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역사지평 보충 1
작성자
자연사랑
작성일
2020-03-09 22:23
조회
2940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제4장의 역사 지평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취리히 대학의 한 세미나실
(2) "그는 거대한 장막의 한쪽 귀퉁이를 들어올렸습니다."
(3) 파동함수가 의미하는 것은?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서 약간의 보충 자료를 올립니다.
장회익 선생님이 이야기하신 2016년 취리히 대학의 어느 세미나실은 아래 사진에 나옵니다.
취리히 대학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이 대학이 아니라 ETH (연방공과대학)을 다녔는데, 당시에는 ETH(에테하)가 박사학위를 따로 줄 수는 없어서 일종의 자매학교인 취리히 대학(UZ)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아래는 아인슈타인의 박사학위증서입니다.
당시 ETH와 취리히 대학의 학생들과 연구소 건물 모습이 찍인 사진이 남아 있습니다.
이 건물과 같은 건물은 아니겠지만, 아인슈타인이 1911년 취리히 대학의 교수로 부임했을 때 바로 이 사진과 비슷한 건물에 연구실이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지금의 모습입니다. 당시에 이 건물이 물리학과 건물이었다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바로 이 곳에서 아래와 같은 현판을 발견했습니다.
1909-1911년에 아인슈타인이 이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모교인 연방공과대학으로 옮기면서 그 후임으로 페트르 드베이어(Peter Debye 1884-1966)가 부임했고, 다시 드베이어가 연방공과대학으로 옮기면서 후임으로 폰라우에가 왔다가 1921년부터 오스트리아 출신의 에르빈 슈뢰딩거가 취리히 대학에 교수로 부임했습니다.
드베이어의 이름 표기는 영어식으로 '드바이'로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네덜란드 사람인데 정확한 발음은 "뻬뜨르 드베이여"에 가깝게 들립니다. (참고: forvo.com)
연방공과대학(ETH)과 취리히 대학(UZ)은 가까워서 드베이에는 ETH로 옮긴 뒤에도 취리히 대학의 교수들과 함께 세미나를 지속했습니다.
여하간 위 사진에 있는 곳이 바로 파동역학이 탄생한 바로 그 장소인 셈입니다. 1925년에 이 곳에서 세미나를 하고 파동역학의 아이디어를 발표했습니다.
(2) 슈뢰딩거가 아무 것도 없는 빈 곳에서 파동역학을 만들어낸 것은 아닙니다. 그 전에 프랑스의 루이 드브로이(Louis de Broglie 1892-1987)가 물질파 개념을 정리해 발표했고, 슈뢰딩거는 드브로이의 학위논문을 공부하면서 물질이 파동일 수도 있다는 아이디어를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것입니다.
더 상세한 이야기는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에 있습니다.
루이 드브로이는 파리 대학, 즉 지금의 소르본느 대학에서 역사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형 모리스 드브로이가 엑스선과 관련된 연구를 하는 물리학자였습니다. 모리스 드브로이가 1911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처음 열린 솔베이 학술회의의 논문과 발표자료를 정리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는데, 루이 드브로이는 형의 작업을 도와주면서 물리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루이 드브로이는 푸앵카레, 로렌츠, 랑주벵, 볼츠만, 기브즈 등의 저서를 탐독하면서 물리학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드브로이는 특히 상대성이론에서 말하는 시간과 공간 개념의 변화에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1913년 이학사 학위(Licence ès sciences)를 받고 졸업하면서 병역으로 군대에 가게 되는데, 1914년 일차대전이 터지면서 1919년까지 제대하지 못하고 전장에 있어야 했습니다. 문선통신을 맡는 자리여서 생명의 위험은 없었지만, 1919년까지 공부를 이어가지 못하고 생각도 전혀 발전시키지 못해서, 이 무렵에 크게 낙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제대한 뒤에 아예 본격적으로 형의 연구실에 다니면서 물리학 연구를 제대로 하기 시작합니다.
종종 오해가 있습니다. 루이 드브로이는 원래 역사학 전공이어서 물리학을 아마추어로 공부했고, 박사학위논문 외에는 별다른 물리학 연구성과가 없다는 식의 풍문입니다.
아래 논문 목록에서 볼 수 있듯이, 1924년에 박사학위논문을 제출하기 전에 이미 20여편의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왕성하게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Oeuvres de Louis de Broglie
대학을 다니고 있는 동안 관심사를 바꾸어 학사학위도 과학 쪽으로 했습니다.
