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양자역학의 기본공리
작성자
자연사랑
작성일
2020-02-19 11:36
조회
6558
양자역학이란 이름은 여러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명 높은 이론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양자역학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좀 난감할 수 있습니다.
지금 가장 적절한 대답으로 확립된 것은 양자역학의 '공리'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공준'과 '공리'가 있었고, 그로부터 여러 '정리'들이 연역적으로 유도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가장 세련된 연역체계는 그런 '공리계'로 구성하는 것이 모범으로 되어 있습니다.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도 유클리드 기하학의 형식을 따라 '정의', '공리' 세 개, 여러 정리들로 이루어졌습니다.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위의 그림에서 axiomata, sive leges motus라고 제목이 달려 있는데, 영어로 axiom or laws of motion, 한국어로 "공리, 또는 운동의 법칙"을 의미합니다. 즉 뉴턴의 법칙은 여러 다른 법칙들, 가령 보일의 법칙, 옴의 법칙, 쿨롱의 법칙 등등과 같이 어떤 하나의 관계식을 나타내는 수준이 전혀 아닙니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공리'입니다. 따라서 뉴턴의 운동 법칙 셋은 증명하거나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corollarium은 영어로 corollary 한국어로 '따름정리'입니다. 주요 주장을 이탤릭체로 써 놓고 그 밑에 증명을 제시하는 식입니다. 증명 끝에는 Q.E.D.(quod erat demonstrandum) 같은 말을 씁니다. "그것이 증명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제8장에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될 스피노자도 자신의 <윤리학>을 그렇게 유클리드 기하학처럼 공리계로 서술했습니다.
(스피노자의 <윤리학>)
공리(axiomata) 7개가 따로 증명 없이 제시된 뒤에 명제(propositio)들이 나열됩니다. 명제에는 증명(demonstratio)이 따라 붙는데, 가령 '명제 III'에 있는 증명 끝 부분에 'Q.E.D.'가 멋진 글꼴로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양자역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간명하게 양자역학을 말하기 위해서는 공리계인 척 하면서 공리들을 제시하면 됩니다.
표준적인 힐버트 공간 형식체계의 공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림 출처: J. Bain의 강의 Quantum Mechanics and Information)
이 다섯 개의 공리를 차분하게 설명해 나가려면 물리학과의 양자역학 강의에서는 두세 주 정도의 시간이 소모되고, 강의를 듣는다 해도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학부 수준의 양자역학 강의에서는 이 공리들을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고 일단 문제풀이부터 열심히 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몇 가지 걸림돌이 눈에 띕니다. 우선 힐버트 공간이라는 수학적 집합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야 합니다. 연산자도 알아야 하는데, 그 중에서도 자기수반 연산자라는 개념이 필요합니다. 또 고유값, 고유벡터라는 개념이 필요합니다. 보른의 규칙을 이해하려면 확률 이론을 좀 알아야 합니다. 내적이라는 곱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장회익 선생님은 표준적인 공리들 대신에 더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는 공리를 새로 제안하셨습니다.
이 중 공리4는 뒤에 더 상세하게 논의되므로, 일단 여기에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주목할 사항은 힐버트 공간이라는 말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상 더 엄밀하게 수학적으로 다듬는다면 푸리에 변환과 관련되는 맥락에서 힐버트 공간 이론이 등장하게 되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선택입니다.
[저는 푸리에 변환보다는 벡터 공간이 훨씬 편리하고 익숙합니다. 특히 양자계산이라는 분야가 크게 각광을 받으면서 벡터 개념이 훨씬 더 널리 사용되고 있어서 푸리에 변환을 써서 기존의 양자역학 공리를 대치하는 것이 얼마나 더 유용할지 의심이 가긴 합니다. 그러나 아주 최근까지도 양자역학의 공리들을 재구성하고 새로운 언어로 제안하고 다듬는 작업이 국제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어서, 장회익 선생님의 연구도 깊이 고민해 봐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공리4는 매우 독창적이어서 양자역학의 측정문제라는 난제를 해결하는 데 아주 중요한 기여를 할 것입니다.]
공리1부터 공리3에서 특기할 또 다른 점은 슈뢰딩거 방정식이 공리 속에 들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선택과 선호의 문제입니다. 슈뢰딩거 방정식이 어떻게 나왔는지 개의치 않고 그냥 천재 물리학자가 길을 밝혀 주었으니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여러 선택지들 사이에서 궁싯거리다 보면 그런 선택들이 각각 어떤 함의를 지니는지 점점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위치와 운동량과 에너지를 푸리에 변환을 이용하여 확정하고 나면, 양자역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슈뢰딩거 방정식이 '유도'되어 나온다는 이야기인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더 보충하겠습니다.
