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꼽문] 책새벽-월.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31, 32장, 부록.
녹색아카데미 온라인 책읽기 모임 '책새벽-월' 시즌3에서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을 읽었습니다! 시즌3 마지막 책꼽문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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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 지음. 장경렬 옮김. 2010. 문학과지성
제31장
p.717-718.
다시 모터사이클을 타고 달리는 동안, 나는 문득 크리스가 또 하나의 파이드로스라는 깨달음에 이른다. 그는 예전의 파이드로스처럼 생각하고, 예전의 파이드로스처럼 행동하는 또 하나의 파이드로스, 단지 막연하게 의식될 뿐 정체를 모르는 힘에 의해 내몰린 채 말썽거리를 찾아 헤매는 또 하나의 파이드로스인 것이다. 물음을 . . . 동일한 물음을 계속 묻는 존재. . . . 그는 모든 것을 다 알고자 하는 존재다.
제32장
p.732-733.
나무와 관목과 작은 숲들이 좀더 이어진다. 날씨도 점점 더 따뜻해진다. 크리스가 이제 내 어깨를 잡고 있다. 약간 몸을 돌리고 보니 그가 발걸이에 발을 올려놓고 몸을 일으켜 세운 채 서 있다.
“그거 좀 위험해 보이는데.” 내가 이렇게 말한다.
“아니,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
잠시 후 우리는 급회전을 하여 유자형으로 굽은 길로 들어선다. 길 위로 드리워진 나뭇가가지들 아래로 지나가는 동안 크리스가 이렇게 소리친다. “오!” 그리고 잠시 후 “아!”라고 소리치더니 “이야!”라고 감탄사를 내뱉는다. 길 위에 드리워진 이 같은 가지들 몇몇은 너무도 낮게 드리워져 있어서, 조심하지 않으면 그의 머리를 때릴 수도 있다.
“뭣 땜에 그러니?” 내가 그에게 묻는다.
“너무도 달라 보여서요.”
“뭐가?”
“모든 게요. 아빠 어깨 너머로 앞을 볼 수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
정말로 그렇다. 나는 결코 그 사실을 의식한 적이 없었다. 이제까지 내내 그는 내 등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뭐가 보이니?” 내가 크리스에게 묻는다.
“세상이 온통 달라 보여요.”
후기
p.736.
이 책은 고대 희랍인의 시각과 그러한 시각이 갖는 의미에 관해 많은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 빠진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시간에 대한 그들의 관점이다. 그들은 미래란 우리의 등 뒤쪽에서 다가오는 그 무엇으로 보았다. 그리고 과거란 우리의 눈앞에서 멀어져가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대해 생각을 해보는 경우 우리는 이 같은 시각이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것보다 더 정확한 시간에 대한 비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로 미래를 정면에서 보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과거를 바탕 삼아 미래를 투사하는 것뿐이다. … 과거를 빼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어디 따로 있을 수 있겠는가.
p.741.
나는 계속 삶을 이어왔다. 무엇보다도 습관의 힘에 밀려 삶을 이어왔다. 그의 장례식장에서 우리는 그가 그날 아침 영국으로 가기 위한 비행기 표를 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나는 영국에서 새로 만난 아내와 함께 요트에서 선상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얼마 후 그가 보낸 편지 한 장이 나에게 배달되었는데, 묘하게도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저는 제가 스물제번째 생일까지 이 세상에 살아 있게 되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어요." 2주만 더 있으면 그의 스물세번째 생일이었다.
p.743.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면, 내가 그처럼 몹시도 그리워하는 크리스는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패턴이라는 점, 비록 그 패턴 안에는 크리스의 파와 살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이 패턴에 포함되어야 할 전부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 패턴은 크리스와 나 자신보다 거대한 것이고, 우리 누구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또한 우리 누구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연결하고 있다.
이제 크리스의 몸은, 그와 같은 거대한 패턴의 일부였던 크리스이 몸은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거대한 패턴은 남아 있다. 그 패턴의 한 가운데에 엄청난 구멍이 뚫린 것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처럼 몹시도 가슴이 아픈 것이다. 그 패턴은 결합할 대상을 찾고 있지만, 어디에서도 그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슬픔에 젖어 있는 사람들의 묘지의 비석과 망자의 물질적 소유물이나 망자를 나타내는 그 무엇에 그처럼 애착심을 느끼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이는 패턴이 무언가 새로운 물질적 대상을 찾아 그 중심에 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부록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와의 대화” 중에서
p.755.
책이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를 책 자체가 실천적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이 책을 집필하면서 나는 “만일 이 책이 질에 관한 것이 되고자 한다면, 글쓰기의 측면에서 이 책 자체가 하나의 전범이 되도록 하는 데 실패하지 않아야겠다”고 혼자 생각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p.755.
