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정리] 새자연철학세미나 4회 - "새 자연철학의 문제의식 : 통합적 앎의 필요성 3"
모임 정리
앎의 바탕 구도
작성자
neomay33
작성일
2021-10-31 20:51
조회
3210
새 자연철학세미나 4회
"새 자연철학의 문제의식 : 통합적 앎의 필요성 3"
세미나에서 나눴던 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해보았습니다. 채팅창에서 나눈 토론도 중요한 내용이 많아서 일부 포함했습니다. 제가 메모할 수 있는 것만 정리하다보니 빠진 부분이 많은데요.(특히 머리 발표는 절반도 못 옮겼습니다.) 혹시 메모하신 분 계시면 이곳에 함께 공유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추가 질문이나 토론거리, 토론 메모 다 좋습니다.
- 때 : 2021년 10월 28일 목요일 오후 8시 30분 ~ 10시 30분
- 주제 : 새 자연철학의 문제 의식 : 통합적 앎의 필요성 3 – 서구학문과 동양학문, 사실과 당위
- 논의 자료들
- 『삶과 온생명』 1장 “동서양의 학문 세계, 어떻게 서로 다른가 – 동서양 학문의 연원적 특성” (개정판, 현암사, 2014, pp.17-48)
- (초판, 솔, 1998, pp.13-41)
- 『과학과 메타과학』 10장 “인간의 우주적 존재 양상” (개정판, 현암사, 2012, pp.281-309)
- (초판, 지식산업사, 1990, pp.211-234)
- 『자연철학 강의』 여는 글 “⟪성학십도⟫와 ⟨심우십도⟩” (추수밭, 2019, pp.12-33)
- 『삶과 온생명』 1장 “동서양의 학문 세계, 어떻게 서로 다른가 – 동서양 학문의 연원적 특성” (개정판, 현암사, 2014, pp.17-48)
<머리 발표> “동서양의 학문 세계, 어떻게 서로 다른가 – 동서양 학문의 연원적 특성”을 읽고. (김*람. 성리학 전공)
지식을 대인 지식, 대물 지식, 대생 지식 세 가지로 나눠서 보는 게 인상적이었다. 서양의 자연관은 자연과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나눠서 보는데 동양은 하나로 본다. 태극도설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하나의 태극이다. 그러면서도 우리 각각이 태극을 가지고 있다. 보편성 속에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그 사상을 장회익선생님은 대생지식으로 표현해주신 것 같다.
동양철학 쪽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조지 무어의 이야기, 즉 사실로부터 당위가 도출될 수 없다는 얘기를 하셨다. 이 문제는 풀리지 않는 문제이다. 동양철학에서는 서양철학보다 이 문제가 왜 더 자연스러운가 보겠다.
<중용> 초반에 나오는 구절이 있다. 하늘이 '명'한 것이 '성'이고 '성'을 따르는 것이 '도'이고, '도'로 닦는 것이 '교'이다. 여기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겠지만, 성리학 전공자로서 주희의 해석을 따르면, 하늘이라는 초월적인 존재가 있는데 인간적인 존재는 아니고 자연이다. 그냥 하늘이다. 하늘 자연이 우리에 준 '명', '천명', 그것이 인간에 내재됐을 때 '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이 그 '성'을 받았을 때는 사람이 모든 만물의 영장이므로 사람으로서의 역할이 있고, 말이 받으면 말의 본성(사람을 태우고 달리는)이 되고, 소가 받으면 소의 본성, 개가 받으면 개의 본성이다. 이런 것이 하늘이 명한 것이라고 본다. 하늘이 우리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 안에 있는 하늘과 동일하다.
내 한정된 몸 때문에 ... 본성이 다르게 표출된다. 물 속의 돌이 와인잔 속의 돌과 다르게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늘이 부여한 각각의 역할이 본성이다. 이 말은 우리한테 존재 자체가 주어지면서 너는 이러한 존재다, '너는 선비니까 공부를 해야해'가 인간의 존재와 함께 주어지는 것이다. '리'라는 보편성이 그렇게 된 까닭이며 동시에 법칙이다.
