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의 사과와 과학사 속의 신화들
작성자
자연사랑
작성일
2020-03-06 12:19
조회
3038
(윌리엄 부그로(William Bouguereau)의 Temptation 1880)
글쓰기에는 더하기가 있고 빼기가 있습니다. 어떤 글쓰기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의미 있는 덧붙임을 통해 생산적인 담론을 펼칩니다. 어떤 글쓰기는 기존의 이야기를 비판하고 재구성하고 해체함으로써 파괴적인 담론을 펼칩니다.
물론 더하기와 빼기는 그렇게 칼로 무자르듯이 갈리지 않고, 더하기와 빼기는 마치 바둑판의 바둑알들처럼 흑과 백이 교묘하게 얽혀 있기 마련입니다.
시인처럼님이 제가 뉴턴에 대한 신화들을 비판하는 글을 올리자, 과학사학자들은 늘상 그렇게 해체하는 일에 앞장서는지 물어보셨는데, 뜨끔 했습니다. 밤 늦은 시간에 잠들지 못하고 서둘러 변명처럼, 뉴턴의 신화화를 '해체'하고 역사적 실체를 규명하려는 노력의 의미를 쓰긴 했지만, 이 답글이 제가 공부해 온 분야에 대해 새삼 성찰할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에 대한 어느 과학사학자의 서평이 이런 문제를 잘 드러내 주는 면이 있습니다. 장회익 선생님의 "역사 지평"은 역사학적으로 엄격한 기준에 따른 것이 아니라 물리학자이자 자연철학자인 저자의 관점에서 본 역사이기 때문에 자의적인 취사선택의 측면도 있고 신화화된 이미지의 반복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난 30년 가까이 장회익 선생님께 배워 오면서 느끼는 것이 바로 그 '더하기의 글쓰기'가 가지는 힘과 희망입니다. 과학사학자, 더 나아가 과학기술자의 관점은 대체로 비판과 해체와 재구성에 집중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빼기의 글쓰기'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힘이 빠지게 만드는 역효과가 분명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과학사학자들의 노력이 과학의 본성에 대해 더 적절하고 세련된 인식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놓아버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과학사학자 코스타스 캄푸라키스와 로날드 넘버즈가 함께 편집하여 2015년에 낸 책이 있습니다. 논문집의 성격은 아니고 기획된 책에 각 주제의 전문가를 섭외해서 챕터를 쓰게 하는 거였죠. 책 앞에 보면, 2009년에 캄푸라키스가 이런 책을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그 해에 넘버즈가 편집하여 낸 책 Galileo Goes to Jail and Other Myths about Science and Religion을 읽으면서부터였습니다. 이 책은 갈릴레오가 감옥에 간 것은 가톨릭 교회의 탄압 때문이었다는 오래된 '신화'가 왜 잘못되었는지 보여주는 등 25개의 신화를 각 주제의 전문가에게 청탁하여 낸 책이었습니다. 캄푸라스키는 과학의 역사와 과학교육에 널리 퍼져 있는 신화들에 대해서도 이런 책을 속편으로 내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넘버즈에게 말했고, 2012년 무렵에는 기획이 무르익었습니다. 2014년에 이 주제로 이틀 동안 집중적인 논문발표회가 워싱턴 대학과 리 대학에서 열렸고, 그 원고들을 모으고 다듬어 드디어 2015년에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그 제목은 <뉴턴의 사과와 과학사의 신화들>이었습니다.
Newton’s Apple and Other Myths about Science
이 책에 모여 있는 27개의 신화들의 제목을 살펴보면, 과학사에 의외로 신화, 즉 잘못된 상식과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I. Medieval and Early Modern Science
Myth 1. That There Was No Scientific Activity between Greek Antiquity and the Scientific Revolution [Michael H. Shank]
Myth 2. That before Columbus, Geographers and Other Educated People Thought the Earth Was Flat [Lesley B. Cormack]
Myth 3. That the Copernican Revolution Demoted the Status of the Earth [Michael N. Keas]
Myth 4. That Alchemy and Astrology Were Superstitious Pursuits That Did Not Contribute to Science and Scientific Understanding [Lawrence M. Principe]
Myth 5. That Galileo Publicly Refuted Aristotle’s Conclusions about Motion by Repeated Experiments Made from the Campanile of Pisa [John L. Heilbron]
Myth 6. That the Apple Fell and Newton Invented the Law of Gravity, Thus Removing God from the Cosmos [Patricia Fara]
II. Nineteenth Century
Myth 7. That Friedrich Wöhler’s Synthesis of Urea in 1828 Destroyed Vitalism and Gave Rise to Organic Chemistry [Peter J. Ramberg]
Myth 8. That William Paley Raised Scientific Questions about Biological Origins That Were Eventually Answered by Charles Darwin [Adam R. Shapiro]
Myth 9. That Nineteenth-Century Geologists Were Divided into Opposing Camps of Catastrophists and Uniformitarians [Julie Newell]
Myth 10. That Lamarckian Evolution Relied Largely on Use and Disuse and That Darwin Rejected Lamarckian Mechanisms [Richard W. Burkhardt Jr.]