이 접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입자-파동 이중성과 불확정성 원리 같은 것을 근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가 여부입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220쪽에 "오랫동안 빛과 물질이 입자냐 파동이냐 하는 부적절한 관념에 매여 불필요한 공방만 주고받아왔다."라는 서술이나 221쪽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는 ... 간편하게 얻어낼 수 있다."라는 서술을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세 개의 공리로 구성된 관념 틀을 받아들이면 양자역학의 난해한 내용들이 별 무리 없이 이해된다."(220쪽)는 서술은 과장이 아닙니다.
지금 가장 적절한 대답으로 확립된 것은 양자역학의 '공리'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공준'과 '공리'가 있었고, 그로부터 여러 '정리'들이 연역적으로 유도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가장 세련된 연역체계는 그런 '공리계'로 구성하는 것이 모범으로 되어 있습니다.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도 유클리드 기하학의 형식을 따라 '정의', '공리' 세 개, 여러 정리들로 이루어졌습니다.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위의 그림에서 axiomata, sive leges motus라고 제목이 달려 있는데, 영어로 axiom or laws of motion, 한국어로 "공리, 또는 운동의 법칙"을 의미합니다. 즉 뉴턴의 법칙은 여러 다른 법칙들, 가령 보일의 법칙, 옴의 법칙, 쿨롱의 법칙 등등과 같이 어떤 하나의 관계식을 나타내는 수준이 전혀 아닙니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공리'입니다. 따라서 뉴턴의 운동 법칙 셋은 증명하거나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corollarium은 영어로 corollary 한국어로 '따름정리'입니다. 주요 주장을 이탤릭체로 써 놓고 그 밑에 증명을 제시하는 식입니다. 증명 끝에는 Q.E.D.(quod erat demonstrandum) 같은 말을 씁니다. "그것이 증명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제8장에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될 스피노자도 자신의 <윤리학>을 그렇게 유클리드 기하학처럼 공리계로 서술했습니다.
(스피노자의 <윤리학>)
공리(axiomata) 7개가 따로 증명 없이 제시된 뒤에 명제(propositio)들이 나열됩니다. 명제에는 증명(demonstratio)이 따라 붙는데, 가령 '명제 III'에 있는 증명 끝 부분에 'Q.E.D.'가 멋진 글꼴로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양자역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간명하게 양자역학을 말하기 위해서는 공리계인 척 하면서 공리들을 제시하면 됩니다.
표준적인 힐버트 공간 형식체계의 공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A) 대상계의 상태는 힐버트 공간의 원소인 상태벡터로 서술된다.
(B) 물리량은 그 힐버트 공간에서 작용하는 자기수반 연산자로 서술된다.
(C) 측정을 제외한 상태의 변화는 슈뢰딩거 방정식을 따른다.
(D) 특정 상태에 있는 대상계에 어떤 물리량을 측정하면, 그 물리량의 연산자의 고유값 중 하나가 검출되며, 그 확률은 상태를 나타내는 벡터와 고유벡터의 곱(내적)의 제곱으로 주어진다. [보른의 규칙]
(E) 측정 직후의 대상계의 상태는 검출된 고유값에 대응하는 고유벡터로 서술된다.
(그림 출처: J. Bain의 강의 Quantum Mechanics and Information)
이 다섯 개의 공리를 차분하게 설명해 나가려면 물리학과의 양자역학 강의에서는 두세 주 정도의 시간이 소모되고, 강의를 듣는다 해도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학부 수준의 양자역학 강의에서는 이 공리들을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고 일단 문제풀이부터 열심히 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몇 가지 걸림돌이 눈에 띕니다. 우선 힐버트 공간이라는 수학적 집합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야 합니다. 연산자도 알아야 하는데, 그 중에서도 자기수반 연산자라는 개념이 필요합니다. 또 고유값, 고유벡터라는 개념이 필요합니다. 보른의 규칙을 이해하려면 확률 이론을 좀 알아야 합니다. 내적이라는 곱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장회익 선생님은 표준적인 공리들 대신에 더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는 공리를 새로 제안하셨습니다.
공리1: 존재물의 상태는 시공간의 함수 $\Psi(x,t)$로 표현된다. 존재물의 위치 $x$의 기대값은
$$ \langle x \rangle = \int \Psi^* x \Psi dxdt$$
로 주어진다.