'도'에 대하여 : 주희가 <중용>을 4서 중의 하나로 선택을 하고 서문을 집필한 이유... 중화를 이룬다는 말이 있다. '도'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각각 따라야할 길이다. 한 사람이 가는 길은 길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야 길이다. '공통된 도를 따라라'가 '달도'이다. 공통된 인간의 길이 '도'이다. 그래서 인간다운 삶을 살아라는 당위가 나온다.
동양적, 유학적 사고관에서 낳고 낳는 이치... 그렇기 때문에 주역에서도 원형이정이라는 표현(=춘하추동)이 있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라는 사상이다. 그 안에서 인간이 가야할 길이 있음을 지적한다. 거기서 '오륜'이 나온다. 사람답게 공동체를 꾸릴 수 있는.
이러한 맥락에 따라서 서양학에 비해서 유학은 사실로부터 당위가 좀 더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것처럼 볼 수 있다.
<질문> 대생지식을 어떻게 이해할까? :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인이 대생 지식과 비슷한 것 아닐까?
- 최윤*
- 서양은 대물 지식이 강한 측면이 있고 동양은 대생 지식을 기반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고 책에 쓰여 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동서양의 문제가 아니라 고대 사회에서는 대체로 대생 지식적으로 생각했던 게 아닐까 싶다. 플라톤의 <국가>도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가 주제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올바름에 대한 플라톤의 질문을 생각해보면, 서양 고대 사회에서도 대생 지식적 성격이 컸을 것 같다. 이데아 중에서도 '선의 이데아'를 지선으로 생각하는 것을 보면 더 그렇다. 아리스테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봐도, 이것은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에 대한 얘기인 것 같다. 만약에 동서양이 나뉘는 지점이 있다면, 서구 근대과학 혁명이 일어날 때가 아닐까?
- 사실과 당위 사이에 논리적 단절이 없다고 장회익선생님께서 보신 것 같은데 이런 통찰이 나한테 많이 와 닿았다. '서술모드'로서의 앎 개념? 목적인?
- 고*석 : 질문을 듣고 읽은 것과 연결해서, 내 마음에 떠오른 생각/질문을 드립니다.
- 사실에서 당위를 (더 매끄럽게) 끌어낼 수 있거나 적어도 사실과 당위를 잘 연결할 수 있는 체계는 그렇지 않은 체계보다 더 나은 것인가요? (주의: 당위 판단을 할 때 우리가 관련 사실을 고려한다거나 그렇게 하는 편이 좋다는 것은 둘이 서로 독립된 범주라는 것이라는 주장을 약화하지도 강화하지도 않습니다.)
- 그 비중은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지만, 우주에서 생명을 가진 별은 얼마 안 된다고 봅니다. 우주는 대략 삶 없는(lifeless) 곳인 셈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굳이 생명에 주목하는 것은 편견이 아닐까요?
- 위의 물음들을 포괄적으로 해소할 하나의 가능한 해석은 앎이 삶을 위한, 삶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 이 관점을 지지합니다.) 장회익 선생님의 관점을 이렇게 보아도 좋을지 궁금합니다.
- 최윤* : 고*석님의 2번 질문부터 답을 하자면, 그래서 낱생명에 대해서만 적용할 수 있는 '상합 모형'을 물질 일반에 대한 모형으로 확장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물론 물질 수준에서 어떠한 가치라거나, 의미라거나, 규범이라거나 하는 것들이 온전하게 탄생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원형적인 수준에서 담지하고 있지는 않는 것일까 생각해봅니다.
- 고*석 : 아리스토텔레스가 생명을 경시한 것은 잘 몰라서 그랬을 수도. 앎은 앎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라고 전제해보리면 물음들이 해소된다. 장회익샘께서는 진리와 삶에 대한 봉사,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 김*미 : 저는 앎의 내용적인 측면도 궁금하지만, 대인 대물 대생... 특히 대생의 개념이 확실히 와 닿지 않는다. 윤리학적인 측면으로 이해하시는 걸로 느꼈는데, 생명 사상과 생 이런 것도 말씀하시는 것 같다. 설명해주시면 좋겠다.
