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정의하기 - 자율성 vs. 진화
2008년 2월 프랑스 파리에서 "생명을 정의하기(Defining Life)"라는 제목의 학술회의가 열렸습니다.
장 가용, 크리스토프 말라테르, 미셸 모랑주, 플로랑스 롤렝-세르소, 스테파느 티라르 등이 학술회의 조직을 맡았고, 화학자, 생화학자, 생물학자, 외계생물학자, 우주생물학자, 컴퓨터과학자, 철학자, 과학사학자 등이 발표를 했습니다. 여기에 추가적인 논문까지 덧붙여 15편의 논문이 2010년에 Origins of Life and Evolution of Biospheres라는 학술지에 실렸습니다.
- Gayon, J., Malaterre, C., Morange, M. et al. Defining Life: Conference Proceedings.
Orig Life Evol Biosph 40, 119–120 (2010). https://doi.org/10.1007/s11084-010-9189-y
- Ruiz-Mirazo, K., Peretó, J. & Moreno, A. Defining Life or Bringing Biology to Life.
Orig Life Evol Biosph 40, 203–213 (2010). https://doi.org/10.1007/s11084-010-9201-6
2012년 '인식론, 방법론, 과학철학'에 특화된 학술지 생테즈(Synthèse: An International Journal for Epistemology, Methodology and Philosophy of Science)에 특집으로 실린 주제가 "생명에 관한 철학적 문제들(Philosophical Problems about Life)"이었습니다. 마크 베다우(Mark Bedau)가 편집을 맡아 아홉 편의 흥미로운 논문들을 모았습니다.
- Synthese. "Philosophical Problems about Life". Volume 185, issue 1, March 2012
케파 루이스-미라소(Kepa Ruiz-Mirazo)와 훌리 페레토(Juli Peretó)와 알바로 모레노(Alvaro Moreno)가 쓴 "진화 속의 자율성: 최소생명부터 복잡한 생명까지"는 위의 논문을 확장하여 생명체에서 자율성과 진화의 상관관계를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습니다.
- Ruiz-Mirazo, K., Moreno, A. Autonomy in evolution: from minimal to complex life. Synthese 185, 21–52 (2012). https://doi.org/10.1007/s11229-011-9874-z
이 논문의 핵심 주장은 생명을 이해하려는 심원한 노력들 속에서도 실질적으로 늘 포함되는 다음 두 관념에서 시작합니다.
- (i) 살아 있는 계는 살아 있지 않은 계와 근원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조직화되어(organized) 있다.
- (ii) 살아 있는 계는 살아 있지 않은 계과 근원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change in time).
루이스-미라소와 모레노는 이 두 관념, 생명의 집합적-진화적(collective-evolutionary) 측면과 개체적-체계적(individual-systemic) 측면이 깊이 얽혀 있으며 어느 한 쪽도 포기할 수 없음에 주목합니다. 여하간 생명체는 매우 정교하게 조직된 하나의 단위이며, 이 중 주요 요소가 빠지면 작동이 어렵거나 불가능하게 되어 살아 있지 않은 계로 변합니다. 즉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생명체는 근본적으로 열린 계여서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물질과 에너지와 정보를 받아들이고 이를 다시 외부에 보내는 과정을 중심에 둡니다. 게다가 긴 시간의 스케일에서 보면 전체적으로도 뚜렷한 변화를 보입니다.
그런데 만일 후자에만 주목해서 생물학적 조직화의 본질이 살아 있는 계들 사이의 다양한 상호작용의 그물망이라고 여기게 되면, 개체생명 즉 개별적인 생명체가 하나의 완결되고 자족적인 단위가 되는지 여부가 불투명해집니다. 가령 요즘 초유기체(superorganism)라는 말로 부르는 사회성 곤충들에서 일개미, 여왕개미, 수캐미, 병정개미 등과 같이 역할에 따라 다른 삶을 살아가는 개체들 특히 생식능력을 처음부터 포기한 일개미의 희생 같은 것을 강조하다 보면 자칫 우생학(eugenics)이나 전체주의적 발상으로 연결되기 쉽습니다.
특히 제가 비판적으로 보고 있는 유전자중심주의(대표적으로 리처드 도킨스의 대중적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설명되고 있는 친족선택이론 등)나 과도한 사회생물학의 접근은 전체주의적 발상과 꽤 가까이 있는 듯 보입니다. 에드워드 윌슨은 오히려 중심을 잘 잡으면서 균형감을 보이는 반면, 밈이론이나 과도한 진화학자들의 주장은 꽤 편향되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 진화와 관련된 논의를 하는 다수의 학자들이 이 편향에 속하기 때문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와 달리 전자에만 주목해서 생명체를 하나의 물리적 및 생화학적으로 완결된 체계로 보고 그 안에서 메커니즘과 지엽적 문제의 해결에만 매달리는 것은 현재의 주류 생명과학의 접근으로서 열린 계로서의 생명체를 자주 도외시합니다.