공리2: 존재물의 운동량-에너지 공간은 함수 $\Psi(x,t)$의 푸리에 변환으로 표현된다.
$$\Phi (k, \omega)=\frac{1}{2\pi}\int \Psi e^{-i(kx-\omega t)}dxdt$$
운동량과 에너지의 기대값은
$$\begin{align}
\langle k\rangle &= \int \Phi^* k \Phi dk d\omega\\
\langle \omega\rangle &= \int \Phi^* \omega \Phi dk d\omega \end{align}$$
로 주어진다.
공리3: 고전역학적 물리량들의 관계와 위의 기대값들의 관계는 일대일 대응한다.
공리4: '측정'에서 상태의 변화
대상이 상태
$$\Psi = \sum_{i} c_i \phi_i$$
에 있을 때, 지점 $j$에 해당하는 위치에 '측정장치'를 놓아 대상과 접촉시키면
(1) 확률 $|c_j |^2$으로 '측정장치'에 흔적을 남기고 대상은 $$\Psi'=\phi_j$$로 전환되거나
(2) 확률 $1-|c_j |^2$으로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phi_j$가 빠진 새로운 상태 $$\Psi'' = \sum_{i} c'_i \phi_i$$로 전환된다.
이 중 공리4는 뒤에 더 상세하게 논의되므로, 일단 여기에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주목할 사항은 힐버트 공간이라는 말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상 더 엄밀하게 수학적으로 다듬는다면 푸리에 변환과 관련되는 맥락에서 힐버트 공간 이론이 등장하게 되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선택입니다.
[저는 푸리에 변환보다는 벡터 공간이 훨씬 편리하고 익숙합니다. 특히 양자계산이라는 분야가 크게 각광을 받으면서 벡터 개념이 훨씬 더 널리 사용되고 있어서 푸리에 변환을 써서 기존의 양자역학 공리를 대치하는 것이 얼마나 더 유용할지 의심이 가긴 합니다. 그러나 아주 최근까지도 양자역학의 공리들을 재구성하고 새로운 언어로 제안하고 다듬는 작업이 국제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어서, 장회익 선생님의 연구도 깊이 고민해 봐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공리4는 매우 독창적이어서 양자역학의 측정문제라는 난제를 해결하는 데 아주 중요한 기여를 할 것입니다.]
공리1부터 공리3에서 특기할 또 다른 점은 슈뢰딩거 방정식이 공리 속에 들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선택과 선호의 문제입니다. 슈뢰딩거 방정식이 어떻게 나왔는지 개의치 않고 그냥 천재 물리학자가 길을 밝혀 주었으니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여러 선택지들 사이에서 궁싯거리다 보면 그런 선택들이 각각 어떤 함의를 지니는지 점점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위치와 운동량과 에너지를 푸리에 변환을 이용하여 확정하고 나면, 양자역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슈뢰딩거 방정식이 '유도'되어 나온다는 이야기인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더 보충하겠습니다.
이 접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입자-파동 이중성과 불확정성 원리 같은 것을 근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가 여부입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220쪽에 "오랫동안 빛과 물질이 입자냐 파동이냐 하는 부적절한 관념에 매여 불필요한 공방만 주고받아왔다."라는 서술이나 221쪽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는 ... 간편하게 얻어낼 수 있다."라는 서술을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세 개의 공리로 구성된 관념 틀을 받아들이면 양자역학의 난해한 내용들이 별 무리 없이 이해된다."(220쪽)는 서술은 과장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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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는 유클리드기하학같은 데서만 있는 줄 알았는데, 양자역학에서 갑자기 나와서 좀 당황&놀랐습니다.
(아직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구요.)
열역학도 네 개의 공리를 기반으로 합니다. 흔히 열역학 법칙이라 부릅니다. 가령 1909년에 카라테오도리가 열역학을 엄밀하게 공리계로 구성하려는 시도를 한 이래 여러 사람들이 열역학도 그렇게 구성하려고 노력해 오고 있습니다.