- 이*일 : 지식이라는 단어와 앎이라는 단어, 생명이라는 단어와 삶이라는 단어. 각각이 다르다는 느낌이다. 지식은 단순한 것, 앎은 좀 더 깨달은 것? 생명은 생명 과학으로 규명할 수 있는 생명 현상, 삶은 좀 더 높은 단계의 것?
- 김*람 : 제가 이해하기론 많은 분들이 대생지식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윤리관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저자이신 장회익 선생님께서도 그런 것을 염두에 두신 것인 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생명으로 발전하는 개념인지 궁금합니다.
- 박*영 : 목적인을 포함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원인들은 개체가 태어날 때 이미 갖고 태어나는 '운명적 요소' 같은 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대생지식 등은 삶의 과정에서 궁구하고 얻어지는 것들입니다. '대생지식은 생득적 지식 혹은 선험적 지식이다'라는 새로운 주장없이 목적인이 대생지식과 등치되긴 어려울 듯합니다.
- 최윤* : 고*석님의 1번 질문에 대하여. 저는 그 두 체계의 우위를 판단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장회익 선생님께서는 그 두 체계의 발생적 기원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딱히 그 우위를 나누려 하지는 않는 듯합니다. 실제로 장회익 선생님께서는 <삶과 온생명> 1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고찰을 위하여 우리는 우선 두 가지 기본적인 사항을 인정하기로 한다. 그 첫째는 이러한 세 가지 유형의 지식들이 나름대로 모두 의미 있는 성과를 도출해낸다는 사실이다. 즉, 어느 유형은 의미 있는 지식이고 어느 유형은 그렇지 못하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p.40)
- 장회익
- 지식과 앎, 생명과 삶 차이? : 우선 한자어와 우리말이라는 데 있다. 우리말 쪽이 주체화된 것. 한자어는 객체화된 것. 앎, 삶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내가 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가 자기를 주체로 느끼는 것이 삶이다. 주체로 느끼지 않으면 삶이 아니라 생명 활동이다. 앎과 지식은 그렇게까지 나눌 것은 아닌데, 삶에 관계되는 본질적인 것이 앎 쪽이다. 지식은 우리가 보통 얘기하는 객관적인 내용이다.
- '도대체 '대생 지식'이 뭐냐?'가 오늘 주요 질문인 것 같은데,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은) 나도 100% 인정한다. 나도 겪었다. 처음부터 대인, 대물을 나누는 것은 간단한데, 그것만 가지고 동서양의 앎의 체계, 문화 체계를 이해하기는... 서구는 비교적 쉬운데, 동양은 그것만으로 잘 안 됐고, 뭐가 더 있는데 그게 뭐냐 하는 데서 문제의식을 가졌다. 많은 동양사람들은 처음부터 그것을 앎이라고 하니까 아무 문제가 없다. 그래서 나는 거꾸로 순서를 바꿨다. 나는 우리 전통 학문을 어렸을 때부터 익히면서 한 것이 아니고, 완전히 모르고 서구 학문만 하다가 뒤늦게 들여다 봤다. 그러니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김*람씨처럼 성리학을 공부한 사람이니까 받아들이고 이상할 게 없는데, 서구 과학을 하고 나서 보면 뭔가 다르다, 뭐가 다르냐 하고 묻게 된다. 그래서 아, 대생지식이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잠정적으로 생각했다. 처음부터 명백하지도 않았다.
- 최윤* 질문에서 : 대생 지식이라는 것이 뒤늦게 동양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서구에서도 대생 지식이 있었다고 지적했는데, 그런 면이 있었다. 동양의 전유물이라는 말은 아니다. 초기에 상당히 많이 그랬고, 공통점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다른 점은, 서구에서는 그렇게 가던 것이 깨져서, 그 틀에서 체계화된 것이 아니라 대인 지식 대물 지식 쪽으로 갈라져 나갔다. 동양에서는 대물 지식이 있음에도 대생 지식에 흡수하려고 했고 지금도 그렇게 내려오고 있다. 초기에 동양에도 서양에도 다 있었다고 보고, 초기에는 크게 차이가 없었을 수도 있는데. 동양에서는 대인, 대물 지식도 대생 지식에 넣어서 했다.