모두 121군데의 출판사로부터 거절을 당한 후, 이 책의 출판 전망을 놓고 틀림없이 낙담했을 것입니다. … 출판을 성사시켜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면,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지요?
==> 그처럼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 편지는 모두 … 전동 타자기를 사용하여 동시에 작성한 것이엇지요. 처음에는 22군데 출판사에서 관심을 보였지만, … 4년이 흐르는 동안 그 숫자가 여섯으로 줄었습니다. 이 여섯 군데 출판사가 원고를 읽고는 단지 한 군데에서만 이를 원했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필요한 것은 물론 단 한 군데지요.
“이 책에 대하여” 중에서
p.761-762.
친애하는 피어시그 씨에게,
…
… 여기에서 또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책에 대한 시장 수요를 측정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입니다. 어쩌다 나는 이 책이 거의 고전의 몫을 할 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물론 상업적 판단이 아닙니다. …
..
책의 미래와 관련하여 대단히 광범위하고 견실한 독자층을 확보하리라는 점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독자층이란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
- 수석 편집자 제임스 랜디스
p.765.
제임스 랜디스(편집자)의 1973년 8월 2일 자 메모
누구나 인정하듯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작가이자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인 조지 스타이너는 . . .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을 읽고 나에게 “비교를 불허하는 탁월한 책”이라는 의견을 나에게 보내왔다. 그는 이 책의 위상을 도스토예프스키와 브로흐의 업적 . . . 그리고 프루스트와 베르그송의 업적과 견주기도 했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작품론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 - 피어시그의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 말해주는 것
장경렬
p.767-768.
…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 가치에 대한 탐구』는 지난 1974년 출간되어 “23개 언어로 번역(서문, 11)”되었고, 30년 남짓의 기간 동안 최대 6백만 권이 팔린 것으로 추정되는 책이다.
p.772.
주인공은 자신이 재구성해나가는 ‘과거의 자신’을 “파이드로스”라는 이름으로 부르는데, 고대 희랍 시대의 소피스트 가운데 한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이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어떤 의미에서 보면, 파이드로스라는 이름은 부활한 소피스트를 암시하는 것일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이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이 소설이 핵심 주제인 잃어비린 가치 - 너무나 오래되어 기억에 희미한 과거의 것이 되고 만 잃어버린 가치 - 에 대한 탐구를 지시하는 것일 수 있다.
p.779-780.
오랫동안 세계를 지배하던 반 소피스트적 시각- 즉,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의 눈으로 소피스트들을 보는 시각 -에 최초로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19세기 후반의 철학자 니체일 것이다. 그는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이 내세운 명증한 철학의 언어도 일군의 “메타포, 환유, 의인화”로 가득 찬 수사의 세계임을 간파한 바 있다.
이 같은 니체의 논리는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더욱 강력하고 체계적인 비판 논리로 발전하는데, 그 중심부에 놓이는 것이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논리다. 데리다의 논리를 통해 사람들은 비로소 수사학에 대한 변증법의 공격이 기본적으로 수사에 바탕을 둔 것이고 철학도 수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논리에 새롭게 눈 뜨게 된다.
p.781.
주인공의 모터사이클 여행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파이드로스의 질에 관한 탐구의 과정에서도 이 책의 제목에 담긴 “선”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p.784.
결국 파이드로스(과거의 저자)의 질에 대한 탐구에서 고대 희랍의 “아레테”나 “선”이 개념적으로 이(질. quality)에 상응하는 것이라면, 방법론적으로 질에 상응하는 것은 바로 “선”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선이야말로 파이드로스가 추구하는 질의 세계에 들어가는 하나의 길이었던 것이다.
…
말할 것도 없이, 바로 여기에 암시되고 있는 삶의 태도가 피어시그가 제안하는 ‘제3의 대안’이다. 물질적인 것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삶을 살고자 할 때, 그러면서도 물질적인 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히피적인 삶의 방식에 빠져들지 않고자 할 때 우리에게 가능한 ‘제3의 대안’으로 피어시그가 제시하고 있는 길은 바로 동양적 선의 논리인 것이다.
p.785.
한편 로널드 디산토가 지적했듯,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의 전체적 구조는 12세기 중엽 중국 송나라의 곽암 선사가 남긴 ‘십우도’와 연결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에 대한 탐구 과정에 선불교가 갖는 의미를 가늠해볼 수 있다. … 자기 곁에 있지만 보지 못하는 소- 말하자면, 자신의 본성 -를 찾아 헤매는 수행자의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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