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상대성이론과 자연철학에 대한 갈망
작성자
자연사랑
작성일
2020-04-12 16:52
조회
3378
심학 제3도는 상당히 심오합니다. 상태의 변화를 이해함으로써 예측적 앎을 얻을 수 있다는 장현광의 통찰이 뛰어납니다. 이를 뉴턴의 자연철학을 통해 다시 살펴보고, 이것이 어떻게 아인슈타인의 자연철학에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모습이 되는가를 살피는 것은 결과적으로 보면 참 놀라운 혜안입니다.
뉴턴과 아인슈타인을 대비시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자연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의 기본 틀을 쉽게 알아챌 수 있습니다.
요즘 같은 전염병과 역병의 시기에 왜 새삼 자연철학 세미나인가 하는 물음에 답하려 하다 보니까, 제 짧은 경험 속에서는 1933년에 나온 이상의 시가 맨 먼저 떠오릅니다.
一九三三, 六, 一
"天秤우에서 三十年동안이나 살아온사람(엇던科學者)
三十萬個나넘는 별을 다헤여놋코만 사람(亦是)
人間七十 아니二十四年동안이나 뻔뻔히사라온 사람(나)
나는 그날 나의 自敍傳에 自筆의 訃告를 揷入하엿다
以後 나의肉身은 그런 故鄕에는잇지안앗다
나는 自身 나의 詩가 差押當하는꼴을 目睹하기는 참아 어려웟기때문에."
이상. ‹가톨닉靑年› 1933.7. 53쪽
1933년 무렵 한반도에서 살아가던 시인이자 작가인 이상(김해경 1910-1937)이 쓴 시입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김해경은 1929년에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로 취직했는데, 31년에 폐결핵이 발병하면서 33년에 사임하게 됩니다. 이 시는 그 무렵에 동인들과 만든 <가톨닉청년>에 실은 것입니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에서 살아가던 스물 네 살의 김해경이 천칭 위에서 30만 개가 넘는 별을 다 세고 있던 어떤 과학자를 이야기하면서 어떤 말이 하고 싶었을까 곰곰 생각하게 됩니다.김해경은 불과 스물 일곱 살에 세상을 떠나면서 세상에 무엇을 남기고 싶었을까요.
“亡國한지 二千年에 世界에 漂流하는 猶太사람”인 「아인스타인」은 세계의 3대 怪物 중 하나로 소개된다. “알벨트 아인스타인”은 “物理學上에 一大革命을 이리켜” “從來의 「絶對」라는 夢幻을 打破”한 사람이다. 그의 상대성원리를 “아지 못하면 現代人이 아니라 한다. 그러나 ... 아인스타인 자신이 豪言하얏스되 세계에서 자기의 學說 卽 상대성원리를 이해할 사람이 12人에 불과하리라 함을 보아도” 이를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이 기사는 “「아인스타인」의 相對性原理”라는 제목으로 2월 23일부터 3월 3일까지 7회에 걸쳐 연재되었습니다. 公民이라는 필명으로 이 기사를 쓴 사람은 나경석(羅景錫, 1890-?)입니다.
이 연재기사는 (1) 天文學의 革命, (2) 에텔 否認說 (3) 哲學上意義 (4) 最大速度 (5) 時間과 空間의 觀念의 다섯 절로 나뉘어 있습니다.
1922년 무렵을 상상해 봅니다. 1919년에 기미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이 있었고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긴 했지만, 여전히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였고, 비록 문화정치라는 이름으로 완화되긴 했어도, 그 무렵의 삶은 정말 혹독했을 것입니다.
그런 시절에 아인슈타인이라는 이름이며 상대성이론을 신문에 연재기사로 실었던 이 나경석은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일까요.