- 김*영 질문에서 : 동양에서도 대물 지식이 많았다.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가능하면 대생 지식의 틀 안에서 대물 지식을 함께 했다. 서구 과학에서 했던 수준으로까지는 가지 않았다. 출발선에 섰을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생 지식의 영향력이 워낙 강해서 대물 지식이 전수 계승이 안 되고, 중심적인 흐름으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 최윤* 질문에서 : '물질 현상에도 목적인이 있지 않겠나? 안정적인 구조를 가지려고 하는 것을 목적인이라고 할 수 없나?'라는 질문을 했는데, 이건 좀 철지난 이야기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떨어지는 것은 땅이 본 고향이라서 무거운 것이 떨어지려고 한다, 이런 것을 목적인으로 봤는데. 현대 과학에서 왜 그런지 거의 명백하게 밝혀지고 있다. 통계역학, 우주론, 자유에너지를 최소화하려는 방향으로 가는데, 그것이 목적이다라고 해버리면 되지만, 그게 목적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물질세계에까지 목적인을 붙이는 것은... 현재는 그런 단계를 넘어섰다.
- 대생 지식과 생명 현상의 관계? : 생명 현상에서는 삶이 유지되어야 하고 삶이 유지되도록 생명이 진화되어 왔다. 생명은 자기 삶을 성공적으로 유지하는 쪽으로 갔다. 생명이 있음으로써 대생 지식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이 동양의 대생 지식적 앎이다. 문제는 섬세하고 정교한 대물 지식이 대생 지식에 담길 수 있느냐? 그것이 꼭 좋은 것이냐?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과연 대생 지식 안에 다 포괄할 수 있는가하는 물음을 책에도 제시했고 고민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것은 우리 동양 문화권에서 못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이 있고, 어렵다. 대생 지식이라는 목표가 있지만, 대물 지식으로 봐야할 것은 역시 대물 지식으로 보면서 크게 포함시키는 것은 좋지만, 너무 좁은 영역에서까지 대물 지식을 대생 지식과 연결시키고 아니다 싶은 것을 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 폭넓은 대생 지식을 가지는 것이 좋다. 결국은 우리 삶을 잘 사는 것이 목표이다. 그 목표를 너무 좁게 해석해서 대물 지식 하나하나를 연결시키려고 하면 중요한 것을 버리게 될 수 있다.
- 이*일 : 생명과학, 생물학적인 지식에는 대생 지식이 빠져 있다. 결국은 대생 지식이라는 것이 생명 전체를 포함하는, 온생명을 이해하면 그것이 대생 지식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 김*영
- 자크 모노는 <우연과 필연>에서 '목적론 teleologie' 대신 '합목적성 teleonomie'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윈주의 진화론도 메이나드-스미스처럼 목적론에 맞추어 이해할 수 있다는 데 공감합니다. 대생지식의 문제는 유럽 르네상스 신비주의에서 말하는 소우주-대우주 감응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유럽의 근대과학 이후에도 언제나 자연철학은 삶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19세기 전문화된 과학기술에 와서야 가치를 배제한 새로운 종류의 사조(테크노사이언스)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 르네상스 신비주의에서 중시여겼던 것이 대우주와 소우주의 감응... 선생님의 대생 지식이 이와 닮았다. 선생님은 대인, 대물 지식을 근대과학 혁명 전후의 인문학과 과학에 대해서 보시는 것 같다. 유럽 18세기 계몽사조, 19세기 독일의 낭만주의, 20세기에서도 철학에서 항상 대생 지식을 추구해왔다. 그렇게 보면 선생님의 대물 지식은 19세기 이후 일단의 테크노사이언스(브루노 라투르)를 하는 사이언티스트를 의미한다고 본다. 여기서는 대물 지식을 추구했으나, 19세기의 과학자들 페러데이, 다윈, 맥스웰, 헉슬리 모두 끊임없이 자연철학작 탐구가 삶의 문제, 우주와의 조응, 신과의 만남과 만나 있다. 인류의 모든 지식은 항상 대생 지식을 추구해왔다고 생각한다.
