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 베이즈주의 또는 QBism
아래 그림은 장회익 선생님의 접근과는 상당히 다른 입장이긴 하지만 어딘가 통하는 바가 있는 '양자 베이즈주의 QBism'의 한 삽화입니다. QB라는 이름의 서술주체가 대상에 대해 무엇인가 알고자 한다면, 변별체(손?)를 갖다대어 무엇인가 받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양자대상에 해당하는 물체는 $H_d$라 부르고 있는데, 대량 $d$개의 선택지가 있는 상태들의 모음, 즉 힐버트 공간입니다. 그 물체에 손을 대는 것, 또는 장회익 선생님의 용어로는 변별체를 접촉시키는 것을 '행위'라 부르고 $\{E_i\}$라는 기호를 붙여 놓았습니다. 여러 선택지 중 하나를 얻게 되는 것을 '경험'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수학적 형식화를 위해 $E_k$라는 기호를 붙여 놓았습니다.
(그림 출처: What is QBism?)
이 그림의 출처로 들어가면 "QBism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글 맨 처음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According to QBism, quantum mechanics is a tool anyone can use to evaluate, on the basis of one's past experience, one's probabilistic expectations for one's subsequent experience.”
(양자 베이즈주의에 따르면, 양자역학은 과거의 경험에 바탕을 두어 이후의 경험에 대한 확률적 기대를 계산할 때 사용하는 도구이다.)
양자 베이즈주의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주장은 "양자 상태는 정보이다(quantum state as information)"입니다. 장회익 선생님의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139-144쪽의 내용이 바로 이 점과 연결됩니다. 얼핏 보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바로 이 점에 주목하는 것이 최근의 가장 인기 좋은 접근입니다.
가령 알랭 아스페, 존 클라우저, 안톤 차일링거가 2022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게 된 주요 업적은 "양자정보"에 대한 탐구와 개척이었습니다. 차일링거가 주도하는 오스트리아 빈 대학 양자광학 및 양자정보 연구소(IQOQI)의 차슬라프 브루크너는 차일링거와 더불어 양자역학을 정보의 관점에서 재구성하고 접근하는 근본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Časlav Brukner (2011) Questioning the Rules of the Game
양자역학이라는 것이 그토록 복잡하고 어렵고 논쟁적이라면,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1936년의 논문 "물리학과 실재"에서 강조한 것처럼 미래 이론 또는 바탕 이론이 구축되어야 한다면, 그 가장 좋은 후보가 바로 정보이론이라는 접근입니다.
이것이 갑작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2003년에 로브 클립턴, 제프리 붑, 한스 할보른손이 이미 이런 접근의 디딤돌을 놓았습니다.
- Clifton, R., Bub, J. & Halvorson, H. Characterizing Quantum Theory in Terms of Information-Theoretic Constraints. Foundations of Physics 33, 1561–1591 (2003). https://doi.org/10.1023/A:1026056716397
2011년에 쥴리오 키리벨라, 쟈코모 마우로 다리아노, 파올로 페리노티 삼인방이 발표한 논문이 사람들의 주목을 크게 끌었습니다. 장회익 선생님과 최무영 선생님의 논문에서도 이 논문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 Giulio Chiribella, Giacomo Mauro D’Ariano, and Paolo Perinotti (2011). Informational derivation of quantum theory. Phys. Rev. A 84, 012311. https://doi.org/10.1103/PhysRevA.84.012311
양자이론을 정보이론으로부터 유도해 낸다는 매우 흥미로운 발상입니다. 더 중요한 점은 그 접근이 성공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프랑스의 우주의 근본법칙을 탐구하는 연구소(irfu, Institut de recherche sur les lois fondamentales de l'Univers)의 알렉세이 그린바움(Alexei Grinbaum)은 2007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양자역학을 해석하는 대신 양자역학을 재구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의미가 있음을 설득력 있게 주장했습니다.
- Grinbaum, A. (2003) “Elements of Information-Theoretic Derivation of the Formalism of Quantum Theory”, International Journal of Quantum Information, 1(3), pp. 289–300. https://doi.org/10.1142/S0219749903000309
- Grinbaum, A. (2007) “Reconstruction of Quantum Theory”. British Journal for the Philosophy of Science 58: 387–408. https://doi.org/10.1093/bjps/axm028
- Grinbaum, A. (2007) “Reconstructing Instead of Interpreting Quantum Theory”, Philosophy of Science 74: 761-774. https://www.jstor.org/stable/10.1086/525620
그린바움은 정보이론을 바탕으로 양자역학을 재구성하려는 세 가지 접근을 비교분석합니다.
그린바움이 분석하는 세 가지 접근은 카를로 로벨리의 관계적 양자역학(RQM, Relational Quantum Mechanics), 크리스토퍼 푹스의 양자베이즈주의, 브루크너-차일링거의 정보이론 접근입니다.
양자 베이즈주의가 요즘 인기가 좋은 것은 어떤 면에서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양자역학을 둘러싼 100년 넘는 논쟁과 많은 담론 속에서 결국 아직까지도 합의된 바가 없고 모두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렇다면 말 그대로 최소의 입장을 선택하여 양자역학이라는 물리학 이론은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어떻게 업데이트되고. 어떻게 더 적절한 쪽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해 주는 탁월한 도구라 보는 것이 더 편합니다. 소위 존재론적 부담을 피해가는 것입니다.
