척 하다 만다는 식의 상황은 없습니다. '사건'이라 부르거나 '변별'이라 부르는 이상, 그것은 둘 중 하나입니다. 있거나 없거나 하는 것이죠.
두 번째 새로움은 그렇게 '변별'하고 난 뒤에 대상이 원래대로인가 아닌가의 문제입니다. 당혹스럽게도 '변별'하고 나면 대상이 달라집니다. 양자역학 이전에는 대상은 그저 대상일 뿐이고, '변별'을 그 대상에 대한 온전한 정보를 얻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주 작은 대상이든 눈에 보이는 거시적인 대상이든 블랙홀이나 우주만큼 거대한 대상이든 양자이론을 적용하게 되면, '변별'이 대상을 바꾼다는 것을 맨 처음부터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런데 자주 놓치게 되는 것은 '변별'의 결과로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오지선다형 시험을 치르는 상황을 상상해 보면, 일단 정답이 아닌 것을 지워나가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지워나가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수많은 선택의 연속 속에서 덜 중요한 것, 옳지 않은 것,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제거해 나가는 과정이 중요한 것과도 통할 것입니다.
사건은 곧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지만, 동시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의미가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헌에 기록이 남는 것은 굵직굵직한 큰 사건들뿐입니다. 그러나 결국 역사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일 뿐입니다. 기록이 없다고 해서 역사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점은 사람이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사람이 보았는가 안 보았는가를 중시 여기나 하는 것입니다. 변별체는 굳이 사람이 아니어도 됩니다. 사람이라고 하지 말고 인식 주체라고 해도 됩니다. 약간 과장하면, 요즘 철학계에서 상당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신유물론' 또는 '사변적 실재론'이란 조류와 통하는 문제입니다. 가령 프랑스의 철학자 캉텡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는 "유한성을 넘어"라는 저서를 통해 이 문제를 심각하게 짚어나갑니다. 알랭 바디우의 제자이기도 한 메이야수는 철학사 전체에 걸쳐 가장 강력한 전통으로 남아 있는 주체의 문제를 전면 공격합니다.
문화일보에 연재된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중에도 이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신유물론 내지 사변적 실재론은 좀 과하게 나간 면이 있습니다. 결국 주체와 대상 사이의 상관적 관계 전체를 부정하다 보니 직관적으로 또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으로 연결되기 쉽거든요.
장회익 선생님의 사유가 여기에서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상 변별체는 인식주체와 인식대상, 즉 앎을 얻으려는 존재물과 앎의 대상이 되는 존재물 사이에 있는 경계물입니다. 다시 말해, 변별체는 존재론적 대상인 동시에 인식론적 과정의 출발점입니다.
변별체의 존재론적 지위와 위상을 명료하게 해명하면 21세기 들어 아주 민감하고 인기 좋은 사변적 실재론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아주 좋은 실마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 하나 대담에서 기억나는 것은 변별체의 역할을 하는 것은 수없이 많다는 점입니다. 사건/공사건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양자역학적으로 보면, 어떤 물체가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드문 일일 수 있습니다. 결국 오랜 시간이 지나면 모두 흩어져 버리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물론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영속하는 것은 없습니다. 결국 모두가 언젠가 생명을 다할 것이고, 물건은 점점 더 낡아지다가 결국 사라집니다. 단지 시간 스케일의 문제일 뿐입니다. 어떤 것은 아주 짧은 시간만에 사라져 버리고, 어떤 것은 긴 시간 동안 지속되는 듯이 보이지만 여하간 유한합니다.
물론 이것은 양자역학적 자연철학만으로는 안 되고, 6장에서 도입되는 통계역학적 자연철학과 맞물려야 합니다.
그런데 장회익 선생님께서 대담 속에서 흥미로운 말씀을 하십니다. 물체(e.g. 입자)의 지속성, 즉 어떻게 원래의 뭉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당혹스럽게도(?) 먼지 때문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제가 그 대목에서 떠올린 것은 양자역학의 논의에서 자주 거론되는 "결풀림 메커니즘"(decoherence)이라는 개념과 몇 년 전에 우연히 보았던 EBS 다큐멘터리였습니다.
2017년쯤이었을 텐데, 텔레비전을 켰더니 장회익 선생님이 나오시더라구요. "다큐프라임 '먼지'"라는 제목의 3부작이었습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최근 코로나19 사태와도 깊이 연관되는 주제를 다루고 있고, 3부작 전체가 참 잘 만든 다큐여서 기회가 될 때마다 추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장회익 선생님께서 어느 대목에 등장하시는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양자역학과 통계역학에 기반을 두면 결국 모두가 흩어져 버릴 우리 존재가 아주 작은 (그러나 원자 같은 것에 비하면 매우 거대한) 먼지 때문에 흩어져 버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줍니다.
하나만 더 언급하고 어수선한 글을 맺겠습니다. 대담 중에 슈뢰딩거가 고양이 사고실험을 언급한 것은 귀류법이라는 언급이 나옵니다. 즉 말도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양자역학이란 것 때문에, 사람들 속에 세계에 대해 인식주체가 관측 내지 측정을 통해 대상을 바꿀 수 있다느니,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실재하지 않는다느니, 대상들이 구름이나 안개처럼 흐릿하게 퍼져 있다느니 하는 이상한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는 상황에 대해 고양이 사고실험을 통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슈뢰딩거의 의도였던 것입니다.
이 문제는 온라인 세미나에서도 더 이야기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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