“동경학우회(東京學友會)의 뎨삼회 하긔강연(第三回夏期講演)은 루루히 보도한 바와 가치 예뎡대로 경운동 텬도교당에서 개최하엿는데 동단의 연사 최윤식(崔允植)씨는 다시 「아인스타인」의 상대성원리에 대하야 금일 오후 네시부터 역시 텬도교당에서 특별강연을 할 터인데 일반이 임의 아는 바와 가치 이 상대성의 원리라는 것은 원래 전문가의 두뢰로도 잘 리해하기 어려운 것임으로 아즉 과학이 유치한 조선에서는 특별한 실익이 업스리라 하야 일반강연에는 그만두기로 하고 따로히 특별 강연회를 열게 되엿는대 강연은 뎐문뎍 색채는 일톄로 버리고 통속으로 하야 일반에게 잘 알아듯도록 로력할 더이라 하며 동씨는 현재 동경뎨국대학 리과부에 재학중이며 특히 이 상대성원리에 대하야는 「아인스타인」씨를 비롯하야 기타 여러 대가의 강연을 륙칠번이나 들어 이에 대하야는 매우 조예가 깁다 한다. (입장료는 역시 삼십전 이십전)” [“아인스타인 相對性原理의 特別講演은 금일 오후팔시반 텬도교회당에서” (동아일보 1923년 7월 17일)]
이 기사는 제가 녹색아카데미에서도 소개하고 여러 차례 반복해서 언급한 1923년 최윤식의 강연 소식입니다. 강연 장소는 1921년 2월에 준공된 천도교회당이었고, 강연제목은 <아인스타인의 상대성원리>였습니다. 연사는 동경제대 이학부에 재학하는 최윤식(崔允植 1899-1960)이었습니다. 그는 “「아인스타인」씨 자신을 위시하야 대가의 강연을 듣기 6,7차이며 기타 오랫동안 연구를 쌓은 바 ... 물리학계의 일대혁명이라고 말하는 아인스타인의 상대성원리”에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스물 네 살의 청년은 1923년에 무엇을 위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강연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1923년 7월 17일에 강연이 있었고, 이틀 뒤에 이 강연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학우회강연단원 최윤식(崔允植)씨가 「아인스타인」의 상대성리론에 대하야 특별강연을 한다 함은 긔보와 갓거니와 지난 십칠일밤 일행 중 두 사람이 인천에서 강연을 하는 가튼 오후 팔시로부터 텬도교회당에서 강연은 시작은 되엿섯다. 원래 문뎨가 문뎨인 까닭으로 입장한 사람은 약 이백명가량밧게 안 되엇스며 중에는 중등학교 전문학교 학생이 대부분이요 또 중등학교 선생님들 중에도 출석한 이가 잇섯다. 세 시간 동안을 계속한 씨의 강연은 첨부터 끗까지 수학공식으로 발뎐되여 나갓슴으로 수학지식이 잇는 사람에게는 그리 어렵지 안타 하나 대부분은 역시 알어듯지 못하는 헛정성만 보엿다. 그러나 텽중의 대부분을 뎜령한 학생들이 끗끗내 필긔를 계속함은 보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으로 하야금 저윽히 마음을 진덧게 하엿다.” [“難解로 有名한 相對原理 講演에도 학생은 끗끗내 필긔를 계속”(1923년 7월 19일 동아일보)]
사실 이 기사는 여러 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3시간 동안 진행된 최윤식의 강연이 처음부터 끝까지 수학공식으로 발전되어 갔기 때문에, 수학지식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다고 하지만, 대부분은 알아듣지 못하는 헛정성만 보였다고 기자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끝끝내 필기를 계속한 학생들을 보면서 마음에 감동이 있었다고 적고 있는데, 여러 생각을 자아내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이와 비슷한 성격의 강연이 여럿 있었습니다.
1922년 8월 17일에는 하동의 하동공립전문학교에서 유학생 친목회 주최의 강연이 열렸습니다. 여기에서 “강우석(姜佑錫)군은 「思惟의 窮極과 아인스타인의 相對性原理」라는 題로 열변을 吐하고 ... 사백여명의 청중에게 多大한 感覺을 주엇”다고 합니다.
1925년 10월 31일 ‘학생과학연구회’ 주최로 열린 ‘과학문제강연’의 제목은 <相對性原理에 對하야>였고, 연사는 안일영(安一英)이었습니다.