드브로이의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양자이론에 관한 연구"입니다. 좀 당혹스러운 제목이죠. 굳이 따지자면 1924년에는 아직 제대로 된 양자역학도 등장하기 전입니다. 이듬해에야 비로소 보른-하이젠베르크-요르단이 양자역학(Quantenmechanik 크반텐메하닉)을 만들어냈고, 슈뢰딩거가 파동역학(Wellenmechanik 벨렌메하닉)을 발표한 것이 1926년이니까, 아직 양자이론이라고 할 것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면에서 드브로이의 박사학위논문이야말로 양자역학의 출발점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Recherches sur la théorie des quanta, Faculté des Sciences de Paris, 1924, Thèse de doctorat soutenue à Paris le 25 novembre 1924.
1924년 11월 25일에 소르본느 대학 이학부에 학위논문으로 제출되었습니다. 심사위원은 장 페렝(J. Perrin), 에밀 카르탕(E. Cartan), 샤를-빅토르 모겡(Ch. Mauguin), 폴 랑주벵(P. Langevin) 이렇게 네 명이었습니다. 심사위원장이었던 페렝은 원자의 존재를 입증하는 실험으로 1926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저명한 물리학자였습니다. 지도교수였던 폴 랑주벵은 유명한 '쌍둥이 역설'을 고안해 낸 바로 그 사람입니다. 랑주벵은 실험보다는 이론적 정합성에 더 관심을 많이 가졌고, 드브로이의 논문을 깊이 이해했을 뿐 아니라 응원했습니다.
드브로이의 회고에 따르면, 학위논문 심사가 가까운 시점에 랑주벵이 드브로이에게 편지를 보냈거나 전화를 해서, 학위논문 타자본이 더 있는지 물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타자본을 더 만들어 놓은 게 있다고 하니까, 아인슈타인이 자네 논문에 관심을 가질 거라면서 여유분을 보내달라고 해서 타자본을 랑주벵에게 보냈다는 겁니다.
아인슈타인은 랑주벵에게 쓴 답장에서 "Er (de Broglie) hat eine Ecke des großen Schleiers gelüftet."(그는 거대한 커튼의 한쪽 모서리를 들어올렸습니다.)라고 극찬했다는 겁니다.
(출처: Kubli, Fritz. 1971. Louis de Broglie und die Entdeckung der Materiewellen. Archive for History of the Exact Sciences, Berlin 7: 26–68. esp. p. 28.)
(1) 취리히 대학의 한 세미나실
(2) "그는 거대한 장막의 한쪽 귀퉁이를 들어올렸습니다."
(3) 파동함수가 의미하는 것은?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서 약간의 보충 자료를 올립니다.
장회익 선생님이 이야기하신 2016년 취리히 대학의 어느 세미나실은 아래 사진에 나옵니다.
취리히 대학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이 대학이 아니라 ETH (연방공과대학)을 다녔는데, 당시에는 ETH(에테하)가 박사학위를 따로 줄 수는 없어서 일종의 자매학교인 취리히 대학(UZ)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아래는 아인슈타인의 박사학위증서입니다.
당시 ETH와 취리히 대학의 학생들과 연구소 건물 모습이 찍인 사진이 남아 있습니다.
이 건물과 같은 건물은 아니겠지만, 아인슈타인이 1911년 취리히 대학의 교수로 부임했을 때 바로 이 사진과 비슷한 건물에 연구실이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지금의 모습입니다. 당시에 이 건물이 물리학과 건물이었다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바로 이 곳에서 아래와 같은 현판을 발견했습니다.
1909-1911년에 아인슈타인이 이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모교인 연방공과대학으로 옮기면서 그 후임으로 페트르 드베이어(Peter Debye 1884-1966)가 부임했고, 다시 드베이어가 연방공과대학으로 옮기면서 후임으로 폰라우에가 왔다가 1921년부터 오스트리아 출신의 에르빈 슈뢰딩거가 취리히 대학에 교수로 부임했습니다.
드베이어의 이름 표기는 영어식으로 '드바이'로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네덜란드 사람인데 정확한 발음은 "뻬뜨르 드베이여"에 가깝게 들립니다. (참고: forvo.com)
연방공과대학(ETH)과 취리히 대학(UZ)은 가까워서 드베이에는 ETH로 옮긴 뒤에도 취리히 대학의 교수들과 함께 세미나를 지속했습니다.