Myth 11. That Darwin Worked on His Theory in Secret for Twenty Years, His Fears Causing Him to Delay Publication [Robert J. Richards]
Myth 12. That Wallace’s and Darwin’s Explanations of Evolution Were Virtually the Same [Michael Ruse]
Myth 13. That Darwinian Natural Selection Has Been “the Only Game in Town” [Nicolaas Rupke]
Myth 14. That after Darwin (1871), Sexual Selection Was Largely Ignored until Robert Trivers (1972) Resurrected the Theory [Erika Lorraine Milam]
Myth 15. That Louis Pasteur Disproved Spontaneous Generation on the Basis of Scientific Objectivity [Garland E. Allen]
Myth 16. That Gregor Mendel Was a Lonely Pioneer of Genetics, Being Ahead of His Time [Kostas Kampourakis]
Myth 17. That Social Darwinism Has Had a Profound Influence on Social Thought and Policy, Especially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Ronald L. Numbers]
III. Twentieth Century
Myth 18. That the Michelson-Morley Experiment Paved the Way for the Special Theory of Relativity [Theodore Arabatzis and Kostas Gavroglu]
Myth 19. That the Millikan Oil-Drop Experiment Was Simple and Straightforward [Mansoor Niaz]
Myth 20. That Neo-Darwinism Defines Evolution as Random Mutation Plus Natural Selection [David J. Depew]
Myth 21. That Melanism in Peppered Moths Is Not a Genuine Example of Evolution by Natural Selection [David W. Rudge]
Myth 22. That Linus Pauling’s Discovery of the Molecular Basis of Sickle-Cell Anemia Revolutionized Medical Practice [Bruno J. Strasser]
Myth 23. That the Soviet Launch of Sputnik Caused the Revamping of American Science Education [John L. Rudolph]
IV. Generalizations
Myth 24. That Religion Has Typically Impeded the Progress of Science [Peter Harrison]
Myth 25. That Science Has Been Largely a Solitary Enterprise [Kathryn M. Olesko]
Myth 26. That the Scientific Method Accurately Reflects What Scientists Actually Do [Daniel P. Thurs]
Myth 27. That a Clear Line of Demarcation Has Separated Science from Pseudoscience [Michael D. Gordin]
위의 그림은 <뉴턴의 사과와 과학사 속의 신화들>의 표지입니다. 사과라는 게 독특합니다. 기독교 성서에 나오는 신화에 따르면, 신이 처음 여성 한 명과 남성 한 명을 만들었는데, 그 낙원에서 다른 것은 다 허용하지만, 어떤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했다죠. 그 나무를 흔히 사과나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라틴어로 '악'을 의미하는 malum과 '사과'라는 뜻의 malus가 아주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이 책 <뉴턴의 사과와 과학사 속의 신화들>에 나옵니다.
맨 위에 올려 놓은 부그로의 그림에는 사과를 들고 있는 여성과 그를 바라보는 어린 아이가 나옵니다.
뉴턴은 신의 명령을 되살리는 상징적 의미에서 사과를 강조했을지도 모릅니다.
일반상대성이론의 교과서로 정평이 나 있는 미즈너-쏜-윌러의 책 <중력>의 표지에도 사과가 나옵니다.
윌러는 이 사과의 비유를 들어 검은 구멍(black hole)과 흰 구멍(white hole)과 벌레 구멍(worm hole)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기도 했습니다.
새삼 뉴턴의 사과가 지니는 여러 의미의 중층을 고민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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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고 이런 책을 세미나 하면 좋겠습니다. 어디가서 아는 척 하는데 큰 도움이 될 듯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