- 장회익 : 당연히 그렇다. 그러나 주류 흐름, 예를 들어 자연과학을 하는 학자들은 자연과학에만 관심이 있다. 인문학자들 대부분은 자연과학에 관심이 없고 잘 모른다. 그 안에 개별적인 학자들이 추구하는 내용, 지향성에는 대생 지식적 측면도 있고 통합적인 것으로 가는 것도 있을 것이다. 당연하다. 100% 있고 없고가 아니라, 대략 크게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양쪽이 현재 어설픈 상태에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 최우* : 목적론적 세계관, 목적인과 대생 지식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다. 제가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 세계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고 질서가 잡혀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런 견해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대생 지식은 그런 것을 잡아내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탐구가 자기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본 것이다. 맥락이 좀 다르다. 우리가 기존에 보던 자연철학에 담기지 않는 특색이 있는 지식 부류가 있음을 잡아내기 위한 개념이 대생 지식이다. 자연 자체가 어떠하다하는 것은 자연의 특성을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의 지향점을 찾기 위한 의도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학자가 현대의 과학자를 보면 '학자'라고 부르지 않을 것 같다. 목적론적 세계관과 대생 지식은 관계가 없다고 지적하고 싶다.
<질문> 동양 학문과 서양의 지식을 구분하는 것에 대하여
- 김*영 : 동과 서로 나누는 것이 적합한가, 가능한가? 동서의 개념, 오리엔탈은 타자를 규정하기 위한 개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동양이 아니라 서남 아시아, 즉 중동, 그 중에서도 아라비아 반도, 이란, 이라크 등 이슬람 지역을 말한다. 동서 개념이 모호하고 어렵다.
- 장회익 : 동서양을 나눌 필요 없다는 말은 맞는 얘기지만, 생각 안 할 수가 없는 이유는 동양 학문은 주류에서 완전히 ... 서구 학문이 주류라는 것이 현실이다. 동양 학문에 묻혀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얘기를 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이미 우리는 동양적인 학문에서 떠나서 살아왔기 때문에 가려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양쪽을 함께 보면서 얻을 것이 없는지, 더 풍요롭게 할 수 없는지 동양 학문에 눈을 돌려보자는 것이다.
- 최우* : 동아시아 학문을 이해하고자 했던 맥락은 무엇인가?
- 장회익 :
- 우연히 & 내면적으로는, 내가 어렴풋이 알기로 우리 문화, 우리 역사를 보면 굉장히 학문을 중시해왔다. 학문의 전통도 있고 내용도 있을 텐데 어떻게 내가 교육을 받아오면서 왜 완전히 서구의 학문만 배웠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뭔가 있을 것 같은데 모른다는 데 허전함을 느꼈다. 내가 과학을 하니까 과학의 전문성도 중요하지만, 앎이라는 것을 더 넓히고 싶은 생각을 했고, 이 벽을 한번 뚫고 넘어가고 싶어서 했다.
- 개인적으로는 책에도 여헌선생 얘기가 나오지만, 우리 14대조에 여헌 선생이 있다. 학문을 했다는데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우주설>이라는 책이 있길래 도대체 우주에 대해서 무엇을 생각했나 궁금해서, 서울대 도서관 규장각에 가봤더니 없더라. 나중에 <여헌성리설>에 그 책이 들어있다고 연락이 와서 복사해서 받았는데, 한자라서 읽을 수가 없었다. 꼭 읽어보고 싶어서 한문 문법도 보면서 공부해가면서 읽었다. 읽고 보니까 두 가지 큰 소득이 있었다. 첫째, 대략 성리학이 뭔지 알았다. 둘째, 한문을 좀 읽을 수 있게 됐다. 그래서 공부를 좀 하기 시작했다.
- 여헌이 알려져있기는 하지만 <우주설>에 대한 얘기는 별로 없었다. 그래서 과학사에서 최초로 내가 알렸다. 그런 개인적인 사정이 아니었으면 한문 공부하면서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러고 나니 상당히 새로운 세계가 나타났다. 그렇다고 해서 동양의 학문 세계를 전문가들만큼 아는 것은 아니다. <우주설>만 보더라도 우주만 논한 게 아니라 성리학의 기본 개념이 녹아 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절반은 우연, 절반은 필요하다고 느껴서였다. 내가 동양사람인데 우리 동양의 학문을 이해하는 데 가장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는 것이, 역설적이다. 그래도 그나마 했던 것을 보람으로 생각한다.