여하간 위 사진에 있는 곳이 바로 파동역학이 탄생한 바로 그 장소인 셈입니다. 1925년에 이 곳에서 세미나를 하고 파동역학의 아이디어를 발표했습니다.
(2) 슈뢰딩거가 아무 것도 없는 빈 곳에서 파동역학을 만들어낸 것은 아닙니다. 그 전에 프랑스의 루이 드브로이(Louis de Broglie 1892-1987)가 물질파 개념을 정리해 발표했고, 슈뢰딩거는 드브로이의 학위논문을 공부하면서 물질이 파동일 수도 있다는 아이디어를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것입니다.
더 상세한 이야기는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에 있습니다.
루이 드브로이는 파리 대학, 즉 지금의 소르본느 대학에서 역사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형 모리스 드브로이가 엑스선과 관련된 연구를 하는 물리학자였습니다. 모리스 드브로이가 1911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처음 열린 솔베이 학술회의의 논문과 발표자료를 정리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는데, 루이 드브로이는 형의 작업을 도와주면서 물리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루이 드브로이는 푸앵카레, 로렌츠, 랑주벵, 볼츠만, 기브즈 등의 저서를 탐독하면서 물리학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드브로이는 특히 상대성이론에서 말하는 시간과 공간 개념의 변화에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1913년 이학사 학위(Licence ès sciences)를 받고 졸업하면서 병역으로 군대에 가게 되는데, 1914년 일차대전이 터지면서 1919년까지 제대하지 못하고 전장에 있어야 했습니다. 문선통신을 맡는 자리여서 생명의 위험은 없었지만, 1919년까지 공부를 이어가지 못하고 생각도 전혀 발전시키지 못해서, 이 무렵에 크게 낙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제대한 뒤에 아예 본격적으로 형의 연구실에 다니면서 물리학 연구를 제대로 하기 시작합니다.
종종 오해가 있습니다. 루이 드브로이는 원래 역사학 전공이어서 물리학을 아마추어로 공부했고, 박사학위논문 외에는 별다른 물리학 연구성과가 없다는 식의 풍문입니다.
아래 논문 목록에서 볼 수 있듯이, 1924년에 박사학위논문을 제출하기 전에 이미 20여편의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왕성하게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Oeuvres de Louis de Broglie
대학을 다니고 있는 동안 관심사를 바꾸어 학사학위도 과학 쪽으로 했습니다.
드브로이의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양자이론에 관한 연구"입니다. 좀 당혹스러운 제목이죠. 굳이 따지자면 1924년에는 아직 제대로 된 양자역학도 등장하기 전입니다. 이듬해에야 비로소 보른-하이젠베르크-요르단이 양자역학(Quantenmechanik 크반텐메하닉)을 만들어냈고, 슈뢰딩거가 파동역학(Wellenmechanik 벨렌메하닉)을 발표한 것이 1926년이니까, 아직 양자이론이라고 할 것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면에서 드브로이의 박사학위논문이야말로 양자역학의 출발점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Recherches sur la théorie des quanta, Faculté des Sciences de Paris, 1924, Thèse de doctorat soutenue à Paris le 25 novembre 1924.
1924년 11월 25일에 소르본느 대학 이학부에 학위논문으로 제출되었습니다. 심사위원은 장 페렝(J. Perrin), 에밀 카르탕(E. Cartan), 샤를-빅토르 모겡(Ch. Mauguin), 폴 랑주벵(P. Langevin) 이렇게 네 명이었습니다. 심사위원장이었던 페렝은 원자의 존재를 입증하는 실험으로 1926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저명한 물리학자였습니다. 지도교수였던 폴 랑주벵은 유명한 '쌍둥이 역설'을 고안해 낸 바로 그 사람입니다. 랑주벵은 실험보다는 이론적 정합성에 더 관심을 많이 가졌고, 드브로이의 논문을 깊이 이해했을 뿐 아니라 응원했습니다.
드브로이의 회고에 따르면, 학위논문 심사가 가까운 시점에 랑주벵이 드브로이에게 편지를 보냈거나 전화를 해서, 학위논문 타자본이 더 있는지 물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타자본을 더 만들어 놓은 게 있다고 하니까, 아인슈타인이 자네 논문에 관심을 가질 거라면서 여유분을 보내달라고 해서 타자본을 랑주벵에게 보냈다는 겁니다.