1929년 4월 14일에는 경성에서 출판노조 주최로 열린 신춘강연대회에서 “相對性原理에 對하야”라는 제목의 강연이 있었고, 연사는 이정섭(李晶燮)이었습니다.
1931년 7월 28일 흥남 학술강연회에서 東大助手 理學士 도상록(都相祿)이 <相對性原理에 關하야>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습니다.
여러 시대에 여러 곳에서 자연철학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세상을 알아야겠다는 것이나 어떤 지식에 대한 열망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실용적이거나 전문적 응용을 위한 도구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에 대한 본원적 탐구로서, 자연철학에 대한 갈망을 바라봅니다.
고민이 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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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00년 전의 선조들의 기록이네요. 더듬거리며 겨우 읽을 수 있는 글이라 더 맘에 와 닿습니다.
조선 왕조가 망하고, 3.1 운동후의 식민 치하에서, 저 멀리 구라파에서 '절대가 무너지고 모든 게 상대적 이라더라, 그게 새로운 세상의 과학 원리라더라' 는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을까요? 게다가 '온 세상의 도사, 스승들'도 다 잘 모른다더니, 하지만 커다란 도를 접하면, 비록 일부라도 건질 수 있으면 내 삶이, 이 암울한 세상의 답답함이 가실 수 있지 않을까? 새로운 길의 전체 모양과 그 길의 끝이 어디에 닿는지는 비록 알지 못할지라도, 깨달음의 작은 조각이라도 얻고 싶다. 이런 마음으로 여러 강연이 열리고, 참석하고, 이해를 못해도 자료를 끌어모아 강연을 하고, 모르는 한자를 그리듯 수학기호를 따라 그리며 강연을 받아 적고, 집에 와서 뒤적여 보고, 친우들과 뭔 소리인지 따져보고, ..., 그러다가 그 노트는 벽장 한구석으로~... 안타깝고 서글픈 맘입니다. (지금의 우리네는, 당장 나는 별 다른가 싶기도 해서 더 그러네요...)
수학에선 정리의 조건이 아주 중요합니다. 조건이 다르면 정리가 성립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부분적인 지식은 아마도 틀린 지식일 겁니다. 엉뚱한 이해는 차라리 모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지요. 이런 수학으로만 제대로 전달되는 지식이라면,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배우는 이를 괴롭히게 되는지, 모두들 학교에서 지겹도록 경험해 보셨을 겁니다. (공부를 잘한다 해도, 학문의 탑은 늘 저 높이까지 쌓아져 있지요...)
아, 세미나가 다시 시작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의문, 질문은 나누며 서로 공감할 수 있지만, 해답은 나눌 수 없나 봅니다. 그래도 다른 이가 찾은 해답은 좋은 참고가 됩니다, 특히나 여러해 고민한 끝에 다달은 대답은요.)
답글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세미나가 다시 열려서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가지게 될 날을 고대합니다.
세미나 진도가 아직 양자역학은 못 나갔지만, 일제때 상대성이론 강연은 제법 열렸어도, 양자역학 강연은, 특히 대중강연은 열렸을까요? 별로 일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상대성이론이 내용이 더 직관적이고, 듣기에 더 파격적이고, 특히나 제목이 아주 상상을 자극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물론 양자역학에도 "불확정성 원리", "상보성 원리" 라는 대표 선수가 있습니다만, 거기까지 도달하기가 길이 좀 멀지요, 특히나 저 시대에는요.(요즘은 핸드폰이라는 훌륭한 양자역학으로 제작된 사례가 있지만요)
(상대론적 사고방식을 갖고 산다면 어떤 식일까 라는 생각이 문뜩 듭니다.)
도상록이라는 분이 1930년대말쯤에 양자이론에 대해 강연했다는 기록을 확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직접 확인하지 못해서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도상록은 해방정국에서 정치적으로 내몰렸다가 결국 북측으로 갔습니다. 오고가는 말 중에서는 지금 북한이 핵폭탄을 만들어 낼 수 있을만큼 핵물리학을 깊이 탐구할 수 있었던 것은 도상록 덕분이었다고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