<질문> 지식의 역사와 정치의 관련성?
- 장*주 :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옷도 서양식이다. 전체를 봤을 때 통합적인 사고로 보면 동양이 훨씬 강하지 않나 싶지만, 옷만 봐도 (우리가) 졌다는 느낌도 든다. 정치적인 이유는 없는지 궁금하다. 동양의 중앙집권적인 정치 역사는 관련이 없었을까?
- 장회익 : 동양 정치와 서양 정치를 그렇게 이분화 할 것은 아니다. 고대로 갈수록 봉건제도, 특권층, 왕실... 이런 것은 동서양에 다 있었다. 한국은 학문을 숭상하고 권장하는 정치 체제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계급은 있었지만. 제도적으로 학문을 못하게 한 것은 아니다. 벼슬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그 학문이 주로 자기 수양, 체제에 봉사하는 쪽이었다. 그것도 사실 서구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근대 학문이 특히 자연과학을 중심으로 르네상스 이후로 일어나기 전까지는 큰 차이가 서양에도 없었다. 정치사회적으로 차이가 있었겠지만, 학문을 어떻게 보았는가 하는 시각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질문> 사실과 가치 문제
- 김*영 :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이 사실은 잘못된 것이다(힐러리 푸트넘). 칸트적인 구별이 옳지 않다. 사실-가치 문제를 분리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무너진 지 오래다. 자연과학이 가치와 무관하게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은 쿤에 의해서 깨진지 오래다. 이론이 내가 무엇을 보려하는지 결정한다는, 포스트모던한 흐름 속에서 사실-가치 구분은 무의미하다. 푸트넘은 구분의 필요성은 인정한다. 이것은 흄 이후에 이어져온 원죄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 최우* : 우리가 사실, 당위는 연속될 수 없다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것은 아닌가? 현대 자연과학적인 것을 아무리 탐구한다고 해서 나의 바른 삶의 방향이 직접적으로 나오기는 어렵다는 것이 우리의 보편적인 이해인데. 그것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가 <과학과 메타과학> 10장의 이야기이다. 대생 지식에서 풀어가는 방식과 <과학과 메타과학> 10장에서 풀어가는 것이 좀 다른 것 같다.
- 최윤*
- 목적인은 차치하고서라도 제 생각을 담백하게 요약하자면,
- 1. 적어도 (장회익 선생님에 따르면) 동양의 직관에 따르면 사실과 당위가 서로 이분법적으로 단절되지 않는 대생지식의 추구를 강조했다.
- 2. 실제로 그러하느냐? 이에 대한 이야기가 <과학과 메타과학> 10장에서 그나마 조금 더 구체적인 논증으로 제시되는 듯하다. 그런데 이는 제가 보기에는 사실과 당위 그 둘이 발생적 기원이 같다는 주장을 했을 뿐이지, 사실과 당위 사이의 간극을 해소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시지는 않은 듯하다. 그 둘은 서로 다른 독립적 주장에 해당한다.
- 서*석 : 지구 온난화 문제에서, 탄소 증가량이 비정상적이고, 탄소는 온실효과가 있고, 갑작스런 온도 상승은 많은 생물의 멸종과 인류의 생존에 위협이 된다 라는 과학적 사실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한다라는 당위가 나오지 않나? 비슷하게 나치도 우생학에서 우울한 유전자를 보존하려면 열등한 민족을 말살해야 한다라는 경악할만한 당위로 나가지 않았나?
- 최윤* : 서*석님의 주장은 아까 고*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앎은 삶에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라는 추가 전제가 있거나, 앎이라는 개념에 그 명제가 선험적으로 포함되어 있다는생각을 받아들여야만 타당하게 이끌어져 나온다.
<질문> '우주적 실재'에서 '실재'의 개념?