양자 베이즈주의 이전에 확률에 대한 베이즈주의(Bayesianism)은 확률 이론의 철학적 해석에서도 탄탄한 지지세력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18세기의 장로교 목사이자 아마추어 수학자이자 통계학자 및 철학자였던 토머스 베이즈(Thomas Bayes 1701-1761)은 당시 막 생겨나서 유럽 여기저기에서 조금씩 말이 오가던 확률의 계산에 관심을 가지고 특히 ‘베이즈의 정리’라 부르는 것을 제안했습니다.
베이즈주의에서는 확률이라는 것인 여러 시행에 대한 빈도의 분포라고 보는 대신 특정의 단일한 시행에 대해 사람이 갖는 기대, 불확실성, 믿음의 정도라고 봅니다. 아이러니라면, 토머스 베이즈주의는 어쩌면 베이즈주의자가 아니었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양자 베이즈주의 또는 QBism은 확률에 대한 베이즈주의를 양자이론으로까지 확장하여 주장하는 분파인 셈입니다.
제 자신은 양자 베이즈주의가 무척 끌릴 뿐 아니라, 제가 장회익 선생님께 배운 서울해석의 20년쯤 전 버전은 바로 양자 베이즈주의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는 곧잘 ‘최소주의 해석’이란 표현도 사용되었습니다. 이중원 선생님의 논문에도 그 내용이 나옵니다. 양자역학이라는 어떤 수학적 체계가 작동하는 것을 말 그대로 최소로만 이해하자고 하면, 양자 베이즈주의는 아무래도 자연스러운 선택지입니다.
그런데 양자상태를 정보라고 보고 양자역학 전체를 재구성하고 유도하려는 접근이 보이는 가장 근본적인 한계점은 바로 존재론적 함축에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결국 따지고 보면 정보라고 말하는 것은 존 아치볼드 윌러가 "It from Bit"라는 상징적인 문구로 제안했던 믿음입니다. 물질이든 에너지든 엔트로피든 결국은 모두 정보라고 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더 강하게 밀고나가다 보니 어느 순간 'It'이 사라져 버리거나 허상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생명이란 것은 결국 핵산에 새겨진 코돈 정보이고, 양자이론에서 말하는 입자는 양자수라는 정보로 주소가 매겨지는 양자상태이며, 물질의 근본은 그 구성요소가 맞물려 있는 기본 메커니즘으로서의 정보라는 식의 SF에 가까운 주장들이 점점 더 널리 퍼져가고 있고, 이를 퍼뜨리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하간 양자역학이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성향’이라고 부르든 조금 더 신비한 ’현상‘이라고 부르든, 양자역학의 존재론적 함축을 더 깊이 고민해 봐야 할 것입니다.
번호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추천 | 조회 |
공지사항 |
[자료] 유튜브 대담영상 "자연철학이야기" 녹취록 & 카툰 링크 모음 (2)
neomay33
|
2023.04.20
|
추천 2
|
조회 8082
|
neomay33 | 2023.04.20 | 2 | 8082 |
공지사항 |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정오표 (10)
시인처럼
|
2022.12.22
|
추천 3
|
조회 10217
|
시인처럼 | 2022.12.22 | 3 | 10217 |
194 |
과학은 진리가 아니라 일종의 믿음의 체계 (2)
자연사랑
|
2023.09.05
|
추천 1
|
조회 750
|
자연사랑 | 2023.09.05 | 1 | 750 |
193 |
물리학 이론의 공리적 구성
자연사랑
|
2023.08.30
|
추천 3
|
조회 664
|
자연사랑 | 2023.08.30 | 3 | 664 |
192 |
양자역학으로 웃어 보아요 (1)
시지프스
|
2023.08.28
|
추천 0
|
조회 796
|
시지프스 | 2023.08.28 | 0 | 796 |
191 |
양자 얽힘과 태극도(음양도) 그리고 '양자 음양' (1)
자연사랑
|
2023.08.25
|
추천 3
|
조회 1709
|
자연사랑 | 2023.08.25 | 3 | 1709 |
190 |
수식 없이 술술 양자물리
자연사랑
|
2023.08.24
|
추천 2
|
조회 934
|
자연사랑 | 2023.08.24 | 2 | 934 |
189 |
양자이론을 정보이론으로부터 유도하기
자연사랑
|
2023.08.17
|
추천 1
|
조회 819
|
자연사랑 | 2023.08.17 | 1 | 819 |
188 |
양자 베이즈주의 또는 QBism (1)
자연사랑
|
2023.08.16
|
추천 2
|
조회 979
|
자연사랑 | 2023.08.16 | 2 | 979 |
187 |
실재론-반실재론과 리 스몰린 (1)
자연사랑
|
2023.08.15
|
추천 3
|
조회 971
|
자연사랑 | 2023.08.15 | 3 | 971 |
186 |
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젠 논변과 벨의 정리
자연사랑
|
2023.08.14
|
추천 1
|
조회 967
|
자연사랑 | 2023.08.14 | 1 | 967 |
185 |
양자 얽힘과 비국소성
자연사랑
|
2023.08.14
|
추천 3
|
조회 1199
|
자연사랑 | 2023.08.14 | 3 | 1199 |
양자베이즈주의에 대한 소개를 넘어 양자역학을 정보이론으로부터 유도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 대해 조금 더 다루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