루이스-미라소와 모레노는 "고도의 통합되고 응집된 개별적 조직화가 없다면 살아 있는 계는 더 넓고 더 복잡한 역사적-집합적 메타 그물망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개별적인 대사적 조작라는 강력한 관념이 없으면 기능성, 주체성, 자연선택의 단위 등과 같은 자연화된 설명을 제시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며, 유기체와 다른 형태의 협동적 (또는 '생태학적') 네트워크를 명료하게 구별할 수 없게 될 것"임을 지적합니다.(Ruiz-Mirazo, Peretó, Moreno, 2012, p. 26)
집합적-역사적 측면과 개별적-조직적 측면 중 어느 하나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온생명론의 언어로 다르게 표현하면, 온생명의 안위와 생존을 위해서는 개체생명의 안위와 생존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는 말과 같을 것입니다. 온생명 개념을 강조하다가 개체생명을 무시해서도 안 되고, 개체생명에만 주목하다가 온생명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루이스-미라소와 모레노는 이 두 가지 측면을 모두 포괄하는 생명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생명은 "스스로 재생산하는 자율적(autonomous) 주체들의 복잡한 네트워크로서, 그 기본 조직은 조정가능한(open-ended) 역사적 과정을 통해 생성된 물질적 기록의 지시를 받으며, 그 역사적 과정 속에서 집합적 네트워크가 진화한다." (Ruiz-Mirazo & Peretó, 2010, p. 207; Ruiz-Mirazo, Peretó, Moreno, 2012, p. 27)
여기에서 '자율성'은 개체 수준에서 살아 있는 계가 보이는 주요 특성을 최소한의 생화학적 의미에서 포괄합니다. (i) 자체구성: 생명은 세포의 물질대사를 통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 (ii) 환경에 대한 또는 환경을 통한 기능적 작용: 유기체가 평형에서 매우 멀고 흩어지는 계로서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그 경계조건을 필연적으로 수정하는 주체(agents)라는 것. 이 중 후자는 스피노자가 '코나투스'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던 그 살아남기 위해 매순간 노력하고 욕망하는 바로 그것이고, 한스 요냐스가 생물학의 철학에서 강조했던 요소이기도 합니다.
'조정가능한 진화'는 상호작용하는 개체들 사이의 복잡한 네트워크로서 그 복잡성을 한없이 증가시키면서 장기적인 변화가정을 겪는 집합적-역사적 현상을 포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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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에 대한 여러 논의를 잘 정리해 놓은 리뷰 논문을 소개합니다. (이전에 자연철학 세미나에서 이 댓글을 달았었는데, 지금 다시 살펴볼만하다고 생각되어 새로 댓글을 올립니다.)
2020년에 나온 리뷰논문이 유용합니다. 제목은 "생명이론들의 비교"입니다. 자가촉매집합, 자체생성, 케모톤, 닫힘, 초순환, 대사순환, (M, R) 시스템, 생명의 기원, 스스로 짜임(자기조직화) 등을 키워드로 하고 있습니다. 장회익 선생님의 자연철학적 사유와 온생명론이 어디쯤 위치하고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리뷰논문입니다.
Athel Cornish-Bowden, María Luz Cárdenas (2020). Contrasting theories of life: Historical context, current theories. In search of an ideal theory, Biosystems, Volume 188, 104063,
https://doi.org/10.1016/j.biosystems.2019.104063
Keywords: autocatalytic sets, autopoiesis, chemoton, closure, hypercycle, metabolic circularity, (M,R) systems, origin of life, self-organization.
첨부파일 : cornish-bowden-cardenas2020_theories_of_life.pdf
감사합니다!
단지 우연이겠지만, 생명론 또는 생명철학에서 활발하게 논문을 발표하고 책을 쓰고 하는 학자들이 주로 프랑스와 스페인(에스빠냐)에 집중되어 있는 듯 합니다. 루이스-미라소, 페레토, 모레노 등이 모두 스페인에 적을 두고 있고, 이름으로 추측하면 모두 스페인 사람입니다. 2008년 파리에서 열린 학술회의의 발표자들도 다수가 프랑스 아니면 스페인에 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냥 우연일까요?
이전에 올린 "[질문] 자체촉매 국소질서와 집단 자가촉매집합"을 한번 더 질문으로 올려보고 싶습니다.