아인슈타인은 랑주벵에게 쓴 답장에서 "Er (de Broglie) hat eine Ecke des großen Schleiers gelüftet."(그는 거대한 커튼의 한쪽 모서리를 들어올렸습니다.)라고 극찬했다는 겁니다.
(출처: Kubli, Fritz. 1971. Louis de Broglie und die Entdeckung der Materiewellen. Archive for History of the Exact Sciences, Berlin 7: 26–68. esp. p.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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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기본 단위를 흔히 '光子'라 합니다. 영어 photon의 번역어인데, 일본어로는 こうし[코오시]라 읽지만, 한국어로는 '광자'가 되어서 좀 어색한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오미자(五味子), 결명자(決明子)처럼 "씨앗"이라는 의미로 "~자"로 끝나는 단어들이 좀 있긴 하지만, 일상어에서는 '광자'라는 말이 입에 잘 붙지 않습니다.
한국물리학회가 공식으로 채택한 용어는 "빛알"입니다. 낟알의 모형으로 불리는 것을 모두 "~알"로 끝나는 말로 정했습니다. 소리와 관련된 기본 양자인 phonon은 일본어식으로 "음향자"라고 했는데, 새로 바뀐 용어는 "소리알"입니다. 파동이 한쪽에 몰려서 한 동안 모양을 유지하면서 움직이는 것을 영어로 soliton이라 하고, 이전에는 "고립자"라고 했는데, 새로 바뀐 용어는 "홀로알"입니다.
저는 '광자', '음향자', '고립자'보다는 '빛알' '소리알' 홀로알'이 더 편하고 익숙합니다. 대학원생 시절부터 뒤의 용어를 더 많이 사용했기 때문인 듯 합니다.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빛알' 개념을 처음 도입할 때 사용한 용어는 Lichtquanten(리히트크반텐) 즉 빛양자입니다. 1920년대말부터는 빛의 기본 단위를 photon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참고: H. Kragh (2014) Photon: New light on an old name)
조금 과하긴 하지만, #72번 글에 막스 플랑크 이야기를 올려 놓았습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201-203쪽에 나오는 이야기를 조금 더 상세하게 풀어 놓은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플랑크가 1918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아서, 2018년에 플랑크 노벨상 100주년을 빙자하여 한국물리학회에서 발간하는 웹진 <물리학과 첨단기술>에 막스 플랑크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모아 놓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 주제의 객원편집을 맡아서 논문 몇 편을 모았습니다. 제가 #72번 글에 올려 놓은 것은 거기에 실린 제 원고입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203-204쪽에 보어의 원자모형 이야기가 잠시 언급됩니다. 이에 대한 조금 더 상세한 역사 이야기를 써 놓은 게 있습니다.
보어 원자 모형의 탄생 1913
원래 과학동아에 실었던 원고인데, 녹색아카데미 홈페이지 웹진을 위해 눈사람님(neomay3님)이 멋지게 편집해 주셨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수식없고 재밌는 과학사 이야기가, 저는 좋습니다! ^^;;; ㅋ
잘 읽으셨다니 고맙습니다. 지난 번에 제가 발제를, 굳이 수식이 포함된 뒷부분보다 역사 지평을 중심으로 해도 되지 않겠는가 말씀드렸는데, 그 방법도 나쁘지 않을 듯 싶습니다.
상태를 '상태함수'로 나타낸다는 발상에 대해서는 곧 글을 올려 보겠습니다.
세미나가 연기됐다고 한숨 돌렸는데, 벌써 다담주네요. 제가 내놓을 거라고는 저 강의실 앞에 선생님께서 서계신 사진이랑, 쯔바이슈타인 까페 사진 밖에 없을지도. ㅠ.ㅠ
요즘 자연철학 책만 열면 한숨이 푹푹 나와서... 정말 '역사지평'만 하게 될지도 몰라요... -,-;;;
세미나 준비에 대한 저의 조언은, 다른 것은 읽지 말고 (가령 제가 올린 보충의 글들도)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텍스트에만 집중해 보시라는 겁니다. 저는 이 텍스트를 대여섯 번 이상 보았는데 볼수록 텍스트가 아주 매끄럽고 명료합니다. 그리고 '역사 지평'에 담긴 내용만으로도 아주 심각하고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세미나 한 번으로 이 장을 모두 정리하기는 쉽지 않으리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