- 김*우 : <과학과 메타과학> 10장 305쪽에서 '우주적 실재'의 개념이 등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실재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모형으로 추정되는 물리학적 실재 개념과 같은 차원인가? 그것이 기독교에서 신의 개념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둘을 같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종교적 관점과 지금까지 얘기한 것들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 장회익
- 우리가 우주를 이해하면 우리의 이해에 따라서 우주가 달리 보인다. 만약 우리가 우주를 다 이해를 해서 봤다면 그것이 우주적 실재이다. 수렴하는 모습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실재'를... 상당히 접근해가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의미를 준다. 실재에 접근하는 노력은 하지만 도달이라는 말은 하기 어렵다.
- 우리는 현재 살아야 하니까 현재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도 대단히 깊은 내용이다. 그걸 우리가 알려고 하는 것이 앎을 추구하는 목적이다. 내 생전에, 앞으로 몇 백 세대가 돼도 완벽한 것을 알기는 기대하기 어렵겠지만, 접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중요하다.
- 일단 내 삶은 내가 가지고 있는 최선의 실재의 모습을 바탕으로 삶을 꾸려나가자. 신이 있어서 그러냐, 자연이 그러냐? 중요한 것은 신 개념 자체가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여기에 끌어들이기 어렵다. 의미있는 그 무엇을 인정하면 유신론자에 가깝고 다 부정하면 무신론적인 쪽이다. 긍정이냐 부정이냐의 차이가 중요하다. 내 삶이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우주 속에서 내가 파악하는 본 모습, 그런 것을 우주적 실재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 김*우 : 실재를 우리가 잘 모르지만 (그러면서도) 추구하는데, 어떤 식으로 추정해야 하는가. 뫼비우스의 띠에 대물, 대인, 대생 지식을 놓아본다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렇게 보면 사실과 가치도 안과 밖으로 볼 수 있을까?
- 최우* : 비교적 동의한다. 선생님께서 이 지식 개념을 만들 때는 뫼비우스의 띠 모형이 없었는데, 지금은어떠신지 궁금하다.
- 장회익 : 전체를 아우르는 모습... 뫼비우스의 띠와 세 가지 지식의 연결은, 깊이 생각하면 관련이 있다. 삶을 살아가는 사람 앞에, 앎이라는 것은 삶 안에서 자기의 답을 해석해내는 것이다.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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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차원적 사고 확장에 도움이 되는 책 추천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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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과 실재 (아인슈타인 1936) - 독일어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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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 정리] 새자연철학세미나 5회 - 앎의 틀: 앎의 바탕 구도와 바탕 관념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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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 정리] 새자연철학세미나 4회 - "새 자연철학의 문제의식 : 통합적 앎의 필요성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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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 정리] 새자연철학세미나 3회 - "새 자연철학의 문제의식 : 통합적 앎의 필요성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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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헌 장현광과 주역이라는 변화의 자연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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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1): 천원지방, 갈릴레오, 뉴턴, 여헌 장현광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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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님(neomay3님)의 질문에 대한 저의 짧은 소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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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제 1장 발제 (서울모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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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와 이야기거리를 잘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학업 때문에 바빠서 이번 4회 모임에 겨우 참석했는데 잘 정리해주신 덕분에 조금이나마 진도를 따라간 듯합니다 ^^
^^ 고맙습니다! 수업에 시험에 바쁘실텐데 질문도 매번 올려주시고. 도움이 되셨다니 너~무 기쁘고 보람 충전됩니다!!
저는 모임 할 때 자꾸 정신줄을 놓게 돼서, 이렇게 기록이라도 하니까 좀 낫더라구요. ㅎㅎ
저도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기가 막히게 정리를 해 주시다니 놀랍습니다. 정리된 토론을 다시 읽어보니 전체적인 쟁점과 핵심 주장들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저도 이렇게 정리하고 다시 읽어보고서야 무슨 얘기들이 오갔구나 알게 됐습니다.
저는 대체로 그렇구나, 그런 거구나...하면서 그냥 옳겠거니 하면서 받아들여버리는 경향이 있어서 다른 분들 질문에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
그리고 각자 질문의 Before & After 같이 글을 올려도 좋을 것 같아요. 모임 하기 전에 가졌던 질문들이 세미나를 통해 어떻게 해소되었는지, 새로 생긴 질문들은 어떤 게 있는지도 공유해주시면 공부가 더욱 풍성해지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