C. Carathéodory (1909) "Untersuchungen über die Grundlagen der Thermodynamik" Mathematische Annalen volume 67, 355–386.
물리학에서 어떤 공리가 틀렸다고 판명된 적은 없나요? 공리가 옳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수학의 공리와 물리학의 공리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매우 중요하고 또 심오한 질문입니다. 우선은 단순한 대답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수학이든 물리학이든 이른바 공리체계(axiomatic system)로 구성된다면, '공리(公理 axiom)'는 연역적인 논리 구성에서 전제 또는 출발점 또는 가정입니다. 공리와 정의를 내세운 뒤에, 연역적 추론 규칙에 따라 다양한 정리(定理 theorem)을 얻어낼 뿐입니다. 따라서 "이러저러한 공리가 틀렸다"라는 말은 대개 성립하지 않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Axiom
기하학의 유명한 예를 들면, 고대 그리스로부터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가 다섯 개의 공리(공준)를 출발점으로 삼는 체계를 만들었고, 이것이 2천 년 넘게 유지되어 왔습니다. 다섯 개의 공리 중 평행선의 공리는 어쩐지 공리가 아니라 나머지 네 개의 공리들로부터 연역적으로 유도되는 정리가 아닐까 생각한 사람들이 온갖 방법으로 평행선 공리를 유도해 보려 했습니다. 실패의 실패를 거듭하다가, 19세기에 이르러 그냥 평행선의 공리를 버리고 그 대신 다른 공리로부터 출발하자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로바체프스키, 보요이, 가우스, 리만 등이 그렇게 소위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만들어냈습니다. 즉 공리를 다르게 선택함으로써 앞뒤가 맞는 다른 수학이론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학자들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일종의 게임으로 생각했고 그것이 정말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맞아 떨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실상 수학사를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 말이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러다가 아인슈타인이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상대성이론에 직접 도입하면서 정말로 세상이 비유클리드 기하학으로 기술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젠 유클리드 기하학을 믿을 수 없게 된 셈입니다.
물리학에서는 가령 1850년대에 열역학의 공리를 두 개로 선택하여 이야기를 풀어갔는데, 20세기 초에 들어와서 위의 답글에 있는 것처럼 두 개의 공리를 추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하고, 지금은 네 개의 공리를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물리학에서 '공리'가 정말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은 아주 어렵고 복잡한 문제입니다. 1919년에 에딩턴과 다이슨의 일식관측으로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도입한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입증되었다는 말에 어폐가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 --> 일반상대성이론 --> 태양 주변의 별빛의 운동 계산 --> 별빛이 휠 수 있다 --> 그런데 일식관측에서 별빛이 휘어진다는 증거가 나왔다 --> 따라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들이 옳고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가 틀렸다"와 같은 논리적 전개는 옳지 않습니다. 이 흐름이 만들어지려면 수없이 많은 보조가설과 추가적인 조건과 상황이 맞아 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는 이런 것이 일종의 규약 내지 약속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문제를 들고 나오면 이야기가 더 길어져서 일단은 여기에서 멈추겠습니다.
늦은밤에 답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질문을 해 주신 것에 제가 오히려 감사를 드립니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수학에서 ‘공리’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철학에서는 ‘공리’, ‘원리’, ‘바탕관념’, ‘기본 전제’, ‘근본 법칙’ 등과 같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그 사이에서도 역할과 중요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뽀앙까레의 규약 얘기도 기대하겠습니다 ! (이 사람의 표기는 몇 번이나 바뀐 건지 모르겠습니다 ㅠㅠ)
제가 옥현님이 질문하신 내용과 조금 맥락이 다른 답변을 드렸습니다. 물리학에서 공리가 틀린 것으로 나온 적이 없는가 하고 질문하셨는데, 심학제2도와 심학제3도가 바로 그런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뉴턴은 세 개의 공리(운동법칙)에서 시작하여 고전역학의 체계를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전기-자기-빛의 경우를 따지다 보니 두 번째 공리(운동법칙)인 $$\frac{dp}{dt}=F$$가 옳지 않음을 알게 되어서 이를 $$\frac{d}{dt}\frac{mv}{\sqrt{1-v^2 / c^2}}=F$$로 수정하자는 것이 상대성이론의 제안입니다. 그런 면에서 고전역학의 ‘공리’가 틀렸기 때문에 상대성이론으로 옮겨갔다고 말해도 되겠습니다.
또는 장회익 선생님이 ‘바탕관념’이라고 이름붙인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가정 또는 전제도 일종의 공리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성이론에서 4차원 시공간을 새로 제시했다는 것은 시간 1차원과 공간 3차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고전역학의 세계관이 틀렸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푸앵카레의 규약주의를 받아들이면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공리들의 선택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전역학의 ‘공리’에서 비롯한 여러 예측이 실제 상황에서 맞지 않기 때문에 1920년대 중엽에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체계가 제시되었고, 여기에서는 고전역학의 ‘공리’를 버리고 새로운 ‘공리’를 채택하게 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심학제4도의 내용입니다.
다만 장회익 선생님이 <자연철학 강의>에서 제안하신 새로운 공리는 기존의 양자역학의 공리와 충돌하지 않고, 이를 재구성하여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